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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원하노니 (막 1:4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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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노니 (막 1:40-45)


공생애 초기 사역의 중심지였던 가버나움을 벗어나 갈릴리 전역에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계시던 예수님 앞에 한 나병환자가 다가왔습니다. 그 앞에 무릎을 꿇어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간절한 마음이 묻어 나오는 음성으로 말합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님께서 그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헬라어로는 딱 두 마디입니다. “텔레오. 카싸리스쎄티.”(원한다. 깨끗함 받으라.) 이 말씀은 나병환자의 간구를 그대로 받아서 하신 것이기는 하지만, 이 짧은 말씀 안에는 엄청난 의미와 변화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환자가 깨끗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 앞에 나아와 병 고침을 입은 이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자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을 “나병환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나병`은 요즘 말하는 한센 병을 포함하여, 피부와 모발에 나타나는 각종 질병에도 사용되었고, 의복과 건물 등에 번진 곰팡이류에까지도 사용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의복이나 건물에 생기는 “나병”은 옷을 태우거나, 건물에 병이 퍼진 부분을 제거하거나, 아예 건물을 부수어서 동네 밖에 버리면 끝납니다. 그러나 일단 사람이 ‘나병`에 걸렸다고 판정되면 그 사람은 그 이후부터 매우 고통스러운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병 자체를 치료하지 못해서 겪는 육체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 병은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심각한 해악 중의 하나였습니다. 흔히 중대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 생각되었고, 그 병에 걸렸다고 판정된 사람들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정한 자로 여겨져서 일체의 사회적 활동을 금지 당했으며 사람들과의 접촉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나병환자들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포함하여, 성벽으로 둘러싸인 곳에는 살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은 지역에서도 사람들과 함께 살지 못하였고 혼자 살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일을 할 수 없었기에 먹을 것이 부실했고, 제대로 된 집에 살 수 없었기에 그들이 사는 곳은 그들의 몸을 보호하기 보다는 상태를 더 악화시키기 일쑤였을 것입니다.율법에 따르면,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레 13:45-46)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돌을 던져서 그를 죽게 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되어있습니다. 병이 다른 사람들에게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나병환자들은 분명 살아있기는 살아있지만 사회적으로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간혹 나병이 나은 사람이 있으면 마치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것과 같이 여길 정도였습니다.이와 같이, 유대사회에서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삶을 박탈당한 채 공동체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공동체에서 쫓아내는 것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단절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해하고 있었기에,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로부터의 추방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이해되었습니다. 즉 나병에 걸린 사람은 사람들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 모두가 단절된 상태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거기다 성 밖에 살면서 자연과 투쟁하면서 생존해야 했기에 자연과의 관계도 다른 관계들과 같이 파괴된 채, 자연이 주는 고통도 온 몸으로 겪어야만 했습니다. 
다시 말해, 나병에 걸린 사람은 그 사람의 이전 지위나 학식이나 인품과는 상관없이 죄인으로 취급되어 하나님을 예배할 수도 없고, 가족을 포함한 어떤 사람들도 만날 수 없으며, 자연과 투쟁하면서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목숨을 이어가야만 했던 사람들입니다. 

본문은 바로 그런 나병환자 한 사람이 예수를 만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이 만남 자체가 정말 ‘사건`입니다. 지금이라면 각종 언론에서 특종으로 다루어질 일입니다. 그는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청하였습니다. 율법에 의해 어떤 사회 활동도 대인 접촉도 금지되었던 나병환자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왔고, “부정하다”외치며 피하게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앞에 가까이 왔습니다. 진정 이 사람은 자신이 놓여 있는 상황, 곧 하나님과의 단절, 사람들과의 단절, 그리고 자연과의 투쟁의 삶에서 벗어나길 원했고, 예수님께서 원하시면 그것을 가능케 할 수 있다고 믿고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당황케 할 것을 알고도 예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그는 최대한의 정성과 겸손을 표현하기 위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것은 자신을 고치라는 명령을 부드럽게 돌려서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그 나병환자는 자신의 소망만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뜻을 묻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을 읽으면서 그 나병환자는 예수께서 자신을 고쳐주지 않으실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원하시면”이란 말 속에 “원하시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신앙을 담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가 한 말은, ‘자신의 치유는 전적으로 예수님의 뜻에 달려 있는 것이며, 결코 그가 가진 특별한 기술이나 어떤 효험 있는 물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는 고백입니다. 나병환자가 “원하시면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고 한 것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의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치료해주고 또는 해주지 않고는 전적으로 예수님의 뜻에 달려 있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능히 고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치료가 불가능한 병조차도 고치실 수 있는 분임을 믿고, 그 능력을 자신에게 허락하실 지를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깨끗해지지 않았는데 깨끗해졌다고 말로만 선언하신 것이 아닙니다. 나병이 다 나아서 그를 얽어매고 있던 모든 속박과 부정함의 굴레들이 벗겨졌다는 선언입니다. 다르게 표현해 봅니다. ‘저를 깨끗하게 하는 일이 예수님의 뜻이기를 원합니다!` 간구하는 이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그래. 그래서 내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내가 이 땅에 왔다.`이러한 예수님의 의지는 그의 주되심의 표현이며, 이 의지에 의해 나병이 치료되었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 나병환자의 요청과 예수님의 대답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특이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나병환자는 자신이 ‘치료되기를 원합니다.` 하지 않고, “깨끗하게”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제가 앞에서 병의 고침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지만, 실지 본문의 그 환자와 예수님 사이의 대화에서의 표현은 “깨끗하게 함”입니다. 이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나병은 의학상의 문제이기 이전에 신앙의 문제, 곧 율법의 문제요 의식법상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 나병환자는 자신의 병으로 인해 자연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채 부정한 죄인으로 살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단절된 관계들을 회복시키셔서 그를 깨끗한 자로, 하나님께 용납 받는 의로운 자로 변화시키길 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주셨습니다. 병을 고쳐주었고,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셨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해주셨고,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환자의 전인격을 깨끗하게 해주시길 원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말로만 깨끗함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병환자를 “불쌍히 여기셨다”(41)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병환자를 향하신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과 동정을 동시에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는 곧 그가 받는 모든 고통을 목격하고 더불어 그 고통에 동참할 뿐 아니라 그 고통을 치유해 주고자 하시는 마음이 간절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히 4:15 -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그런데 어떤 성경 고대 사본들 중에는 “불쌍히 여기셨다” 대신에 “화를 내셨다”고 쓰여 있기도 합니다. 

그 사본들을 따라 41절을 읽으면 “예수께서 화를 내시며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가 됩니다. 문맥상 화를 내셨다는 것이 어색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화를 내신 것은 그 환자 당사자가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의 믿음 없음을 책망치 않으셨습니다. 잘못된 것을 구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가 간구한 그대로 들어주셨습니다.예수님께서 화를 내신 것은 그 사람을 그렇게 처참하게 만들고 있는 악에 대한 분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마음으로 그 사람과 하나가 되었으며, 함께 그를 얽어매는 모든 악한 것들과 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음만 그렇게 먹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만져주지 않는 부정하고 더러운 그 몸을 예수님은 친히 그 손을 내밀어 만지시면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하셨습니다. 누구를 만지셨습니까? 쉽게 옮겨지는 병에 걸린 환자, 나병환자를 만지셨습니다. 병과 함께 종교적인 부정함으로 물들어 있다고 여겨지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함께, 이 예수님의 구체적인 행동도 중요합니다. 아니 예수님에게 있어서 마음과 행동은 하나입니다. 

마음으로 원하시고 그것을 행동으로 드러내십니다. 어느 것 한 가지가 빠져있지 않습니다. 부정함이 옮겨져 도리어 부정하게 되었다고 여겨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모세의 정결법이 분명히 부정하다고 간주한 행동을 서슴지 않고 하신 것입니다. 실로 예수님의 마음과 그 행동은 사랑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진정 예수님은 인류 구속의 메시지를 단지 입으로만 전한 것이 아니라 말과 행동과 인격 전체를 통해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인간들에게 내재해 있는 두려움과 그릇된 관념을 타파하시기 위해 친히 몸으로 진리와 사랑을 실현하셨습니다. 실로 그 분의 사랑의 손길은 의식법의 부정이 지니는 힘보다, 나병 균의 힘보다, 사람들의 시선보다 더 강하고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마음과 말씀과 행동과 인격 전체를 통해 나병환자가 깨끗해지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이제 깨끗함 받았습니다. 일차적으로는 나병이 사라져서 육체적 고통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가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제사장에게 보이고 나병이 나았다는 사실을 확인 받기만 하면 사회로 복귀해서 사람들과 만나고 하나님을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이전이라 하더라도 그는 이미 예수님과 대화했고 예수님이 만져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 서두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선언하였습니다. 

그런 분이 나병환자와 만나주고, 대화를 주고받고, 직접 손을 대는 행동을 하셨습니다. 그 병자는 이미 참 사람이신 예수님과의 그 만남을 통해 사람들과의 관계도 회복되었고, 하나님의 아들의 주권적인 원하심과 어루만져 주심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도 회복되었으며, 병의 나음과 생업으로의 복귀에 의해서자연과의 관계도 회복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제사장에게 보여야 하는 것은 그 회복된 관계들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파”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나음 받은 사람은 회복된 관계들에 대해 전파하기 보다는, 예수님께서 나병을 치유한 일을 널리 전함으로써 예수님께서 동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시게 되었습니다. 주의를 주어 삼가도록 예수께서 당부하셨지만, 이제 예수님은 복음의 말씀을 선포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나병까지도 치료하는 신비한 능력자로 비쳐지게 되었고, 사람들은 예수에게서 신비적 체험만을 기대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예수님은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셨습니다. 외로이 따로 살아야 했던 그 나병환자 대신에 예수님께서 동네 바깥 한적한 곳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한적한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옴으로써 예수님의 사역은 여전히 계속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그를 전파하는 일의 초점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 지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기적이 있어야만 하나님을 믿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 기적만을 세상에 전파하여 예수님을 뛰어난 마술사로 만드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기적뿐만 아니라 평범한 일들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구원자임을 알려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집중할 대상은 기적도, 기적을 행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우리가 전할 내용은 기적이 아니라 기적과 평범한 일 모두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인간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하나님에 의해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며 세상을 향한 증언의 내용입니다. 

다시 “내가 원하노라”라는 오늘의 주제로 돌아오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마음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고 있습니다. 
자신을 찾아온 그 나병환자를 깨끗케 해주신 것처럼,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의 깨끗해짐”을 원하고 계십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우리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모두로부터 단절된 채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바로 예수님을 찾아왔던 그 나병환자입니다. 
단지 그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나병환자는 그 문제로 인해서 엄청난 고통을 겪으면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고, 우리들은 겉으로 우리의 죄악된 상태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고 여전히 건강한 사람인양 행세하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더라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 엎드리지 않습니다. 입을 열어 하나님께 구하더라도,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고, 세상에서의 지위나 명예를 내세우고, 평생을 통해 이루어낸 공로들을 내세워 하나님께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요구합니다.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주시는 위로를 거절하고, 믿음의 형제자매를 통해 때로는 직접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거절합니다. “나는 깨끗하다, 깨끗하다!” 스스로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여전히 자신의 공로를 전파합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예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부정하고 부정한 자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앞에 겸손히 무릎 꿇습니다.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성부 하나님은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기 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찬송을 받으시는 성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과 동등됨을 버리셨고 땅에서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버리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는 성령님은 우리의 상처 입은 마음을 위로하시고 호흡하게 하시고 삶에 기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 삼위일체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모든 어그러진 관계들이 회복되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나병환자를 사랑하시고 만져주시며 깨끗케 해주셨던 그 주님께서, 지금 우리를 사랑하시며 만져주시고 깨끗케 해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복된 소식, 곧 “복음”입니다. 이 복음이 온전히 여러분 모두의 삶에서 그대로 복된 소식이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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