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깊은 곳을 향하여(3) (눅 5:12-16)

첨부 1


깊은 곳을 향하여(3) (눅 5:12-16)

:12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1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14 예수께서 그를 경고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니, :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우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 말씀을 의지하고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번영을 넘어서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고 주님 앞에 무릎 꿇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헨리 나우웬, 이 분은 이 시대의 영성가이자, 명성 있는 학자입니다. 갑자기 그가 하버드대학 교수직을 사임하였습니다. 그리고 지적 장애인 수용시설인 데이브 레이크 복지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지적 장애인의 용변을 치우고 목욕을 시키는 일 등을 하였습니다. 모두들 그에게 “왜 그러느냐?”라고 물었지만 그는 몇 개월 동안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예수 이름으로’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동안 나는 올라가는 길만을 추구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해 신동이라고 추앙되고 하버드 교수에까지 올라왔다. 나의 저서 20여 권은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어느 날 지적 장애인 아담 군을 만났을 때 인간의 고통에 동참하는 내리막길을 통하여 예수님을 바로 알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르막길에서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지만 내리막길에서는 복음에서 나타난 진정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다.”

이런 헨리 나우웬은 참으로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합니다. 그러나 마음의 한편에서 지울 수는 없습니다. 지금 당장 이 분처럼 할 수 없더라도 우리들이 가야 할 방향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성경에서 길을 묻는다면 말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의 길을 따르기를 원한다면 말입니다. 이것은 ‘불편한 진실’이 아니라, ‘불편하게 하는 진리’입니다.  

순종은 본성을 거슬립니다.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축복 앞에서 도리어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소원까지도 넘어서는 것입니다.

  
I. 소원  

새로운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부 시몬이 제자 베드로로 바뀐 일과 같은 선에서 인생의 더 깊은 곳을 향하는 것입니다.

12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12a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예수님께서 한 동네에 계셨습니다. 그곳에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 병에 걸린 사람은 다른 사람과 떨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이 자신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부정하다’고 소리쳐야 했습니다(레 13:45).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에, 다른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이 사람도 동네 밖에 있다가.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용기 내어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는 엎드려 예수님께 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구하다[ devomai/데오마이]’는 말은 스스로 졸라매듯이 간청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깨끗하게 되고 싶은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1. 자신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필요와 절실한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옵니다.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계신 예수님도 소원이 있었습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 14:36a)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자기밖에는 사랑할 줄 모르는 인간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 19:19b)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자기중심적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어쩔 수 없는 모습입니다.

여러분의 간절한 소원을 하나님께서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한 걸음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12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12b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이 병자는 “주님이 하고자 원하시면”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고 안 하고는 주님이 선택하실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는 깨끗하게 고침 받아야 한다는 자신의 소원을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예수님께 왔으면서도 그 결정은 예수님께 맡겨드렸습니다. 주님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였습니다.


2. 주님의 소원을 물었습니다.

자신의 소원을 간직한 채 주님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전혀 새로운 삶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소원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무런 소원도 없이 막연히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라고 하신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이 자신에게서 옮겨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소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의 권리입니다. 그런데 그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는 것이 순종입니다.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라는 것의 뿌리는 죄입니다. 마음의 소원은 우리에게 있어도 결정은 주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다만 그 은혜를 구하여야 합니다.

주님의 긍휼을 구하는 이들에게 베푸시는 은혜는 무엇입니까?

13절 말씀입니다.
:1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손을 내미셨습니다. 절대로 손을 대어서는 안 되는 사람에게 손을 대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깨끗하게 고침 받기를 바라는 너의 소원은 나의 소원이기도 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 주님의 소원대로 되었습니다.

우리의 소원과 주님의 소원이 일치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주님의 소원을 깨닫고 그것을 구하여 능력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면 우리의 필요가 자동적으로 채워질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먼저 주님의 소원을 겉으로 구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다면 그 결과가 어떤 것이든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 뜻과 달라도, 때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도 주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뿐입니다.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소원이 주님의 소원대로 이루어지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게속 이어지는 말씀은 또 다시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이 나은 그 사람에게 전혀 예상 밖의 일을 주문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II. 침묵 

예수님은 고침 받은 사람에게 두 가지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14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14a예수께서 그를 경고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예수님께서 병이 나은 그 사람에게 하신 첫 번째 명령은 경고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경고하다[paraggevllw/파랑겔로]’는 말은 ‘명령을 내리다’는 뜻입니다. 그 명령의 내용은 그에게 이루어진 일을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1.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침묵을 명령하셨습니다. 그가 고침 받은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비밀에 붙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런 명령을 내리셨을까요?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자신을 그리스도라고 알까봐서 말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눅 4:41) 그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단지 기적을 일으키는 분으로 오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단지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이나 쫓아내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예수님은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하지만 전 인격을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하지만 사탄을 멸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빵을 나누어주셨습니다. 하지만 온 인류를 위하여 친히 생명의 떡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더 깊은 것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또 다른 명령도 하셨습니다.

14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14b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니

예수님은 병이 나은 사람에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된 것에 대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서 사람들에게 증거로 삼아라.”고 하셨습니다.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예물을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나병환자가 자기의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예물을 드리는 것은 사회로의 복귀를 위한 절차였습니다. 병을 고쳐주시고 사회로 온전히 복귀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2. 보이고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신 일이 아직 드러나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사람이 정말로 조용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침묵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소원 때문에 건강하여진 그 사람이 그의 가정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공동체에서 소외되었던 그 사람이 다시 공동체로 돌아가는 것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질병 때문에 공동체에서 쫓겨난 사람은 공동체로 돌아가야 완전히 회복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기쁨을 빼앗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절차를 밟아 소외되었던 자기 공동체로 떳떳하고 당당하게 귀환되기를 바라셨습니다. 이것은 관계의 회복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몸과 마음뿐만 아니라 가정과 사회도 건강하여 지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관계가 회복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로 예수님이 원하지 않으신 일이 일어났습니다.

15절 말씀입니다.
: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결국 소문이 더욱 퍼졌습니다. 여기에서 ‘퍼지다[dievrcomai/디엘코마이]’는 말은 ‘뚫고 나가다’, ‘통과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소문이 쫙 퍼져버렸습니다. 바람이 부는 것처럼 소문이 사람들의 입과 귀를 통과하여 널리 퍼졌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왔습니다. ‘모여오다[sunevrcomai/쉬넬코마이]’는 말은 ‘함께 오다’는 말입니다. 한 사람씩 모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데리고 함께 모여들었습니다. 

3. 소문에 무리들이 모였습니다.

예수님은 소문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고침 받은 사람이 공동체로 돌아가는 것을 차마 막지 않으셨습니다. 결과적으로 소문은 퍼졌고 사람들을 더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앞서, 예수님은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무리들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로 삼을 한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시몬을 부르셔서 사람들을 구하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세상에서 불러내십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세상으로 다시 보내십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제자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를 세우신 것은 무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나와서 예수님을 만난 후 다시 세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새로운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새로운 사람일까요? 자신의 소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기꺼이 주님의 소원대로 되기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기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기대를 묵살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짊어지셔야 할 짐이 있으셨습니다.
  

III. 칩거  

예수님은 요즘 아이들 말로 ‘잠수’하셨습니다. 좀 고상한 말로 ‘칩거’하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소원까지도 포기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훌륭한 사역까지도 내려놓으시는 것입니다.

16절 말씀입니다.
: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물러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왔으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지도, 병을 고치지도 않으시고 물러가셨습니다. 나병환자는 사람들에게서 억지로 떨어져야 했는데, 예수님은 스스로 무리에게서 물러나셨습니다.

1. 무리에게서 물러나셨습니다.

참으로 사람의 머리로 헤아리기 어려운 순간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이러실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쇠는 달았을 때 치라고, 기회는 올 때 잡으라고 하였는데 지금이 바로 잡아야 할 기회가 아닙니까! 억지로라도 사람들을 모아야 할 판인데 사람들이 자진해서 모여드는데 물러나시다니 말이나 되는 일입니다. 그야말로 손도 안대도 코를 풀 수 있는 순간인데 왜 물러나십니까?

어릴 때 저희 동네에 정말로 손을 안 대고 코를 푸는 아저씨가 있었습니다. 손도 안 대고 흥하며 코를 푸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손 안 대고 코를 풀어보셨습니까? 
저는? 해 받습니다! 잘 됐을까요? 안 됐습니다! 
결과는? 아주 더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방법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손을 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말하지 말라고 말렸는데 소문이 나서 몰려들었으니 예수님의 책임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물러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남의 손으로 쉽게 코를 푸는 일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쉬운 길을 포기하셨습니다.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결정적인 순간에 오히려 물러나신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목적이 사람의 인기를 끌기 위한 것이라면 이미 일찍이 일을 끝내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역 너머에 계셨습니다. 

내려놓음,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도전하여할 또 하나의 깊은 곳입니다.  

예수님은 어디로 물러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물러나신 곳은 ‘한적한 곳’이었습니다. ‘한적한 곳[e[rhmo"/에레모스]’은 혼자뿐인 외롭고 쓸쓸한 곳입니다.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입니다. 그런데 ‘한적한 곳’은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던 곳인 ‘광야’라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더욱이 ‘물러가다[uJpocwrevw/휘포코레오]’는 말은 ‘되돌아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몰려드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마귀에게 시험당하시던 그곳으로 되돌아가셨습니다. 반드시 같은 장소가 아니더라도 그와 같은 곳으로 가셨습니다. 사람에게 인기를 끄느니 차라리 다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는 것이 더 나으실 수 있겠다고 생각하신 것은 아닐까요? 

2. 스스로 홀로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신 이유는 한 장소에 오래 머물게 됨으로 오는 폐단을 없애고자 함이셨습니다. 한 장소에 오래 머물게 되면 그 지역 사람들의 우상이 될 수도 있으셨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그곳에 안주하려 든다든지 아니면 그곳에 매일 우려가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전혀 다른 차원을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앉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배불리 먹은 뒤에, 남은 부스러기를 다 모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 표징을 보고 “이분은 참으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그 예언자이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요한복음의 말씀은 이렇습니다(요 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