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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받은 사람들 (엡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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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부름받은 사람들 (엡 2:1-2)
   
지난주에 보성에서 신학 교육도 받지 않은 사이비 목사 부부가 감기에 걸린 세 자녀를 귀신을 쫓아낸다고 열흘 가까이 금식을 시켰습니다. 부부가 자신들은 하루씩 걸러 가며 음식을 먹으면서 아이들은 금식을 시켰습니다. 그것은 금식이 아니라 굶긴 것입니다. 아이들을 식탁에 엎드리게 하고 손과 발을 묶어 놓고 귀신을 쫓아낸다고 폭력을 가했습니다. 아이들은 굶주림과 폭력에 지쳐 죽고 말았습니다. 

그 사이비 목사 부부 뒤에는 같은 신앙의 형태를 가진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성경 잠언 23장 13절의 말씀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과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복음을 증거 하다 고난을 당할 때 사십에서 하나를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다는 말씀을 근거로 아이들을 하루에 서른아홉 대를 채찍으로 때렸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이런 식으로 인용하고 적용하니 참으로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왜 이런 왜곡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일까요? 신앙은 맹종하는 것이고 주관적이기만 한 것일까요? 무지한 사람인 것일까요? 신앙인은 사회에 적응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임일까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과 동떨어진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일까요?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정상적인 모습으로, 참 인간의 정신을 가지고 본이 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주관적인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객관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 받고 도리어 감동을 주는 삶이 되는 것이 기독교의 궁극적인 신앙입니다. 기독교인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거룩하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의 서신들이 대체적으로 다 그렇습니다만 에베소서는 성숙한 교회와 성숙한 성도의 모습을 더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 3장까지의 내용은 우리가 믿는 것에 대하 내용을 말합니다. 즉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되는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장에서 6장까지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신앙의 성품과 부부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 이웃 간에, 직장에서 윗사람과 아래 사람 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알아들을 수 없는 해괴한 말을 하고, 가정과 일상생활을 뒤로하고 어느 특정한 장소에 가서 광신적인 모습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정상적으로 세상 사람들보다 더 성숙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가정과 직장과 이웃을 세워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존경을 받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해서 그렇지....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선교 활동을 하는 가운데 가장 애착을 많이 가졌던 교회입니다. 에베소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나이가 60이 넘어 죽을 날이 임박해 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을 때 쓴 것입니다. 그러기에 에베소서의 내용은 바울이 자신의 삶으로 경험하고 고백한 가장 농익고 성숙한 믿음의 세계를 표현한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를 쓰면서 자신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바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라도 말합니다. ‘사도’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포스톨로스’라는 말입니다. 이는 ‘파견하다, 보낸다’ 라는 의미입니다. 어떤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파송 받은 사람을 아포스톨로스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소명의식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는 것에 대한 확신입니다. 

이것은 소명을 받은 당사자의 확신이 가장 중요합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의 종으로, 주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어떤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관적인 확신과 함께 또 확인해야 하는 것이 객관적인 확신입니다. 그것은 교회를 통해서 확인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도직은 매우 주관적인 영역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역하는 과정을 통해 초대 교회의 모든 교회가 그의 사도직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사도직의 권위에 순종했습니다. 그의 사도직은 그의 사역을 통해 개관적으로 인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교를 가는 것은 매우 주관적인 선택입니다. 그런데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음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는 확신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관적인 고백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객관적인 확신입니다. 주관적인 고백을 가지고 신학교에 가서 신학 공부를 합니다. 대학과 대학원의 과정을 거칩니다.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에 2년간 목사 고시를 준비하고 목사고시를 봅니다. 목사고시에 합격한 후에 목사 안수를 받는데 다시 한 번 면접을 보며 목회자로서의 소명감과 사명감을 점검합니다. 그리고 목사 안수를 받습니다. 

정상적으로 목사가 되려면 7년의 학문하는 과정과 2년의 수련하는 과정, 목사 고시를 합격하고 교회로부터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때 안수를 받게 됩니다. 이 과정은 한 사람이 목회자로 세워지는 객관적인 검증의 과정입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바로 이 과정이 무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는지도 모릅니다. 몇 사람이 모여서 목사 안수를 줍니다. 교단의 세를 불리기 위해서 검증도 없이 자신들이 원하는 요건만 대충 갖추면 안수를 줍니다. 그러다 보니 목회자의 질이 떨어져 사회의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목회자들로 인해 덕이 되지 않는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지도자의 타락은 어김없이 교회의 타락으로 이어집니다. ‘신학교에 목회자가 되겠다고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하면 그 사회와 교회는 타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목회자의 길이 어려운 길인데 그 길이 인기가 있어 사람들이 목회자가 되겠다고 몰려들면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 대해 말할 때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향해 무엇이라고 칭하고 있습니까? ‘성도들’ ‘신실한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 당시에 에베소라는 도시의 특성을 알면 여기에서 ‘성도들’ ‘신실한 자들’이라는 말이 얼마나 귀한 단어인지를 알게 됩니다. 

에베소라는 도시는 신앙생활을 하기에 좋은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소아시아 최대의 도시였고 동서양을 잇는 무역 항구도시였습니다. 경제적으로 풍요한 도시였습니다. 물질의 풍요와 음란과 향락의 문화로 뒤덮인 도시였습니다. 

종교적으로 많은 우상이 섬겨졌습니다. 특히 아데미 신전은 당시 세계7대 불가사의의 하나일 정도로 대 신전이었습니다. 바울이 2년 동안 사역을 하자 에베소가 주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마술사들이 회개하고 그 서적들을 불살랐는데 은 오만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화폐 가치로 환산을 하면 약 40억 어치나 된다고 합니다. 그만큼 미신과 우상이 판을 치던 곳이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들도 모두가 에베소 도시에서 그 문화를 누리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그 음란과 쾌락의 문화로부터 구분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에베소라는 유난히 세속적인 도시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서 구별되어 믿음을 지키며 그 믿음을 삶으로 보이며 본 된 삶을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믿음의 삶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믿음의 본을 보이는 신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중심으로 소아시아 교회가 세워지고 돌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신실한 삶을 살지 못하면 우리의 이웃들과 사회가 하나님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활 속에서 무시하고 세상의 유행이나 풍조를 따라 살면 사람들은 우리를 보면서 하나님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유리’ 창업자인 고 최태섭 장로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오산 학교에서 조만식 선생님과 이승훈 선생님 같은 분들을 통해 기독교 정신과 나라 사랑에 대해 배웠습니다. 최태섭 장로님을 그때 배운 기독교 정신을 가지고 한 평생을 살아온 분입니다. 그는 왜 돈을 벌고, 왜 공부하느냐는 질문에 예수님을 통해 배운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만일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큰 돈과 많은 배움은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분과 관련해서 아주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6.25 전쟁 당시에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아군이 1.4 후퇴를 할 때 모두 피난을 떠났습니다. 그도 피난을 가야 되는데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이 있어서 얼른 갚고 떠날 생각이었습니다. 급히 은행에 가서 직원에게 대출금을 갚겠다고 했더니 대출 장부도 없고 피난가야 되니까 돈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막무가내로 받으라고 하니까 하는 수 없이 영수증을 떼어주고 받았습니다. 그 후 제주도로 피난 가서 사업을 했는데 군부대에 식료품을 납품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단장이 그의 정직성을 보고 생선 납품을 요청합니다. 주문 물량이 자꾸 늘어서 부득이 큰 배를 구입해야 되는데 돈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산에 있는 은행으로 가서 대출을 요청합니다. 담보도 없고 전쟁 통이라 돈을 못 빌려준다는 답변이었습니다. 포기하고 나오려다가 혹시 하는 마음에 1.4 후퇴 당시 대출금 갚은 것이 잘 정리됐는지 확인해 보려고 영수증을 제시했더니 은행원이 깜짝 놀랍니다. 반가워하면서 ‘바로 그 분이군요! 선생님은 은행가에서 전설 같은 인물이 되었어요. 은행장님을 만나게 해 드릴게요!’ 은행장이 반갑게 맞이하면서 무담보로 2억이라는 거액을 대출해 줍니다. 그 돈을 갖고 사업에 크게 성공을 거둡니다. 이렇게 해서 ‘한국유리’ 창업의 기초가 마련되었다고 합니다. 

최 장로님은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분입니다. 그는 항상 자신을 ‘사랑에 빚 진자’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삶이 믿는 사람들에게는 물론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도 성도로, 신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 분의 신실한 믿음의 삶을 보고 믿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믿음의 세계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이 함께 하나가 되는 성숙한 믿음의 본이 되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우리 사회가 믿음을 가진 우리들에게 원하는 것은 대형 교회, 큰 믿음을 가진 지도자, 화려한 스펙을 가진 목회자, 신령한 믿음의 세계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신실한 삶으로 보여주는 성도입니다. ‘저 사람이라면 정말 믿을만해’라고 인정되는 믿음의 사람들이 많을 때 세상은 바로 그런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보고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교회들을 통해, 성도들을 통해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교회와 성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행복한 교회와 행복한 교회 성도들이 이 지역에서, 우리들이 더불어 살고 있은 이웃들 속에서 신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는 삶이 되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걸림돌이 되는 모습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쓰임 받는 목회자, 성도, 교회와 우리의 가정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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