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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 있는 사람 (6) (마 5: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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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 (6) (마 5:9-12)
  

어느 보험회사에서 승진인사가 있었습니다. 사장은 유능한 부장을 임원으로 승진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보험회사에는 승진 규칙이 하나 있었는데 승진자는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부장은 보험세일즈맨 으로는 최고였지만 세례를 받지 않은 비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때 전무가 사장에게 목사님께 부탁하여 그를 설득시켜 믿고 세례 받게 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목사님이 그 부장과 5시간이나 면담을 하게 됐습니다. 한참 만에 목사님이 땀을 뻘뻘 흘리며 나왔습니다. 

사장이 “목사님, 부장이 예수 믿는다고 합니까?”하고 묻자 목사님이 대답하시길 “말도 마세요, 개종은커녕 제가 1억 원짜리 생명보험에 들었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프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 프로의식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예수의 제자입니다. 이런 의식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허탄한데 뜻을 두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적 실력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에게 이런 프로의식이 없으니까 매사가 어설프고 그 삶에 감동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진정한 제자가 되게 하시려고 이 산상수훈의 말씀과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을 주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여덟 가지의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모두가 파격적 입니다. 세상 기준과 너무 다른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은 너무 보이는 것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만 최고인 줄로 알고 거기에 집착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복 여덟 가지를 추천하십니다. 누가 복 있는 사람인가. 바로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죄와 나의 무능에 대해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온유한 자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긍휼히 여기는 자가, 그리고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은 나머지 두 가지를 더 추천합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 

일곱 번째 복 있는 사람은 “화평케 하는 사람”입니다. “화평케 하는 사람”(호이 에이레노포이오이, hoi eirenopoioi)은 “평화를 도모하는 자”란 뜻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이 화평을 실현하기 위해서 힘쓰고 수고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이 임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읽은 시편 133편 1-3절에는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형제가 연합한다는 것은 12지파가 하나 됨을 의미하는 말씀일 것입니다. 이 화평이 마치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을 타고 내려와서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과 같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기름과 이슬”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들입니다. 즉 화합하고 화평한 것이 가장 소중한 것임을 강조하여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갈등의 시대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갈등은 하나님과의 갈등입니다. 이 시대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가장 가슴 아파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은 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까지 보내 제물로 보내셨는데, 이 관계가 정상화 되어서 누구도 멸망치 않길 바라셨는데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도 없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갈등은 내안의 갈등과 불화입니다. 내 안에는 많은 욕망, 욕구, 탐욕이, 시기, 질투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들이 내 자아와 싸우게 하고 갈등하게 만들고 실망하게 하고 삶을 포기하게도 만듭니다. 그리고 이웃 간의 갈등도 있습니다. 내 집의 자녀간, 부부간, 부모간, 형제간의 갈등도 심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교회의 갈등도 심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 사회의 갈등도 심각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구심점이 없습니다. 국론과 의견이 갈가리 찢겨져 저마다 주장만 하고 서로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품격을 상실하고 서로가 막말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이 같은 갈등 속에서 사람들은 삶의 의미와 기쁨과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키에르 케고르는 “인간은 불화한 존재이고 불안해하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인간은 피곤하고 지치고 목마른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쉼은 모든 속박, 번뇌로부터 벗어난 참 자유와 평화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쉼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어디에도 이런 평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평화가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평화를 맛보려면 평화의 하나님께로 나아가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이 평화는 평화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영이 내게 임재하실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 27절에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평화가 진정한 평화입니다. 

찬송가 469장에도 그 평화를 노래하였습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그 영혼의 소리가 흘러 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싼다는 말은 내 병든 영혼과 심령, 마음을 고치신다는 말일 것입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던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찬송가438장) 다 내려놓고 보니 슬픔 많던 이 세상도 천국이더라는 고백의 찬송입니다. 

이는 예수와의 관계가 정상화 되고 나니까 주어지는 복입니다. 이 평화는 내가 예수께 가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거부했습니다. 오히려 교리와 율법, 분파주의와 배타주의에 열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복음 19장 42절에서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에게도 이 평화의 길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모두 하나님께 가려고 하지 않고 감각적인 일에만 몰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사람들은 모두 명품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한국인들처럼 명품에 욕심내는 민족도 없습니다. 그래서 외국 업체는 유독 한국에서만 상품을 비싸게 팝니다. 그래야 더 잘 팔리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 창피한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어른만 그런 것이 아니고 아이들까지 학교에 명품가방과 명품운동화, 명품잠바를 입고 다니려 난리를 칩니다. 이는 모두 내적인 것보다 외적인 것에 집착하는 모습입니다. 외적인 것에서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들이 참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평화를 얻는 길을 제시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화평 대신 검을 주러 왔다는 말은 역설입니다. 주제와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평화로 가는 전 단계로서 검을 말씀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참 평화를 얻으려면 먼저 평화의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영접하는 신앙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불교인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평생 유교에서 살다가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과정에서 심각한 자기와의 싸움, 영적싸움을 해야만 합니다. 이는 우리나라의 역사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처음 들어올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습니까? 너무도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복음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싸움, 즉 검으로 자기를 찢고 찌르는 아픔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그런 과정을 거쳐서 여기까지 오신 것입니다. 그렇게 심각하게 영적인 싸움을 거치고 나서 비로소 예수를 영접하고 은혜를 체험하여 얻은 것이 바로 여기서 말씀하는 화평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화평을 가져오는 사람을 화해자(reconciler)라고 하며 화평하게 하는 자를 피스 메이커(peace maker)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누가 복이 있는 사람인가 하면 바로 이 화평을 가져오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불화를 일삼는 사람도 있고 사람들의 마음을 언짢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조화를 깨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 프란시스의 평화의 기도를 생각하게 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 있는 곳에 믿음을, 오류 있는 곳에 진리를, 어둠 있는 곳에 빛을, 슬픔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가 되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 이해하고, 사랑 받기보다 사랑하게 하소서.”

이 세상에서 이 평화가 제일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먼저 평화를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네 안에 평화를 조성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평화를 이루는 사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마음의 갈등이나 불화는 나의 삶과 생명을 좀 먹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듭니다. 삶의 맛을 잃게 하고 잠을 빼앗고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가는 곳 마다 절대로 화평을 깨뜨려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화평을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사람 

팔복에서 마지막으로 제시한 복 있는 사람은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10절)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의는 하나님의 의이고 진리이며 질서이고 사회정의 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의가 사라진 것을 통탄해 했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오직 공의가 하수같이 흐르게 하라”(암 5:24)고 외쳤습니다. 또한 엘리야,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말라기 선지자 같은 분들도 모두 사회정의를 외쳤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은 한결같이 핍박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당시 세례요한도 사회정의를 줄기차게 외치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행동하는 영성가들 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핍박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의를 심기 위해 열심히 행동하니까 핍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참된 복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스스로 가난해지고 약해지고 낮아지고 고생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이 저절로 복을 내려주신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물질적인 복을 갈망하기보다 영적인 복을 갈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고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며 사명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만사형통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만사불통이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불통의 길을 기꺼이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라면 참된 복을 누리려는 사람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난에 빠질 위험이 큽니다. 오히려 세상에 행복하다고 말하는 조건을 다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삶을 사는 자가 복이 있는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물질적인 복을 너무 찾으면 실망하게 됩니다. 주어져도 만족이 없고 주어지지 않으면 더 실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물질적인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에 만족하라”(마 6:33)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자족하라는, 더 누리려고 애쓰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위해서 분투하라는 것입니다. 진정 예수의 제자가 되면 복의 개념이 이렇게 변화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복을 이해하고 누리고 기뻐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사도바울을 보고 초라하고 가난한다고 흉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시대에 화려하게 웅변하고 돌아다닌 아볼로는 박수와 환호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그의 모습에 비하면 무명하고 초라한 전도자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6장 8-10절에서 사도바울이 고백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있고, 징계 받은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다 가진 자로다.” 성경이 말하는 복은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루는 삶입니다. 

그 소명을 이루어감으로 자신의 존재의 영원성을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로 얻는 기쁨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때는 어떤 고생도 유혹도 이 기쁨을 아는 사람을 흔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살았고 바울과 스데반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를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또한 물질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자족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살면 하나님이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하실 것이라는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형통하고 물질이 많이 주어질 때 더 긴장합니다. 그래서 더 단순한 삶을 살게 되고 빚진 자의 삶을 살게 되고 더 검소함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이 제자의 삶이고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을 나눴습니다. 결론으로 말하자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제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제자는 아마추어가 아니고 프로들입니다. 어설프게 남의 흉내나 내는 그런 감동 없는 삶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프로가 되려면 때론 손해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의식을 발휘하고 손해도 자초해야 합니다. 어느 책을 보니까 감동적인 설렁탕집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 이야기를 읽고 이것이 진정한 프로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어느 설렁탕집에 손님들이 북적댔습니다. 그 집은 좋은 재료만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그 집에 와서 안심하고 먹었습니다. 그렇게 신용을 주는 것이 그 집의 영업방침이었습니다. 어느 날 뼈를 솥에 넣고 하루 종일 고았는데 검은 국물이 나왔습니다. 고기집에 항의를 하니까 다른 집으로 갈 재료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곳에 프림을 넣으면 검은색이 없어진다는 방법까지 말해주었습니다. 그날 설렁탕집은 문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재료가 나빠서 장사 안합니다.”라고 안내문을 붙였습니다. 

이런 상술을 “버즈 마케팅”(buzz marketing)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상술로 그렇게 하는 집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설렁탕집은 상술이 아니었습니다. 밤새워 끓인 국물도 다 버렸고 하루 수입도 포기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입소문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서 그 집은 더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프로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손해 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손님들이 더 찾아오고 더 만족해했습니다. 오늘 우리 예수의 제자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프로정신을 발휘해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은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더 중요한 말씀이 산상수훈이고 산상수훈 중에서도 더 소중한 말씀이 바로 팔복입니다. 이 팔복의 말씀을 예수께서 직접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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