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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일을 품고 일어나십시오! (느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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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품고 일어나십시오! (느 2:1-6)


오늘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바쁘고 고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고되게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특별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뜻이 나의 부족한 삶을 통하여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은 때때로 사람들의 반응에는 무관심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면 누가 나를 대적하리요.

결국 믿음의 제일 되고 가장 근본적인 원리는 모든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마음먹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시대적인 복 주심이 나를 통하여 세상으로 흘러 넘칠 수 있도록 하나님의 통로로서의 귀한 삶이 될 수 있는 길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삶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인정만을 구하며 살아가는 삶이라고 할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전폭적인 지지만을 붙들고 간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십시오.  우리가 낙심되는 인생의 밤을 맞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칠 때 우리의 인생을 일으켜 줄 수 있는 위대한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고백하기를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 모든 일에서 넉넉히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때문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일마다 때마다 넉넉히 이길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연약한 마음을 점령하고 내 영혼을 뜨겁게 할 때 나는 어떠한 역경도 흑암도 독수리처럼 다 박차고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의 집에 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에 욕심을 내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전폭적으로 지지를 받아내는 데 생명을 거십시오.  그 분이 나를 사랑하시고, 그 분이 나를 지지하신다면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내가 확신하노니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오늘 이 땅에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고난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절하지 말고 이 땅 위에 끝없는 하늘의 기쁨과 능력과 평화를 선포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큰 능력을 힘입고 오직 한 믿음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과 지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과 지지를 받는 그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고목 같은 인생이고, 다 녹슬어서 길가에 던져진 고철 같은 인생이라고 할지라도 여호와의 신에 감동만 받으면 살아 나는 길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신에 감동만 받으면 세상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인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냥 물결치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딸려 가면 안됩니다.  믿음의 사람은 여호와의 신에 감동을 받아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인생을 창조적으로 만들어가야 됩니다.

보십시오.  환경과 상황을 극복하는 때가 있습니다.  반대로 환경과 상황에 정복될 때가 있습니다.  사람도 환경과 상황을 끝없이 극복해 나간 사람이 있고, 환경과 상황에 끌러 앉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한 생애도 여호와의 신에 감동을 받으면 삶의 환경과 상황을 끝없이 극복해 나갑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신에 감동만 받으면 살 길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신에 감동만 받으면 무너진 삶의 터전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가 있습니다.  결국 여호와의 신에 감동을 받은 그 한 사람이 역사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도 이것 하나만은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의 특징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이 예배의 특징은 마지막 예배당을 나설 때 우리 속에 불같은 의욕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배를 마치고 이 예배당을 나설 때에 여러분의 심령에 무엇을 해 보고 싶은 그런 강한 의욕이 일어나야 됩니다.  아무리 재능이 있고, 아무리 지식이 있고, 아무리 젊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의 내면에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하는 의욕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의욕을 잃어버리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인간의 성공이 무슨 지식이나, 돈이나, 환경이나, 그런 것들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재능이라는 것은 차이가 없습니다.  정말 차이가 나는 것은 의욕입니다.  내 스스로 의욕이 있을 때는 무엇인가를 하지만 의욕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이것은 우리 개인을 돌아보아도 그렇지 않습니까?  왜 나이가 점점 들면서 어려워합니까?  의욕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는 것마다 의욕이 없어집니다.  심지어 밥을 먹는 것마저도 의욕을 잃어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큰일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신으로 감동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뭔가 일을 행하고자 하는 삶의 열정을 회복하십시오.  삶의 의욕을 회복하는 것, 삶의 내면 깊은 곳에서 열정을 다시 회복하는 것은 나를 위해서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태도는 나아가서 가정과 공동체를 세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역사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공 느헤미야는 조국과 고향을 떠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젊은이였습니다.  그런 그가 수많은 고난의 세월을 보내고 아닥사스다 왕 앞에서 술 맡은 관원이 되었습니다.  당시에 왕 앞에서 술을 맡은 관원이 되었다는 것은 엄청난 권력자였습니다.  독살이 흔했던 고대 왕국에서 술 맡은 관원은 왕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에게만 맡겼습니다.  그러니까 느헤미야는 왕으로부터의 신뢰와 권력을 누리는 그야말로 출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고국 유다로부터 하나니라고 하는 느헤미야의 동생이 찾아왔습니다.  느헤미야는 그에게 고향 예루살렘의 소식을 묻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고향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벽은 허물어지고 폐허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여기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는 폐허가 된 예루살렘과 능욕을 당한 형제들의 이야기를 듣고 앉아서 수일동안 슬퍼하면서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느헤미야의 이 모습이 바로 여호와의 신에 감동된 사람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실 그는 머나먼 이역 땅에 포로로 끌려왔지만 지금 그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어쩌면 솔직히 그가 예루살렘의 현실을 외면한다고 해서 그를 욕하거나 비난할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토의 예루살렘에 사는 유다 사람들조차도 무너진 예루살렘 성을 재건할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는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고난과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이 자리에까지 올라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조용히 수산궁에서 왕의 산해진미를 먹으면서 편안한 생활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편안하다고 해서 평안한 것은 아닙니다.  그의 육신이 편안하다고 해서 그의 마음이 평안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성벽 재건에 나섬으로써 당해야만 했던 수많은 어려움과 고난도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조국과 조국의 백성들에게 안정되고 가치 있는 내일을 선물로 주고 싶어했습니다.  희망 없이 자포자기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내 나라와 형제들에게 내일의 희망을 안겨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편안한 삶의 자리를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가끔 신앙이 좋은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정말 좋은 신앙을 가졌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이 좋은 신앙의 사람입니까?  기억하십시오.  좋은 신앙은 나라와 민족과 교회를 생각하는 공동체적인 신앙입니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을 생각하는 신앙은 아무리 그가 열심히 기도하고, 매 주일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그 신앙은 기복주의적인 어린아이의 병든 신앙일 뿐입니다.  혼자만 잘 사는 것은 가장 못사는 것입니다.  남을 생각하며 살아야 나도 행복해집니다.  나 혼자 잘 살면 육신은 편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결코 평안하지 않을 것입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편안한 것이 결코 평안한 것은 아닙니다.

느헤미야는 폐허가 된 땅에서 살아가는 고향의 형제들에게 내일이라는 희망을 선물로 주고 싶었습니다.  저들에게 꿈과 비전을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일을 위해서 먼저 기도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기도를 시작했다고 해서 당장 그의 조국에 어떤 변화가 나타났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계속 기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내일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내일, 조국의 내일, 형제들의 내일이 있었습니다.  그 내일을 품기 위해서 그는 쉬지 않고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가 기도하면서 어떤 일을 했을까요?  우리는 이 질문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중요한 대답이 있습니다.  우리의 앞이 아무리 어둡고 캄캄해도 내일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포기할 수 없는 내일을 위해서 엎드려 기도하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는, 기도하면서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한다는 것은 희망을 품고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희망을 버린다면 더 이상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느헤미야가 조국을 위해 기도를 시작하고, 그래서 마침내 조국에 돌아가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프로젝트에 착수하기까지는 얼마의 시간이 걸렸는지 아십니까?

오늘 본문은 2장 1절은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에"  여기에서 니산월은 4월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때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구체적인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1장 1절에 보면 그가 예루살렘 성을 마음에 두고 그 성을 재건해야 하겠다고 기도하기 시작한 것은 "아닥사스다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이라고 했습니다.  기슬르월은 11월에서 12월까지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4개월 이상의 시간이 걸린 것입니다.

그 동안 느헤미야는 무엇을 했습니까?  기도를 했습니다.  충분히 기도했습니다.  그는 충분히 기도하며 충분히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충분히 기도하고 기다리는 동안 느헤미야의 내면 속에서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이 세워지고, 조국의 아름다운 내일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만약에 느헤미야가 한국 사람이었다면 넉 달을 기다릴 수가 있었을까?

오늘 한국 사람들은 지상에서 가장 조급한 민족의 대명사로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언제인가부터 우리 한국 사람들은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에서도 계속 움직이고 뛰어야 하는 유일한 민족입니다.  자동문이 있어서 스스로 닫힘에도 불구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결코 스스로 닫히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단추를 눌러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들입니다.  저도 그런 인간들 중에 한 사람입니다.

외국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한국 사람에게서 제일 먼저 배워야 하는 단어가 "빨리 빨리"라는 말입니다.  이런 습관은 우리의 기도생활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해도 기다리지를 못하고 당장에 응답을 기대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참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고민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참지를 못하는 성격을 고쳐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이렇게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인내를 주시옵소서.  당장 주시옵소서."

오늘날 우리들은 소위 인스턴트 문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지 우리는 기도조차도 인스턴트식의 도구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기도를 단순히 응답을 받는 수단으로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기도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도의 본질이란, 시간과 함께 인격의 열매를 맺는 교제의 사건이라고 정의를 할 수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절 이하에 보면, 어느 날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항상 기도하지만 낙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낙심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기도하다가 당장에 응답이 오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낙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억울한 일을 당했던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가서 자기의 억울한 한을 풀어달라고 탄원을 합니다.  그러나 이 불의한 재판관은 그녀의 탄원을 들어주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고, 그녀에게서 기대할 것도 없었기 때문에 거절합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계속적으로 와서 간청을 합니다.  마침내 불의한 재판관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내가 이 여인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가 밤낮으로 귀찮게 해서 내가 도무지 제 명대로 못 살겠다."

그래서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할 수 없이 그녀의 요구를 들어준 이야기를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런 사건들을 성경적으로 접근해서 공부를 할 때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고 생각하시면 큰일납니다.  그것은 성경을 잘못 읽으신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이렇게 청을 들어주었는데 하물며 의로우신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덧붙이고 계십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 "그러나 아직도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는 사람을 볼 수가 있겠느냐?" 이 말씀입니다.  그 믿음만 있다면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의 믿음입니까?  당장에 기도의 응답이 없어도 기도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주님은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다.  나는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믿는다.  선하신 하나님, 사랑이신 하나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은 마침내 내 기도를 들으실 것이다."  이 사실을 믿고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기도하고 있는 사람을 볼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당장의 기도의 응답보다도 저와 여러분에게 기다림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하시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마도 그 중요한 이유는 저와 여러분이 기도를 단순히 응답을 따먹는 자동응답기가 아니라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라는 사실을 더 가르치고 싶어하셨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런 비유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재벌이 있는데 재벌가의 아들에게 있어서 가장 커다란 관심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아버지의 재산을 하루라도 빨리 상속을 받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관심은 다릅니다.  그 재벌이 지혜로운 아버지라면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관심은 재산을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재산을 물려주었을 때 그 재산을 제대로 지혜롭고 건강하게 사용하고 지킬 수 있는 인격적인 훈련이 되어 있는가에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당장의 재산을 물려주기보다는 기다리게 합니다.  그렇다면 이 기다림의 시간이야말로 아들에게 있어서 내일을 가슴에 품고, 내일을 준비하는 시간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내일을 복된 내일로, 영광된 내일로 만들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이 아무리 어렵고 답답하더라도 그 내일을 가슴에 품고 오늘이라는 이 시간에 기도하면서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기도하며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결코 조급해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은 비록 더디게 느껴질지라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이루어질 때를 믿고 기다리셔야 합니다.

두 번째로, 내일을 가슴에 품고 그 날을 보기 위해서는 기도하며 계획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느헤미야가 기도하며 기다리면서 또 한 가지 한 일이 있었다면 그것은 내일을 계획하는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느냐구요?

느헤미야가 그가 모시고 있던 왕으로부터 어느 날 자기가 기다리던 결정적인 질문을 받습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바로 그때 느헤미야는 그 동안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제목을 내어놓습니다.
"내 고향 내 조국 이스라엘 땅 예루살렘은 황폐화되었고, 내 형제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안타까운 처지에 처해 있습니다.  저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그 성을 중건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이때 왕은 다시 묻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느냐?"
그런데 본문 6절의 마지막 부분에 보면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6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에 왕후도 왕 곁에 앉아 있었더라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몇 날에 다녀올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하고 왕이 나를 보내기를 좋게 여기시기로 내가 기한을 정하고."
여기에 보면, 느헤미야가 "기한을 정했다"고 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왕이 느헤미야에게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느헤미야가 머리를 긁으면서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가 보아야 하고, 일을 해 봐야 알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느헤미야가 이렇게 대답을 했더라면 왕이 어떻게 반응을 했을 것 같습니까?

느헤미야는 정확하게 기한을 정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 재건 프로젝트가 소요될 시간을 산출해 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7절 이하에는 그가 왕에게 이 프로젝트의 완수를 위해서 구체적으로 도와줄 내용을 열거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리스트를 보면 우리는 이 기간 동안에 느헤미야가 기도하고 기다리면서 얼마나 치밀하게 계획을 준비했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우선 왕이 주변 총독들에게 조서를 내림으로 자기가 예루살렘까지 도착하는 동안에 길에 어려움이 없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8절에는 왕의 삼림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려 성과 가옥 건축에 필요한 충분한 재목들을 공급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는 미리 치밀하게 계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인생의 계획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종종 두 가지의 상반된 접근 방법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기도하면 되지 계획이 무슨 필요하겠느냐고 생각합니다.  기도하면 우리 주님이 어련히 다 알아서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접근을 극단적 신비주의적인 접근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계획하면 되었지 기도가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접근 방법입니다.  이것은 세속적이고 인본주의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에게서 기도와 계획은 결코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계획한 것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느헤미야의 내일에 대한 계획은 기도 속에서 내일에 대한 계획이 준비되고 탄생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어떤 꿈을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꿈꾸고 있는 꿈들이 현실로 이루어지느냐, 현실로 이루어지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 어떻게 판가름이 날까요?  저는 그것이 우리가 누구나 꿈을 가지고 있지만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계획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전과 개꿈을 결정하는 것, 그것은 우리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계획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개꿈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이런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집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두 아들 모두가 개를 기르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아들 모두가 날마다 개꿈을 꿉니다.  그런데 한 아들은 개 꿈만 계속 꾸어댑니다.  반면에 한 아들은 개꿈을 꾸면서 개집을 설계하고 개 집을 지을 준비를 합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아버지이고 두 아들 가운데 한 아들에게만 개를 사주어야 한다면 이 두 아들 중 어떤 아들에게 개를 사주시겠습니까?  개꿈만 꾸는 아들입니까, 아니면 소원을 품고 설계를 하고 계획하는 아들에게 주시겠습니까?  답은 물어보나 뻔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우리가 계획하지 못할까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우리가 미래를 계획하지 못하는 보편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는 계획을 했다가 안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안에는 계획에 대한 실패의 두려움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예 계획을 안하고 사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크리스챤 리더십을 연구하는 존 맥스웰이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실패가 두려워 아무 것도 계획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실상 실패를 계획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아직도 내 인생에 남아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복된 미래에 도전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분 앞에 나아와 엎드려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후원자가 되시는 하나님이 주실 내일에 대한 비전을 가슴에 품으십시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주신 그 비전에 따라 내일을 계획하십시오.  그리고 그 비전을 향해 자신의 몸을 던져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꿈이 인생을 만듭니다.  하나님은 그 인생 속에 있는 꿈을 복 주셨습니다.  꿈이 없는 부모, 꿈이 없는 지도자, 꿈이 없는 나라...  얼마나 불행합니까?  꿈이 없으면 파괴됩니다.  꿈이 없으면 방탕해 집니다.  꿈이 없으면 게을러집니다.  꿈이 없으면 긴장감을 잃고 맙니다.  그러나 꿈이 있는 사람에게 절제가 있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에게는 열정이 있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내 인생이 한 점의 빛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캄캄한 밤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할지라도 신실하신 하나님, 부르짖어 구하는 자에게 크고 은밀한 비전을 보여주시는 자비하신 하나님, 그분 앞에 나아와 다시 기도하며 그가 주실 내일을 가슴에 품고 희망을 열어 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람은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수많은 문제에 부딪힐 때 그 문제에 반응하는 자기 나름대로의 삶의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삶의 고난 앞에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보여줄 당신의 삶의 철학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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