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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도전하는 사람이 일류인생 (삼상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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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하는 사람이 일류인생 

< 작은 키 덕을 본 등소평 > 

중국 공산화 후, 모택동은 거의 신적인 존재였습니다. 중국에서 그의 카리스마에 대항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특히 문화혁명 이후에는 모택동의 의견에 반대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처럼 반대하면 죽는 시대였지만 단 한 사람만은 모택동도 맘대로 죽이지 못했습니다. 그가 바로 등소평입니다. 

어느 날, 한 회의 중에 모택동이 자기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은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거대한 회의석상에서 아무도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모택동은 자기의견이 100%의 찬성으로 통과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한 사람이 이미 일어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너무 키가 작아서 그의 일어선 키가 다른 사람들의 앉은키와 비슷해서 미처 모택동이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가 바로 키 150센티미터인 등소평입니다. 

사람들은 다 모택동의 진노로 등소평이 곧 초상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모택동은 등소평의 선키가 남들의 앉은키와 비슷한 모습에 도저히 웃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결국 등소평은 작은 키 덕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 등소평이 모택동 사후에 실권을 잡고 지금의 중국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개인숭배를 철폐하고, 적절한 때에 권력을 후진에게 넘기고, 죽을 때는 아무 미련 없이 시신을 화장해 자기 뼛가루를 홍콩 앞바다에 뿌리게 해서 영원히 중국인들의 마음에 남았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키를 중시합니다. 키가 크면 멋지게 보입니다. 그러나 큰 키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생각과 정신과 비전의 키입니다. 지금 사회는 전쟁터입니다. 키가 크다고 그냥 승리의 깃발을 내주지 않습니다. 그 전쟁터에서 승리하려면 키보다 더 중요한 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시각이고, 성숙한 사람의 시각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도 중요하지만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는 더욱 중요합니다. 주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남을 사랑하려면 진정한 자기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 남에게 자신감을 가지라고 할 수 없듯이 나를 사랑하지 못하면 남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또한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데 남보고만 자기를 사랑하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물이 되려면 진지한 자기 사랑을 통해 자기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먼저 극복해야 합니다. 

저도 키가 작아서 청소년 때는 키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했습니다. 그 콤플렉스가 1984년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체험하면서 없어졌습니다. 그때부터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자 어른들도 호감을 가졌고 여성들도 조금씩 호감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1987년에 미국에 유학을 갔는데 미국 학생들은 한국 학생들에 비해서 키에 대한 집착이 적었습니다. 그러자 키에 대한 콤플렉스가 더욱 없어졌습니다. 

그래도 결혼은 저보다 키가 작은 상대가 편할 것 같아서 키가 작은 여성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로 저보다 키가 더 큰 지금 아내를 만났습니다. 아내도 원래는 키를 보았는데 교회에 다니면서 키를 보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키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우리 목사님은 키는 작지만 영적인 키는 크다.”고 자랑해줍니다. 지난 17년 동안 그렇게 말해주니까 결혼 후에는 키에 대한 콤플렉스가 기억 저편으로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에 대해서 아내에게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지금도 아내는 저와 외출하면 항상 굽이 높은 신발을 신습니다. 그러면 키가 172센티가 넘으면서 저와의 키 차이가 더 벌어지는데 그렇게 하는 2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키가 큰 자기가 키가 작은 저와 다니면 사람들이 “저 남편은 얼마나 능력이 있으면 저렇게 키가 큰 여자와 다닐까?”라고 생각하면서 제가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둘째, 키가 큰 자신이 키가 작은 남편과 다니면 사람들이 “저 아내는 외모를 보지 않는 진국 여성이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자신도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그렇게 나오니까 저는 더욱 아내와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됩니다. 

< 진짜 키가 큰 것 > 

저는 지금까지 목회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목회를 통해 “정말 힘들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고 “정말 행복하다!”는 생각은 너무 많았습니다. 그런 목회의 행복에는 가정의 행복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런 행복이 있기에 글도 나옵니다. 하루라도 행복이 없으면 저는 글을 쓰지 못합니다. 그처럼 서로 마음만 맞으면 돈이 없어도 행복합니다. 그 행복을 자녀들도 누리기를 원하기에 우리는 두 딸에게 수시로 말합니다. “은혜야! 한나야! 너희들은 절대 키를 보고 결혼하지 말라.” 

거의 세뇌가 될 정도로 수시로 그 얘기를 합니다. 그만큼 마음과 정신과 비전의 키가 중요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부모들도 그 사실을 잘 알지만 문제는 그 사실을 사려 깊게 교육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교육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녀가 외모보다 중심을 보도록 시야를 열어주어야 합니다. 키가 작아도 얼마든지 거인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의 그릇이 크면 얼마나 키도 커 보입니까? 

저는 지난 한 주간 동안 오늘 전할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새벽에 열심히 동료 목사님들의 교회성장을 위해 기도하는데 그때 하나님이 갑자기 이런 음성을 주셨습니다. “이 목사야! 네 교회가 작은데도 다른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기도하는구나! 그 기도를 들으니 나도 기쁘다. 사실은 그게 진짜 키가 큰 거야.” 

그런 무언의 음성을 듣고 마음에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전 세계 각처에 흩어진 선교사님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데 마치 전 지구를 품에 안고 기도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때 다시 하나님이 이런 음성을 주셨습니다. “이 목사야! 네가 지금 지구를 품에 안고 기도하는구나! 네 모습을 보니 나도 정말 기쁘다! 크게 바로 진짜 키가 큰 거야. 네 키가 지금 지구보다 큰 것 알지?” 

지구를 품고 기도하는 사람은 지구보다 키가 큰 사람입니다. 기도의 폭이 넓으면 영적인 키도 커지고 가슴도 넓어집니다. 그 넓은 가슴에는 지구도 안길 수 있습니다. 그처럼 지구보다 큰 사람이 10-20센티 작은 것 때문에 마음이 무너질 필요가 없습니다. 더 나아가 내일의 찬란한 비전을 가지고 미래까지 품고 나간다면 얼마나 키가 큰 것입니까? 그런 영적인 키를 키우십시오. 그러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 엔슬리(Susanna Annesley)는 사무엘 엔슬리의 25남매 중에 25번째 자녀였습니다. 그렇게 자녀가 많은데 제대로 먹고 잤겠습니까? 그래서 웨슬레의 어머니도 아주 작았고, 그 밑에서 19남매 중에 15번째로 태어난 요한 웨슬레도 키가 150센티까지밖에 자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키로도 세계를 품고 감리교를 창시했습니다. 그런 사례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제 육신의 직은 키나 부족한 외모로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누구나 자기만의 콤플렉스가 있는데 그 콤플렉스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미래의 찬란한 비전을 가지고 세계를 품는 성도가 되고, 예수 믿고 인물이 되십시오. 적어도 자신만은 자신을 우습게보지 마십시오. 그래야 남이 나를 우습게보지 못합니다. 남이 나를 우습게봐도 내가 나를 우습게보지 않고 사명을 향해 달리면 얼마든지 복된 삶이 가능합니다.  

< 진정한 일류인생의 주인공들 > 

외모가 좋아야 꼭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기하게도 완벽한 사람보다는 대개 약점이 있고 부족한 사람을 골라서 사용하십니다. 사람은 외모만 보고 일류 여부를 판단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뜻과 거룩한 비전에 합해 살면 외모는 이류인생 같아도 그 인생이 진짜 일류인생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류와 같은 외모로서 일류의 역사를 만들어낸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몇 사람만 생각해 볼까요? 

1. 아브라함 

창세기 12장 이후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축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가 네게 젖과 꿀이 흐르는 넓은 땅을 주겠다. 바다의 모래처럼,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을 주겠다.” 그 축복대로 되려면 아브라함의 아내는 다산할 수 있는 여인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라는 애초부터 불임여인이었습니다(창 11:30). 결국 아브라함은 백세에 간신히 아들 이삭을 얻습니다. 그러면 이삭은 열심히 자녀를 낳아야 하는데 이삭도 나이가 40이 되어서야 리브가와 결혼하고 60이 되기까지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런 외적 조건들만 보면 마치 하나님의 약속은 공수표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 아브라함의 자손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처럼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릅니다. 수많은 자손을 주겠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은 아이를 잘 낳지 못하는 부족한 사람을 통해서 그 일을 이루어내십니다. 왜 하나님이 약한 자를 불러 쓰시는지 사람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답게 만들기에 하나님은 그 방법을 즐겨 사용하십니다. 


2. 모세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킨 위대한 지도자였지만 탁월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그에게는 말주변이 없는 결정적인 하자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미디안 광야에서 떠나 애굽으로 돌아가 백성을 해방시키라고 했을 때 그가 왜 못 간다고 했습니까? 말주변이 없었기에 자신의 지도력에 의문을 품은 것입니다. 실제로 광야에서 백성들이 불평해도 모세는 그 백성들을 말로 잘 설득시키지 못했습니다. 

지도자가 말주변이 없는 것이 얼마나 큰 핸디캡입니까? 그래도 하나님은 모세를 선택하고, 대신에 말 잘하는 아론을 붙여주셔서 팀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사람은 ‘혼자만의 일류’를 추구하지만 하나님은 부족한 사람을 통해 ‘공동체의 일류’를 추구하게 합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모세 대신 아론을 보내야 맞을 것 같지만 하나님은 모세를 택하고 그에게 위대한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릅니다. 


3. 다윗 

다윗은 유대인들이 꼽는 역사상 가장 탁월한 성군입니다. 그러나 그가 탁월해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사실 그보다 탁월한 사람은 많았습니다. 사무엘이 새로운 리더를 찾아 이새에게 왔을 때 사무엘의 눈에는 이새의 다른 아들들이 외모도 좋고 하나님이 쓰실만한 멋진 재목처럼 보였습니다. 반면에 다윗의 외모는 왜소했고 도저히 왕의 재목이 아니었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선택해 이스라엘의 위대한 성군으로 만드셨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는 너무 다릅니다. 사람은 키와 외모를 봅니다. 그러다가 인생을 겪으면서 나중에 눈물짓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못난 사람을 선택해서 잘난 사람을 부끄럽게 하는 하나님입니다. 


4.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은 키가 아주 작고 말은 어눌했습니다(고후 10:10).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귀로에 드로아에 들려서 하룻밤을 지냅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떠나려고 그날 밤에 집회를 열자 사람들이 많이 와서 창가에까지 사람들이 걸터앉았습니다. 그때 유두고란 청년이 졸다가 창가 밖으로 떨어져 죽었습니다. 왜 그런 일이 생겼습니까? 물론 유두고 책임도 있었지만 말주변이 없던 사도 바울의 책임도 있었습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요새 부흥사처럼 말을 재미있게 했다면 유두고도 졸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처럼 바울은 말주변이 없었고 스스로도 그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6절에서 그는 고백합니다.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않다.” 게다가 바울의 인상도 호감을 주지 못했습니다. ‘바울의 행적’이란 책을 보면 바울은 150센티미터의 작은 키에, 대머리였고, 눈썹은 일자 눈썹이고, 얼굴에는 두꺼운 돋보기를 썼습니다. 그런 보잘것없는 외모 때문에 종종 자존심 상하는 일도 겪었습니다. 

어느 날, 바나바와 함께 1차 선교여행 중에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쳐주었습니다(행 14:10). 그러자 루스드라 주민들은 신이 내려왔다고 하면서 바나바는 ‘쓰스(제우스)’라고 불렀고 바울은 ‘허메(헤르메스)’라고 불렀습니다. 고쳐주긴 바울이 고쳐주었는데 오히려 바나바를 신들의 왕인 제우스로 더 높이 부른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나바가 나이도 많고 바울보다 풍채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까? 

게다가 사도 바울은 일설에 간질병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집회 도중에 간혹 정신을 잃고 쓰러져 부르르 떨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사람들이 대 사도라고 추앙하고 싶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눈물로 그 ‘사단의 가시’가 떠나기를 간절히 3번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시면서 그 사단의 가시를 그냥 두고 그를 사용하셨습니다(고후 12:7-10). 얼마나 충성스럽고 진실했으면 그런 간질병 환자까지 멋지게 사용하십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루스드라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제사하려고 할 때, 그들이 “그러지 말라! 우리는 신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처럼 개인우상화의 본능을 거절하면 더 존경심을 보내야 하는데 군중들은 대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근처의 안디옥과 이고니온에 살던 유대인들이 그곳까지 와서 사람들을 선동하자 그들은 어제의 숭배대상을 돌로 쳤습니다. 그런 군중심리를 아셨기에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결국 군중들의 돌에 맞아 바울이 실신하자 군중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성밖에 버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한참 후에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갔다가 바로 이튿날 그 불편한 몸으로 다시 250리나 떨어진 더베로 떠납니다(행 14:20). 그 다친 몸으로 며칠 쉬었다 가면 어떻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고집스럽게 다리를 절면서도 다음날 그냥 더베로 떠나 그곳에서 다리를 절면서도 복음을 전합니다. 그처럼 그는 사명에 충성했습니다. 그처럼 충성스런 바울을 외모가 조금 부족하다고 해서 어떻게 하나님이 쓰지 않겠습니까? 

중심이 있으면 하나님은 하자인생도 얼마든지 멋있게 쓰십니다. 지금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그 부족함은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나가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결국 그 부족함은 성공과 행복의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디딤돌입니다. 그러므로 더 나은 삶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십시오. 현재의 모습에 안주하지 말고 영향력의 키를 키우십시오. 그렇게 끊임없이 위대함을 향해 도전하는 사람이 정말 키가 큰 사람입니다. 

< 새로운 세계를 향한 도전 > 

어느 날, 남북전쟁이 어렵게 돌아가자 링컨은 마음의 평안을 위해 예배 시작 직후에 한 교회로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뒷자리에 앉았다가 예배 끝나기 직전에 그곳을 떠났습니다. 집에 돌아오자 사모님이 “예배가 어땠느냐?”고 물었습니다. 링컨이 시큰둥하게 그냥 “괜찮았다.”고 대답하자 사모님이 물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별로였나요?” 

링컨이 대답했습니다. “아니오. 설교는 잘했소! 내용도 좋았고, 전달도 잘했고, 제스처도 좋았고, 재미도 있었소. 그러나 내 생각에 그 설교는 실패인 것 같소.” 사모님이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여보! 그렇게 모든 것을 잘 갖춘 설교가 어떻게 실패한 설교인가요? 앞뒤가 안 맞잖아요?” 그때 링컨이 말했습니다. “물론 그 설교가 내용도 좋고, 여러 면에서 좋았지만 듣는 사람들이 위대한 어떤 일을 하도록 도전하는 데는 실패했기 때문이오.” 

왜 예수님의 설교가 위대합니까? 예수님도 때로는 재미있는 예화도 드시면서 놀라운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설교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듣는 사람이 무엇인가 위대한 일을 하도록 도전했습니다. 예를 들어, 젊은 부자 관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네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눅 18:22).” 

사실 인생에서 위대함을 향한 도전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물론 겸손한 평민의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계속 평민으로 머물러있지 말고 내일의 위대한 축복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십시오. 그리고 평범함을 떠나 특별함을 추구하십시오.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지금보다 얼마든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제 도전하십시오. 현재에 상태에서 머물려는 것은 하나님이 앞으로 주실 최상의 것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이제 찬란한 비전을 가지고 위대한 일에 나서고, 일류인생을 지향하십시오. 평범함은 비범함의 적입니다. 평범함에 머물려고 하면 위대하게 될 수 없습니다. 전진하지 않으면 후퇴합니다. 그러므로 전진을 위해 끝없이 도전하십시오. 특별히 하나님이 말씀과 기도 중에 어떤 위대한 일을 도전할 때 그 도전을 받아들이십시오. 

노아는 방주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도전을 받아들였고, 아브라함은 새로운 땅으로 가라는 도전을 받아들였습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탁월하게 살라는 도전을 받아들였고, 에스더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라는 도전을 받아들였습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자기들의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도전을 받아들였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에게 평범함에서 벗어나 위대한 일을 위해 나서라고 도전하실 때 그 도전을 받아들이십시오. 

‘현재의 빚’에서도 벗어나고, ‘현재의 수입’에서도 벗어나 더 높은 곳으로 나가고, ‘현재의 드림’과 ‘현재의 선교와 구제’에서도 벗어나 더 높은 곳으로 나가십시오. 지금 일본의 김성수 선교사님이 파킨슨씨병으로 거동이 힘드십니다. 그렇게 건강하던 분이 젊은 나이에 그렇게 되었으니 선교사역의 스트레스가 얼마나 큰지 짐작이 됩니다. 게다가 일본이 얼마나 병원비가 많이 듭니까? 그것을 혼자 감당하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물질은 이럴 때 써야 합니다. 그런 긴급 상황에 구원투수가 되려면 사업의 성공도 추구하십시오. 

이제 기도할 때는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제가 추구해야 할 위대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소서!” 위대함이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버는 것’입니다. 위대함이란 ‘우연적인 산물’이 아니라 ‘신적인 보상물’입니다. 이제 위대함이 오게 해달라고 바라지만 말고 위대함을 만들어 내려고 거룩한 플로팅(plotting, 판짜기)을 하십시오. 우리 앞에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새로운 축복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시도하십시오. 현재의 위치에서 떠나야 어떤 일도 일어납니다. 

창세기 12장 1-2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게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그 도전을 받아들여 아브라함은 75세에 새로운 땅으로 출발해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만약 그때 아브라함이 편한 자기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면 아브라함의 이름은 역사 속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키, 학식, 재력 등이 있어도 내일의 찬란한 비전과 도전이 없으면 그 인생은 이류인생이지만 아무리 부족한 점이 많아도 내일의 찬란한 비전과 도전이 있으면 그 인생은 누구보다 멋진 진정한 일류인생입니다. 이제 자신의 부족한 모습으로 낙심하거나 한탄하지 말고 위대함을 향해 나가십시오. 위대함은 “얼마나 가졌느냐?”에 있지 않고 “어떤 사람이냐?”에 있기에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따라 살면 누구나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위대함은 ‘완벽한 삶’이 아닌 ‘최선을 다하는 삶’에서 옵니다. 위대함은 평범함과 미지근함을 거절해야 주어집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위대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한국에서 기독교선교연맹 교회의 모태와 같은 역할을 하며 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더 많은 선교사를 후원해야 합니다. 그런 비전을 가지면 신실한 일꾼들과 선교후원자들을 하나님이 더욱 많이 붙여주시고, 선교사 훈련센터의 꿈도 신비한 방법으로 이뤄질 날이 올 것입니다. 그런 위대함을 찾아 나서고 끊임없이 도전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멋지게 이뤄내는 분들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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