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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벧후 1: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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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벧후 1:16-21)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드린 것은, 교묘하게 꾸민 신화를 따라서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의 위엄을 눈으로 본 사람들입니다. 더없이 영광스러운 분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좋아하는 아들이다” 하실 때에, 그는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 거룩한 산에서 그분과 함께 있을 때에 우리는 말소리가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또 우리에게는 더욱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날이 새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여러분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등불을 대하듯이, 이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이 무엇보다도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아무도 성경의 모든 예언을 제멋대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령에 이끌려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말씀을 받아서 한 것입니다.]

• 산 위에서

주님이 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세속의 절기로는 우수雨水입니다. 여전히 추위가 가시지 않았지만 벌써 고로쇠 수액을 채취하는 이들이 활동을 시작한 것을 보면 봄은 그렇게 우리 곁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가오는 수요일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입니다. 교회 전통은 바로 그 직전 주일을 주님의 산상변화주일로 지킵니다. 우리는 그 내용을 잘 압니다. 수난의 어두운 골짜기로 들어가시기 전 주님은 높은 산 위에 올라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 산이 머리에 흰 눈을 인 채 서있는 2814미터의 헤르몬 산이라고도 합니다만, 정말 예수님께서 그 산에 오르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서가 말하는 높은 산은 비일상적인 삶의 자리, 하나님의 현존 앞입니다.

제자들은 그 비일상적인 자리에서 자기들의 스승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됩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깊은 침묵 속에 머무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그 모습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을 것입니다.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죽지 못해 살아가는 가련한 사람들 마음에 하늘의 생기를 불어넣으시던 예수님, 스스로 ‘거룩하다, 의롭다’ 자부하던 이들로부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조롱을 받았던 예수님이 그 산 위에서는 전혀 다른 분처럼 보였습니다. 

그동안 잘 안다고 여겼던 예수님에게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이 풍겨 나왔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의 실체를 보았습니다. 그분은 빛이셨고, 하늘이셨습니다. 주님의 옷은 세상의 어떤 빨래꾼이라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보였다고 합니다. 안에서 밖으로 새나오는 빛, 예수의 존재로부터 방사되는 빛, 그 빛은 태초의 어둠을 가르던 바로 그 빛이었습니다. 

노자의 도덕경 56장에 나오는 말은 그대로 예수님께 적용이 됩니다. 참다운 지혜자는 누구입니까? 그는 “마음의 날카로움을 꺾고, 그 빛을 감추고, 그 빛을 부드럽게 하여, 속세의 먼지와 함께 하는”(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사람입니다. 일부러 빛을 감추고 세상과 하나 되는 것을 일러 진리와 신묘하게 하나 되었다(是謂玄同)고 말합니다.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그리스도 찬가도 똑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6-8) 

• 증언

제자들은 그 산에서 티끌 속에 감추어졌던 빛 곧 절대를 보았습니다. 놀라운 고양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더 놀란 것은 빛이신 그분이, 절대이신 그분이 수난이라는 운명을 향해 나아가신다는 것입니다. 그 산에서의 경험은 제자들의 예수 체험의 변곡점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한용운이 노래했던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었습니다.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지는 그 추억 말입니다. 그때까지 예수님은 놀라운 이적을 베푸는 스승이었습니다. 어쩌면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게 달라졌습니다.

오늘 읽은 베드로후서가 과연 베드로가 쓴 것이냐 아니냐 하는 신학적 논의는 일단 제쳐놓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편의상 이 책의 저자를 베드로라고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에 대해 자기가 가르친 것은 교묘하게 꾸민 이야기가 아니라 그의 위엄을 목격한 자로서 증언이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이 말을 하는 동안 그의 눈빛이 마치 추억을 더듬듯 아득해지지 않았을까요? 

갈릴리 호숫가에서 그분의 부름을 받던 시간부터,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 척박한 갈릴리 사방을 발로 누비며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붙이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떠올랐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경험했던 오병이어의 기적은 언제 돌아보아도 가슴 벅찬 감동이었을 것입니다. 귀신을 꾸짖어 내쫓으셨던 것처럼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잠잠케 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은 얼마나 장엄했겠습니까? 아주 잠깐 동안이었지만 물 위를 걸어 주님을 향해 나아가던 순간의 기억도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변화산에서의 경험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 황홀한 시간에 제자들은 속세를 잊었습니다. 삶과 죽음을 뛰어넘는 초월 체험이었습니다.

회상이 여기쯤 이르렀을 때 베드로는 어쩌면 더 깊은 침묵 속에 잠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겟세마네 동산과 대제사장의 집 안뜰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기억하며 눈시울이 붉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처형, 온 세상을 뒤덮던 어둠, 그리고 그들의 가슴에 깃든 태초의 흑암보다도 더 깊은 어둠…모진 게 인생이라 절망에 잠겨 디베랴 호수로 돌아가 그물을 던지던 시간,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났을 때의 감격, 그리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온갖 고초를 마다하지 않았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을 겁니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그는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앎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경건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을, 그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그의 영광과 덕을 누리게 해 주신 분이십니다.”(벧후1:3)

이것은 이론도 아니고 교리도 아닙니다. 이미 그 생명을 누리고, 그 영광과 덕을 누리고 있는 사람의 증언입니다. 

• 질그릇 속에 담긴 보물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비린내가 나고, 향나무를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백합화를 품은 흙에서는 백합향이 난다 합니다. 비록 그 삶이 평탄치는 않았지만 예수와 더불어 살아온 시간은 시나브로 빛이 어둠을 몰아내는 과정이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만의 경험은 아닙니다. 바울도 똑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어둠 속에 빛이 비쳐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을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의 빛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고후4:6)

그 빛으로 인해 바울은 박해의 어두운 골짜기를 거닐면서도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늘 제멋대로이고 연약하기만 한 우리이지만 그 빛의 비췸을 받고 나면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 살 수 있습니다. 저는 바울 사도의 고백을 읽을 때마다 가슴에 전율을 느낍니다.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고후4:8-9)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이리도 큽니다. 살아갈 이유를 알고,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알기에 그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물론 고난도 당하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가슴에 이미 빛이 밝혀진 사람은 세상이 어둡다 하여 낙심하지 않습니다. 돈 좀 못 벌면 어떻습니까. 당장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고 하여 낙심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불의와 싸우면서도 스스로 거칠어지지 않습니다. 반대자들조차 우정으로 감싸 안을 수 있는 넉넉함이 있습니다. 모름지기 믿는다면 이 자리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멉니다. 그 때문일까요? 바울은 자랑할 것이 있다면 자기의 약한 것과 십자가 밖에는 없다고 했습니다. 통나무처럼 투박한 이 고백 속에 바울이라는 거인의 비밀이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너무 왜소해졌습니다. 저는 이것이 너무 속상합니다. 기독교인이라 하면서도 마음이 좁쌀보다 작은 사람들을 봅니다. 늘 자기 문제에만 골똘할 뿐, 불의한 세상에 저항하고, 고통받는 이들과 연대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한 마디로 말해 십자가의 은총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한가로운 산보가 아닙니다. 가시밭길을 걷는 것처럼 힘겨운 길일 수 있습니다. 겁 많고, 비겁하고, 욕심 사납고, 냉소적인 우리 마음이 일대 변화를 경험하지 않는다면 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런데 일단 그 길을 걷기 시작하면 예기치 못했던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 새로운 소명

여전히 길을 떠나지 못한 채 주저주저하는 이들에게 베드로는 예언의 말씀을 굳게 붙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날이 새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여러분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등불을 대하듯이, 이 예언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19)

말씀에 붙들려 살기로 작정하고, 그 말씀에서 떠나지 않을 때 밤은 물러가고 새벽이 밝아옵니다. 얼마 전 목사님 한분과 긴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는 5공화국 시절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자기 가족들이 당한 수모의 기억을 아프게 떠올렸습니다. 신체에 가해지는 고통보다 더 힘겨웠던 것은 인격적인 모욕이었습니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가족도 있었습니다. 그는 목회자로 살아가면서도 가슴에 못처럼 박힌 분노를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너무 황폐해지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성경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로서 당연한 일이었지만 정말 작정하고 읽은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열 번을 읽고, 스무 번을 읽자 마음이 고요해졌습니다. 서른 번을 읽자 마음 속에 박혔던 분노가 삭아 내렸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세상에 가득 찬 아픔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사랑으로 감싸 안아야 할 이웃들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말씀이 빛으로 화해 마침내 샛별처럼 떠올라 주변을 환하게 비추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는 불의에 대항하여 싸우지만 거칠지 않습니다. 그는 주변을 평화롭게 만듭니다. 

태초에 “빛이 있으라” 하심으로 세상에 유입된 빛, 호렙산 떨기나무 속에서 나타난 빛, 변화산에서 제자들이 만났던 빛, 부활절 새벽 빈 무덤에서 새어나온 빛, 바울이 다마스커스 가는 길에서 만났던 그 빛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다른 곳으로 변합니다. 살면서 경험하는 인생의 쓴맛과 괴로움, 누군가에 대한 미움과 원망조차 하나님께 이르는 징검다리로 삼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꼭 붙들고, 모든 것을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인식할 때 우리 삶은 비루함을 넘어 깨끗해질 것입니다. 신앙은 훈련입니다. 훈련은 반복입니다. 몸과 마음에 버릇을 들이는 과정입니다. 20세기에 가장 존경받는 분 가운데 하나인 교황 요한23세는 추기경 시절에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생애를 만족하게 이끌어주셨다. 그것은 내가 오래 전부터 다른 사람들의 결점을 요모조모 따지거나 과거를 들추어내지 않기로 습관을 들였기 때문이다. 나 또한 결점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침묵을 지키고 즉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용서를 베푼다.”(피에르 파올라 타칼리티 엮음, <<말씀이 나의 두 손에>>, 92쪽)

사순절 순례의 여정을 앞두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 삶을 재정립하는 절기입니다. 여러분께 나눠드린 사순절 달력을 잘 활용하십시오. 주님의 빛으로 세상을 보는 습관을 들이십시오. 마침내 우리 마음에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말씀에 유의하십시오. 그 말씀을 삶으로 번역하는 일에 진력하십시오.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강이 우리 신앙 여정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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