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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원수 사랑의 길Love Your Enemies (마 5:3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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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오늘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마태복음 5, 6, 7장은 ‘산상 수훈(The Sermon on the Mount)'이라 불리우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에 대한 윤리 헌장입니다. 산상수훈은 새언약의 중보자로 오신 예수께서 신약시대의 성도들을 위하여 새 시대의 새 기준으로 직접 입법하신 새 법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핵심인 팔복을 말씀하시고(5:3-12), 이어 이웃과 세상에 대한 성도의 근본 역할을 가르치는 소금과 빛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5:13-16). 그리고 천국 시민에게 요구되는 의의 수준(5:19-20)을 제시하신 주님은 21절 이하에서 율법 준수의 기준을 내면적 자세로까지 확대한 새로운 기준을 세우셨습니다.

 

살인의 새 기준, 간음과 이혼의 새 기준, 맹세의 새 기준, 복수의 새 기준, 그리고 이웃 사랑의 새 기준 등등, 예수님의 교훈은 당시 유대 사회의 통념으로 볼 때 가히 혁명적인 가르침이었고, 듣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오신 유대 나라는 더 이상 하나님의 선민 공동체라고 부를 수 없는 인본주의 풍조가 만연한 세계였습니다. 서로 미워하고 비판하는 사회 분위기, 이혼이 성행하던 타락한 사회 풍조, 그리고 사기꾼들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으로 불의를 행하는 세계였습니다(마 21:12, 13).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주 엄중하고 단호하게 새로운 법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일지라도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신앙과 윤리를 행치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주님의 법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 중에서 이웃 사랑의 새 기준으로 제시하신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말씀입니다. ‘원수’가 누구입니까? ‘원수’는 ‘나를 저주하고 나를 미워하고 나를 괴롭혀 나와 관계가 나쁜 사람’ 입니다. 때로는 자기 집안 식구일 수도 있고, 직장 동료일 수도 있고, 한 교회 교인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타산적인 인간관계를 맺고 삽니다. 예를 들면 ‘누구(자식)는 무조건 사랑한다, 누구(형제와 친척)에게는 어느 정도 친절을 베푼다, 누구(친구와 동료)는 주고받기 식 사랑한다, 누구(라이벌과 원수)는 싹 무시한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식의 모든 계산을 폐지하셨습니다. ‘원수도 무조건 사랑하라’ -- 여기에 참된 해방이 있습니다. 

 


여러분, 나에게 해를 입힌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원수처럼 여기는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 좋은 사람 중에도 더러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주님, 내가 저 사람을 이해는 하겠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라고 기도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원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에 대해 ‘용서’ 정도가 아니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무도 기가 막히는 노릇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주님께서 무턱대고 어려운 과제를 우리에게 제시하기만 하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들에 관해 교훈하고 있습니다. 나의 원수까지 사랑하는 수준의 세계를 향하여 성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복수하려는 생각을 버린다.

 

38-39절=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 

 


‘눈에는 눈으로 갚고 이에는 이로 갚겠다’ 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방법입니다. 내가 받은 만큼 되돌려 주겠다는 생각이 있는 한, 어떤 경우에도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가끔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입으면,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또는 “어디 얼마나 잘 사나 두고보자!” 같은 말을 쉽게 되뇌이는데, 이렇게 악담(惡談)하는 그 자체가 이미 마음속으로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것입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는 38절의 간결한 본문은 구약 형법 규정(출 21:24, 신 19:21, 레 24:20)과 고대 형법의 근간을 이루었던 동해 보복법(同害報復法, Lex Talionis)의 내용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 법은 (1)가해자가 더 이상 범죄하지 못하도록 가해자의 범죄를 억지함과 동시에 (2)피해자의 잔인한 복수(창 4:23-24)를 억지함으로써 정의를 구현하고 개인적인 보복을 금하는 법입니다. 

이 법의 핵심은 “재판장의 판결” 따르는 데 있습니다(출 21:22-25). 이 보응법은 가해자나 피해자에게 공히 하나님의 정의가 재판을 통해 시행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이 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정당한 보응의 원리를 법정에서 개인 관계로 옮겨 놓아 개인적인 복수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네 가지 예를 들어 동해보복법의 정신을 설명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39절). 이것은 존엄권(dignity)의 문제입니다. 오른 편 뺨을 친다는 것은 손등으로 칠 때를 말하는데, 당시 풍습에 의하면 손등으로 치는 것은 최고의 인격 모독입니다. 손등으로 칠 때에 벌금형은 보통 사람의 일년 급료 이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격 모독을 받았을 때 말과 표정과 행동으로 복수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자존심에 대해서 죽어라, 온유하고 겸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40절). 이것은 안락권(security)의 문제입니다. 당시에 겉옷은 절대로 손대면 안 될 정도로 중요한 옷입니다. 겉옷을 저당 잡을 경우는 해 지기 전에 돌려주는 것이 구약의 법입니다(출 22:24). 겉옷은 외투로서 옷이면서 동시에 밤에 이불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속옷을 달라고 할 때에 이렇게 귀한 겉옷까지도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발가벗고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있으면 자신의 최소한의 안락권까지도 포기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41절). 이것은 자유권(liberty)의 문제입니다. 로마 군인은 물건을 옮길 때에 어떤 유대인에게든지 1마일을 옮기라고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군인이 강요할 때 자발적으로 1마일을 더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로마 군인이 요구하지 않는 일까지 자발적으로 함으로써 신자에게는 로마 황제 외에 다른 황제(주님)가 계시며, 로마 제국 외에 다른 왕국(천국)이 있음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1마일 이상은 옮겨주지 않아도 되는 자유권을 포기하고 덤으로 1마일을 더 옮겨줌으로써 로마 황제의 법보다 훨씬 더 우월한 천국 법에 의해 살고 있음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42절). 이것은 재산권(property)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사기꾼, 깡패, 도적들을 도와주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은 정말 가난해서 요구해 오는 경우에 도와주기를 거부하는 이기심을 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원수를 사랑하는 길은 먼저 내 마음 속에서 복수하고자 하는 생각을 버리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계속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39절). 

 


‘대적하지 말라’는 말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행해지는 복수는 물론 법정에서의 공방까지 가리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에 대하여 위해(危害)를 가한 비열한 상대에 대하여 그 어떠한 복수도 삼가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피해자가 마땅히 주장할 수 있는 ‘피해 보상의 권리’를 포기하라는 교훈입니다. 따라서 동해 보복법을 절대 진리로 알고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큰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독을 당하면 이중 삼중의 모독으로 복수하는 세상입니다. 어느날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이 술에 취한 채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이 모습을 본 에스토 부인이 “선생님, 주정뱅이군요!” 라고 하니까 처칠은 이렇게 쏘아붙였습니다. “귀부인, 추녀이시군요. 그런데 저는 내일이면 술이 깰 겁니다. (부인은 계속 추녀로 남아계시겠군요).”

 

우리는 이런 식의 인격 모독에 대한 복수에 능숙한 농담으로 복수하기도 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앙심을 품거나 복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웃집에 가서 낫을 좀 빌려오라” 고 심부름을 보냈습니다. 아들이 이웃집에 갔다 와서 하는 말, “낫을 빌려줄 수 없다고 하네요.” 거절당하고 왔다는 것입니다. 

며칠 후에 바로 그 이웃집에서 이 집에 낫을 빌리러 왔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낫을 빌려주라고 하는데 아들은 거칠게 항의합니다. “며칠 전에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는데요.” 

그때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지혜를 베풀었습니다. “아들아,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도 빌려줄 수 없다, 이것은 복수다.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려준다’ 라고 하면서 그런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건 증오다. 그러나 거절당했다는 것을 다 잊어버리고 아무 상관없이 그저 ‘낫이 필요하다니까 빌려준다’ 라는 깨끗한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것이 긍휼이다”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세 대답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세로 살고 있습니까? 범사에 복수하는 마음으로 삽니까, 증오하는 마음으로 삽니까? 참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미워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신 분, 손들어 보세요.” 아무 반응이 없자, 다시 물었습니다. “정말… 아무도 안 계십니까? 손들어 보세요.”

그때, 저 뒤에서 연세가 매우 높으신 한 할아버지가 손을 들었습니다. 목사님은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요청했습니다. “할아버님,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지 우리에게 말씀해 주세요.”

그러자 나이 들어 힘없는 목소리로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응, 있었는데… 다아… 죽었어.” 

 


미운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복수의 칼을 내려놓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일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 나라 백성 된 자 아니고는 엄두를 내기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천국 시민들로서 복수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악을 조장하지는 말아야 하지만 악을 처리한다는 미명 하에서 보복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수하지 않고 사랑을 베푸는 은총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이야말로 다른 사람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고 우리에게는 날마다 순간마다 솟구치는 은총을 체험하게 하는 복음의 삶입니다.

 

 



2. 원수를 위하여 기도한다.

 

44절= “···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원수를 사랑하는 수준으로 성장하려면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빼놓으면 안 됩니다. 여기 ‘기도하라(프로슈코마이)’는 동사는 현재 명령형으로 쓰여 지체하지 말고 간구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38-42절은 ‘복수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사랑을 교훈하고 있다면, 43-44절은 적극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어거스틴은 “많은 사람들은 다른 뺨을 돌려대는 것은 배웠으나 그들을 때린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참는 데서 봉사하는 데로, 냉대(冷待)하지 않는 데서 선대(善待)하는 데로 성숙해야 합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마귀적입니다.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인간적입니다.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하나님적입니다”(알프레드 플루머). 우리는 선을 악으로 갚는 마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선을 선으로 갚는 인간을 초월해야 합니다. 우리는 악을 선으로 갚으신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원수에 대하여 소극적으로 인내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자세에까지 나아가는 것은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천국 시민 된 성도들에게 마땅히 이 수준까지 이르러야 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원수를 사랑하게 되려면 그전에 그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의 성자 E.M. 바운즈는 “기도는 상황을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경우에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우리가 새로운 일을 기대하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은 때때로 환경을 바꾸셔서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 기도하는 사람이 누리게 되는 축복은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기도자 자신이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미움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실제적인 능력도 기도에 있습니다. 

 


6,25 사변 때 서울에서 목회하던 김예진 목사님은 인민군에게 포로가 되었습니다. 군인들은 목사님의 가슴과 등에다 “이놈은 민족 반역자요 딸을 미국 놈에게 팔아먹은 자” 라는 흉악한 글을 써 붙이고 결박한 채 마차에 실어 사형장으로 끌고 가면서 그들이 써서 붙인 그 글을 큰 소리로 읽으라고 강요했습니다. 

 

김목사님은 강요당할 때마다 “오 하나님 아버지, 저들이 알지 못하여 이렇게 하오니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저들은 나의 가장 사랑하는 동포들입니다. 주님이시여, 저희 심령에 성령을 보내사 주님의 사랑을 밝히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애끓는 음성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무지한 그들은 총검으로 목사님의 머리와 어깨를 마구쳤고, 선혈이 낭자하게 흘러 내렸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사님은 정신이 돌아오면 또 다시 구슬픈 소리로 전과 같은 기도를 총탄에 맞아 쓰러질 때까지 외쳤습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에게는 “쳐부수자 원수들!” 이라는 식의 십자군 사고방식(crusade mentality)이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상대가 압제자들이든 착취자들이든 공산주의자들이든 자본주의자들이든 그 누구든 우리는 불타는 증오심을 가지고 그들을 대하면 안 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원수의 행위를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말과 행동과 기도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 속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미움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원수같이 생각되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기도입니다. 기도는 나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상처를 입힌 분들이 있습니까? 얼굴만 떠올리면 미운 생각이 드는 사람은 없습니까? 그런 사람을 대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자신이 변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생각한다.

 

45절=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을 마음 깊이 사랑하게 되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리고 그분이 어떤 희생을 치루시고 우리를 구원해 내셨는지 그 사랑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원수 사랑의 길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속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는 데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45절). 

 

사람들은 다분히 상대방의 행동에 따라 행동하는 경우가 많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행동을 했건 하나님은 자신의 방식대로 우리를 대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들이었습니까?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이었고, 죄의 종 사탄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미워하지 않으셨습니다. 미워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스스로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 모여든 당시의 유대인들 또한 그들의 철천지 원수인 로마 제국을 결코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열혈당’을 조직하여 로마의 요인을 암살하거나 반란을 자주 일으켰습니다(눅 13:1-3). 

 

제자 중 가나안인 시몬은 그 열혈당원 중 하나이었고, 예수님 대신 석방된 바라바는 반란군의 두목이었습니다(눅 23:25). 그런데 예수님은 폭력 대신 사랑으로 원수를 대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공산주의 원조격인 칼 맑스 같은 자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약자의 자기 합리화 논리’ 라고 빈정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원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구속 섭리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원수된 우리를 위하여 사랑의 화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따뜻한 빛과 은혜라는 단비를 이 원수된 세계에 비추시고 내리신 목적은 많은 사람들을 열매로 얻기 위해서였고, 계획대로 얻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원수를 위해 기도하면서 원수를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감동하여 원수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녹으면 녹는 만큼 우리의 원수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은혜에 감동된 사람은 비록 감정적으로 사랑할 수 없어도 의지적으로 사랑하기로 작정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찰스 웨슬레가 지은 찬송 가운데 “놀라운 사랑” 이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그 찬송시가 담고 있는 내용이 얼마나 은혜스러운지요.

 

“하나님, 당신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하나님, 벌레 같은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웨슬레는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벅찬 감격으로 가득차서 뜨겁게 불렀습니다. 그의 마음이 뜨거웠기 때문에 이 찬송을 불렀다기 보다도 하나님께서 실제로 그와 같이 사랑해주셨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뜨거운 찬송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자 하나님의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히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다른 것 다 없어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흠뻑 젖게 하옵소서. 

주여, 다른 것 주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으로 행복할 수 있게 하옵소서.”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핍박하는 자에 대해서 좋은 말을 하는 성도입니까? 괴롭히는 자를 오히려 선대하는 그리스도인입니까? 여러분의 라이벌을 위해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기도자이십니까?

 


여러분은 주님으로부터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까?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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