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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병환자의 믿음의 비밀A Leper Before Jesus (마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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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신약성경의 앞부분은 예수님의 교훈과 사역을 기록하고 있는 네 개의 복음서로 되어 있는데, 각각 예수님의 모습을 다른 각도에서 보고 있습니다.

 

사복음서 가운데 마가복음은 예수님을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섬기기 위해 ‘종으로 오신 분’ 으로 소개하고 있고,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인자(人子)가 되심’ 을 기록하고 있고,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이 기록되어 있는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이 땅에 ‘왕으로 오신 분’ 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자 마태는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며, 구약에 약속되고 예언된 메시야이심을 집중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마 1~4장까지는 ‘왕의 신분’ 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요한에게 세례받으시고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신 사건이 기록되었습니다.

 

5~7장까지는 ‘왕의 교훈’ 에 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윤리강령이라 할 수 있는 저 유명한 산상수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8~9장은 ‘왕의 권능’ 에 대한 저자의 의도된 기록이 나옵니다. 10가지 이적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모세 시대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을 상기시킵니다. 



여기의 사건들은 예수님의 제 1차 갈릴리 사역 기간 중에 발생한 사건들로서, 사실은 산상수훈 이전에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마태는 이적(異蹟)이라고 하는 한 가지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기 위해 그와 관련된 사건들을 한데 묶어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적 기사는 메시야로서 예수님의 신적 권위(Divine Authority)를 확증하고 있습니다. 각종 질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명하여 굴복케 하시고, 심지어 죽음조차도 정복하시는 예수님의 이적들은 그분의 권위의 출처(The Source of Authority)를 명백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적 기사들은 인간을 향한 메시야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셨으나 그 능력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을 고통의 결박으로부터 풀어주시기 위해 사용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나병환자를 고치신 이적 또한 예수님의 사랑을 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당시로서는 불치병이요 모든 사람들이 혐오하는 나병 환자를 직접 손을 대어 고쳐주심으로 주님의 메시야 되심과 불행 속에 허덕이는 인류를 긍휼히 여기시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관심을 끌게 된 나병 환자의 신앙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그의 믿음의 비밀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신앙은 어떠해야 합니까?

 

 



1. 무리를 헤치고 예수께 나아왔음 (= 용기 있는 신앙)

 

2절=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

 


나병 환자의 믿음의 비밀은 그가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를 헤치고 예수님께 나아온 모습 속에 나타납니다. 이것은 실로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 ‘나병(레프로스)’ 은 다양한 피부 질환들(skin disease)을 가리키는 말로서, 한센씨 병과 반드시 동일한 질병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유대인들은 각종 피부 질환들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 모두 부정한 자들로 규정하여 사회적으로는 성 밖으로 내쫓는 격리 정책을 실시했고, 종교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죄인들로 규정하였습니다. 

 


레 13, 14장을 보면 나병에 걸린 것으로 간주되는 자들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옷을 찢은 채로 거리를 다니며 ‘나는 부정하다 나는 부정하다’ 라고 외치면서 다녀야 했으며, 일반인들은 이들과 마주치는 것 자체를 부정한 일로 간주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었다가 발각이 되면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본문의 상황을 가정해보면 나병환자가 예수님에게 다가오기 전에 이미 군중들은 예수님의 곁에서 떠났던지 아니면 그가 다가오자 군중들은 그 자리를 피했을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 나병환자는 죽을 각오를 하고 예수님께 나아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용기 있는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놀라 피하는 무리를 헤치고 나아오는 나병 환자를 상상해보십시오. 실로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근거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아마도 그가 자신의 병에 대한 심각성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병이 그러하듯이 나병도 초기에는 그 증상이 미미하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다가 병이 깊어지면 피부가 헐게 되고 눈썹과 속눈썹 등이 떨어져나가고 점점 감각이 없어지게 됩니다. 심한 경우에는 손가락 발가락이 잘라지고 코도 문드러집니다. 

 

본문의 환자는 증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기 어려우나, 어쨌던 그는 자신의 병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허다한 무리를 뚫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올 때에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나아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오면서 우리 자신의 병이 얼마나 깊어 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중에 그저 의미 없는 발걸음을 한 주일에 한 번씩 교회로 옮기면서 왔다 갔다 하는 분은 안 계십니까?

 

내 영혼의 병이 점점 깊어져서 내 영혼의 손가락이 잘려나가고 내 영혼의 코가 문드러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돌에 맞아 죽을 각오를 하면서 예수님을 찾아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어떤 고난과 고통이 따르더라도 예수님께 나아오는 발걸음을 멈출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적 상태는 나병 환자처럼 너무나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주님을 사모하고 적극적으로 찾아야 주님을 만나고 그의 은혜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주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주님을 먼저 찾아온 사람들입니다. 5절의 백부장이 그랬고, 9장의 중풍병자가 그러했습니다. 

 


렘 29:12-13=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적극적으로 주님을 찾읍시다. 용기를 내어 주님께로 나아갑시다. 주님을 적극적으로 찾는 자가 주님의 은혜를 입습니다.

 

 



2. 예수께 나아와 절하며 간청함 (= 예배 신앙, 고백적 신앙)

 

2절=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

 


여기 ‘절하며(프로세퀴네이)’ 는 직역하면 ‘무릎을 꿇다’ 입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에게 최대한의 존경(respect)과 경의(homage)를 표했습니다. 그는 아마도 예수님에 대해 소문을 통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본절에는 그의 예배 신앙이 잘 나타납니다.

 


나병환자가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예수님께 나아온 사실은 그가 예수님께 간청하는 말을 통하여 잘 알 수 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 말은 자기 질병에 대한 강한 치유 요청이자 신앙 고백으로서, 예수님께 대한 나병환자의 믿음이 매우 컸음을 시사해 줍니다. 

 


성도 여러분! 이 사람에게서 우리는 아름다운 예배 신앙, 고백적 신앙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우리도 이 사람처럼 주님의 능력을 확신하고 언제나 주님께 ‘원(願)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성도들 중에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께 ‘원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중의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불신앙입니다.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그럼에도 성도들 중에는 주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여서 주님께 ‘원하지’ 조차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둘째는 교만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무엇을 ‘원한다’ 는 것은 자기의 부족을 인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원하지 않는다’ 는 것은 자기의 부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우리는 과연 주님께 ‘원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으로 확신하며 주님께 자신의 모든 문제를 내어놓고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께 나아와 절하며 간청하는 예배자이십니까? 

 


어느 책에 요즘 교인들이 예배드리는 유형에 대해 표현한 글이 있습니다. ‘조퇴형’이 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기도할 때 몰래 빠져나가는 사람입니다. 

 

‘후진국형’이 있습니다. 일찍 왔어도 언제나 맨 뒷자리에 앉는 사람입니다. ‘귀가 준비형’이 있습니다. 설교만 마치면 성경 찬송 덮고 집에 갈 준비를 마치는 사람입니다. 

 

‘멀대파’가 있습니다. 설교 시간에 멀거니 강단을 응시하고 있지만 생각은 멀리 출장중입니다. 주보에 밑줄 긋고 교정까지 보는 ‘꼼꼼파’가 있는가 하면, 졸면서 끄덕끄덕 콤마를 찍는 ‘아멘파’, 수시로 시계를 들여다보는 ‘안절부절파’, 예배 후에 있을 모임만을 생각하는 ‘회의 염려파’, 찬송 부를 때 입만 벙긋대는 ‘붕어파’, 그리고 누가 왔나, 안 왔나 두리번거리며 인원 체크하는 ‘경비파’도 있는데, 이는 주로 각 부서의 책임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증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유형입니까?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순정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정말 마음과 정성을 다해 주님을 경외하는 예배자로 인정받아야 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나병환자는 예수께 나아와 절하며 고백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그는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주님 앞에 자신을 정직하게 노출시켰습니다. 

 

“주님, 저는 문둥병자입니다.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고통이 제게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자신의 높은 신분(산헤드린 공회원)과 사회적 위치 때문에 대낮에 자신을 노출시키기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의 경우 세상 사람들이 탐내는 훌륭한 신분과 사회적 위치가 주님께로 나아오는 데 걸림돌로 작용했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이야기에서도 이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신분과 위치 때문에 자신이 행한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 했지만, 자신의 속마음을 하나님께 노출시키지는 않았습니다. 

 

그에 반해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올 때 아무 것으로도 포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주님 앞에 나를 완전히 노출시키지 않는 한 그 어떤 은혜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나병환자처럼 우리 또한 속마음을 온전히 노출하여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야 합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우리 또한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맡기고, 주님의 능력을 온전히 신뢰하는 신앙고백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예배 시간이 우리의 간절한 신앙고백의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 황제가 워털루 전쟁에서 참패하여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 기자가 그에게 찾아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 평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면 언제였습니까?” 나폴레옹은 한참 눈을 감고 회상을 하더니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전투가 치열하던 어떤 주일이었소. 그때 나는 졸병이었지만 아침에 철모를 벗고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눈물을 흘리며 예배를 드린 때가 있었소. 바로 그때가 내게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때였소. 그러나 나는 어느 날부터인가 예배에 빠지기 시작하였고 지금 전쟁에서 패배하여 이처럼 유배생활을 하고 있소.” 

 


우리는 최고의 행복한 순간이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여야 합니다. 아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세로 예배를 드리는 순간이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순간입니다. 예배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최고의 행복이요, 가치요, 극치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여, 예배를 회복하고 존중히 여기십시오.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고쳐주심 (= 정결케 됨)

 

3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님은 참된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 앞에 결코 수수방관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주저하지 않으시고 나병환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손을 대었습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어쩌면 그 환자는 손에 진물이 나고 고름이 맺혀 있었는지 모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엄두를 내지 못할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의 가장 더럽고 수치스러운 부분에 손을 대시길 원합니다. 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께서 ‘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 나병환자가 깨끗하게 나을 것을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낫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깨끗해지기를 진실로 원하십니다. 주님이 나병환자를 향하여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고 하신 음성은 오늘 저와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음성입니다. 주님 앞에 나오는 모든 자에게 이 음성이 들려집니다.

 


예수께서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3절 하반절에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불치병인 나병을 즉시 치유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죄’ 라는 병이 있습니다. 이 병은 나병보다 더 심각한 병입니다. 나병에 걸리면 감각이 없어지는 것같이 ‘죄’ 라는 병에 걸려도 양심에 화인 맞은 것처럼 무디어집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가 이 병에서 완전히 고침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모든 물과 피를 쏟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오는 자는 누구나 주님의 능력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의 질병으로부터 깨끗함 받습니다. 주님께 나오는 자는 영적인 질병은 물론이고 정신적인 질병, 그리고 육신적인 질병으로부터 깨끗함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 나오는 백부장은 믿음으로 그의 하인이 고침 받는 이적을 체험했습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하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고 있던 여인은 군중 사이로 예수께 나아와 옷자락을 잡았고, 주님은 그의 혈루의 근원을 즉시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인하여 슬퍼하고 있던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너희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나흘 전에 죽었던 나사로가 무덤 밖으로 걸어나오는 이적을 직접 체험했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자신의 병고치는 능력을 이제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십니다. 제자 된 자는 누구나 주님의 이름으로 병든 자를 고칠 수 있습니다.

 

마 10:7-8=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막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주님의 말씀에 따라 초대교회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는 사역을 일상의 일로 알고 당연시했습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하체 장애인을 일으킨 사건은 그중의 하나이었을 뿐입니다.

 


스탠리 죤스는 인도 선교사로서 큰 발자취를 남긴 분입니다. 그는 평생을 인도에 가서 복음 전하다가 생을 바친 분입니다. 그는 89세에 뇌일혈로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강제로 보스턴에 있는 병원에 입원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죤스 선교사님은 치료를 받으면서 의사가 들어올 때마다 “닥터, 나에게 이렇게 말해 주세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스탠리, 걸으라’. 이렇게 좀 말해 주세요” 하고 부탁을 했습니다. 하도 부탁을 하니까 의사가 그분에게 올 때면 “스탠리,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걸으라”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스탠리 선교사는 “아멘” 하고 대답했습니다. 

 

간호사가 들어오면 그 간호사에게도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령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간호사가 치료를 하다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스탠리, 걸으라” 하고 말하면 또다시 “아멘” 하고 대답했습니다. 어쩌면 약간 노망이 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그분은 6개월만에 병상을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90살의 나이에 또 다시 인도에 선교하러 갔습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와 영광을 믿으니까 기적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의 권능을 믿지 않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해봅시다. 병든 사람이 있으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딸아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 지어다” 하고 명령하고, “아멘”으로 화답해 보십시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분은 믿음로 나오는 자에게 말씀을 선포하셨고(케리그마) 그 말씀은 능력이 되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모든 어려움을 물리치고 주님께 예배하러 나온 성도들에게 능력의 말씀을 선포하시며, 사랑의 손길로 성도들의 약하고 추한 부분까지 정결케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말씀을 우리에게 위탁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전하며 능력의 말씀으로 병든 자를 치유하게 하십니다. 

 


이 자리는 나병환자보다 더 어려운 분들이 영적 정신적 육체적 질병으로부터 고침받는 자리가 되기 바랍니다.

 

이 자리는 은혜받은 성도들이 새로운 힘을 받아 세상을 향하여 파송되는 복된 자리가 되기 바랍니다. 이 사실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목표가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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