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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살아 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약 2: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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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약 2:14-26)


다윗은 시편 30편 5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이 말씀은 다윗이 자신의 삶에서 경험되어진 신앙고백입니다.  그가 때로는 자신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으로 잘못을 하고 범죄할지라도 그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잠깐이고, 오히려 그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은 평생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때로는 문제를 만납니다.  그러나 문제는 잠깐이지만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평생 계속됩니다.  우리가 그 약속을 믿고 나가면 하나님의 은혜가 끊임없이 우리 뒤를 추적하면서 문제가 축복을 압도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이 문제를 압도하게 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아무리 문제가 태산처럼 커도 그 문제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오늘도 이 아침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를 위해 일하심을 굳게 믿으십시오.  의심은 '장벽'을 보게 하지만 믿음은 '대로'를 보게 합니다.  의심은 밤만 보게 하지만 믿음은 낮도 보게 합니다.  의심은 한 걸음을 떼기도 두렵게 만들지만 믿음은 영혼을 하늘 높이 치솟게 합니다.  의심은 이런 질문을 하게 합니다.  "하나님! 누가 믿겠습니까?"  그러나 믿음은 이런 대답을 하게 합니다.  "하나님! 제가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을 굳게 믿고 내일의 축복을 향해 멋지게 달리는 축복의 시위자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땅의 교회와 기독교는 민족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는 역사적 상황에서 전파되었고, 또 그 가운데서 성장해 왔습니다.  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노골화하는 시기에 이 땅의 교회는 온 몸으로 부딪히며 굴곡의 시기를 헤쳐왔습니다.  당시 이 땅의 교회는 민족을 향한 남다른 엄숙한 결단과 고백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신앙은 이 땅의 희망이었고 등불이었습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 분들도 교회를 좋아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존경했습니다.  이 땅에 살고 있던 백성들은 교회를 통해서 처음으로 민주적인 회의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민주정치를 실현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일제의 식민지 억압 속에서 교회를 통해서 해방을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의 강압적인 통제로 철저하게 언로가 막혔던 그 당시에 민족 일치의 바탕과 의사의 표현을 감당했던 유일한 통로가 교회였습니다.  3·1운동도 전국의 교회들을 통해서 일어났습니다.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에 참여한 33인 가운데 절반인 16명이 교회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당시 기독교 인구는 전체 인구 가운데 2-3% 밖에 되지 않았는데 독립선언에 참여했던 사람들 가운데 절반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당시의 교회는 그야말로 민족의 미래였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서구의 발전된 교육과 의료, 음악과 체육, 문화가 소개되었습니다.  한국 근대화 초기에 모든 의료인들, 음악인들, 체육인들의 90% 이상이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가 해방되었을 때 교회는 해방된 나라에 리더십을 제공했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유학을 갔던 사람들이 돌아와 리더십의 자리를 채웠습니다.  초기 제헌국회는 기도로 시작되었습니다.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교회는 민족의 유일한 피난처요 위로였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기독교의 신앙은 이 민족의 가장 중요한 리더십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이 땅의 교회는 민족 재건의 보루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 김용기 장로님이 운영하던 경기도 광주에 있는 기독교 복민운동의 공동체였던 가나안 농군학교를 방문하고 깊은 인상과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얻은 감동으로 시작했던 새마을 운동이 우리 민족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교회의 폭발적인 부흥과 함께 우리는 세계 경제 9위라고 하는 선진국의 문턱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 땅의 기독교 인구는 전체 인구에서 거의 20%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런데 2%, 3%였을 때 이 땅의 백성들에게 등불이요 희망을 주었던 민족교회로서의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20%에 도달한 지금 우리는 역설적인 상황 앞에 직면하게 됩니다.  오늘 이 땅의 교회는 더 이상 민족교회로서의 희망을 주는 교회가 아니라 이 땅에서 새로운 농담과 조롱거리를 제공하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염려하는 대신에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는 역설적인 판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폄하하는 인터넷 용어로 인터넷 공간이 채워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독교를 폄하하는 용어로 개독교라는 용어가 등장했습니다.

개독교.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닙니다.  원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도 우리가 붙인 말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 그리스도 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처음부터 좋은 이미지로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좋아지면서 변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개독교라는 이미지도 달라질 것이라고 봅니다.  어쩌면 개독교도 새로운 이미지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독교가 뭐냐?
개: 개 같은 인생을 살던 사람들이,
독: 독특한 은혜를 받아 속한,
교: 교회들의 공동체.
그것이 개독교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입니까?  거기에는 아마도 많은 다양한 요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교회 내에 출입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많아졌지만 오히려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의 숫자는 더 줄어든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 보다 2세기를 앞서 살았던 덴마크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이와 같은 부끄러운 교회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계는 있으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없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서 떠들고 먹고 마시고 즐기려는 사람들은 많지만, 교회의 공동체를 통해 자신을 이 세상에 하나님을 위한 제물로 내어놓는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회 공동체에서 자신의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정작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가려는 사람은 없다는 말입니다.  소위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1절에 보면 주님께서 사데교회를 향해서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내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살았다고 하는 이름은 가졌지만 실상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는 이처럼 명목상 이름만 있는 교인들을 가리켜서 죽은 믿음의 소유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믿음이 죽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믿음을 다시 살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다시 회복시켜야 할 살아있는 믿음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첫 번째로, 그것은 바른 교리 이상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열심히, 뜨겁게 믿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바르게 믿으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른 교리를 갖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대한 바른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바른 교리에 입각한 신앙을 가리켜서 우리는 정통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 바른 신앙, 바른 믿음을 갖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바른 믿음에 근거한 바른 행동입니다.
그런데 바른 성경 지식에 근거한 교리를 갖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바른 실천을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른 지식을 가졌지만 그 지식에 따라 살지 못하는 믿음을 가리켜서 야고보는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합니다.  "헛 것이다.  죽은 것이다."  심지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오늘 본문에서 그것은 "귀신같은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19절을 다같이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귀신은 악한 영입니다.  이 귀신은 실재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악한 귀신들은 "하나님이 한 분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믿을까요, 안 믿을까요?  믿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믿습니까?  귀신은 하나님이 한 분 계신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에서 믿습니다.  귀신도 하나님이 한 분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

다른 질문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알겠습니까, 모르겠습니까?  압니다.
마귀는 예수가 우리를 위해서 죽었고 살았다는 사실을 믿을까요, 안 믿을까요?  믿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안다는 사실에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귀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악한 영들을 멸하신다는 사실을 알까요, 모를까요?  압니다.  알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 보면 "믿고 떠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귀신은 자신들의 운명과 하나님에 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귀신들은 귀신같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귀신들은 바른 지식, 바른 신학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귀신은 정통 신학자다."

신학자라고 하면서 하나님도 제대로 안 믿고, 신학자라고 하면서 예수의 신성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통합측에 속한 신학대학교에서도 성경의 가르침과 배치되는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귀신은 자유주의 신학자가 아닙니다.  귀신은 정통 신학자입니다.  귀신은 가장 정확하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하나님이 한 분인 것을 믿는다고 해서 그 하나님 앞에 경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도 않습니다.  헌신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알고만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니까 지식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를 않습니다.  바른 지식, 바른 교리를 가졌지만 거기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알고만 있는 신앙, 안다는 차원에서의 믿음은 아직도 죽은 믿음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반드시 아셔야 하는 것은 신앙생활에서 바른 교리는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신학이 있습니다.  신학은 텍스트인 성경과 콘텍스트인 교회적 상황을 중심으로 성도들이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바른 교리를 제공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바른 교리는 필요합니다.  바른 교리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거짓된 교리를 믿으면 패가망신합니다.  그리고 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통해서 바른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바른 실천을 위한 중요한 기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바른 성경 공부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교회 나오면서 일정한 시간이 경과되면 기독교 신앙에 대한 지식이 쌓여 갑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바른 지식을 갖게 되었다고 해서 내가 그런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지는 마십시오.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조심하셔야 합니다.  오늘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의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살아있는 신앙이란 바른 교리 그 이상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 믿음과 그 지식을 붙들고, 그 지식과 그 믿음대로 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의 믿음은 살아있는 믿음이 될 것입니다.  내가 배우고 안 것을 그대로 행함으로 옮기기 시작할 때 그것이 내 믿음이 산 믿음인 것을 증명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말씀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살아있는 믿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까?

두 번째로, 그것은 시험에 합격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일단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정말 살아있는 참된 믿음이 되려면 그 믿음은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학생들이 시험을 통과하며 성숙해 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숙해서 살아있는 믿음이 되려면 시험을 잘 통과하셔야 합니다.

묻겠습니다.  여러분이 학교 다니던 시절에 때가 되면 반드시 시험을 칩니다.  시험 때가 오면 나는 가슴이 설레이면서 그 시험이 너무너무 기다려졌다는 분은 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아주 지극히 정상이십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좋아할 수 없는 이 고통스러운 시험이 교육제도에서 영원히 없어져야 마땅하다고 확신하는 분은 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두 가지 질문에 손을 들지 않았다는 것은 저에게 두 가지를 동의하신 것입니다.  첫째로, 아무도 시험을 즐거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손을 들지 않았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시험이 왜 필요합니까?  시험을 치면 자신의 진짜 실력과 정체를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에서 왜 시험이 필요합니까?  그 시험을 통해서 나의 나된 정체성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 신앙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알게 됩니다.  시험을 통해서 자신의 믿음이 폭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그 신앙을 시험하고, 그 시험을 통해서 우리의 참 믿음을 증명해 낼 케이스를 제시합니다.  오늘 본문의 21절에서부터 24절까지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여기에서 케이스로 등장한 것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를 읽어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창세기 15장 6절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 말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약속을 받았습니다.  네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100살이 가까웠는데도 불구하고 소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아브라함이 절망을 하고 기대를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데리고 있던 종들 가운데서 가장 똑똑한 엘리에셀이라는 종을 상속자로 삼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이 엘리에셀을 자신의 상속자로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라고 하시면서 약속대로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별이 빛나는 어느 날 밤에 집 밖으로 나오게 하시고 하늘을 보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아!"  "예, 하나님."  "저 하늘의 별들을 좀 세어봐"  "별 하나, 별 둘"  아브라함이 별을 세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는 곧 별이 너무너무 많아서 셀 수가 없다고 푸념을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래, 아브라함아! 네 자손이 이처럼 되리라고 내가 약속하마.  나는 약속하면 변개치 않고 그대로 이루는 하나님이야."

이때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말씀하신 그 약속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가 믿었더니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내용이 여기에서 처음으로 등장을 합니다.  이것이 창세기 15장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아직도 그의 믿음은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믿음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갑니다.  그의 믿음이 살았나 죽었나를 시험하는 순간이 찾아 왔습니다.  아브라함이 기적같이 아들 이삭을 얻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창세기 22장 1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시험은 너의 독자 이삭을 내게 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아니,주실 때는 언제고, 지금 바치라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이 얼마나 고민을 했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니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아마 욥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을 것입니다.  욥이 고통 가운데 내뱉은 유명한 고백이 있습니다.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요, 취하시는 자도 하나님"  그래서 이삭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서 제단에 올려놓고 칼을 뽑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급하게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아들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네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란다.  네가 아직도 나를 신뢰하고 내 말에 순종할 수 있는지 나는 그것을 너에게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네 아들을 손대지 마라.  그리고 수풀에 걸려있는 어린양을 대신 제물로 바치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시험을 잘 통과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 시험에 순종함으로 마침내 하나님 앞에서 자기 믿음의 진정성을 증명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그렇게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진정성이 증명되고 시험에 합격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본문 21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할 때는 언제인데, 여기에서는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창세기 15장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그 사건을 놓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일까요,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일까요?  어느 것이 옳은 것입니까?  두 가지가 다 옳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나도 쉽게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의롭다함을 받은 그 믿음이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 앞에서 증명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부단한 성화의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이삭을 바치는 행위를 통해서 증명된 것입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결론입니다.  22절과 23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그러니까 창세기 15장에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말씀이 이제 창세기 22장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순종의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너는 나의 벗이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벗이라는 사실을 인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야고보서에서 말씀하는 이것은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야고보의 이 말씀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행함을 통해서 의롭다함을 받는 것으로 증명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여정 속에서 시험을 만나거든 그것 때문에 "내가 시험 중에 있다, 힘들다, 고통스럽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시험이 오거든 내 믿음을 관리하셔야 합니다.  인생의 시험 속에서 우리는 시험이 주는 고통에 집중하기보다는 이 시험에서 우리의 믿음이 합격되기를 고민하는 산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시험 중에 있을 때에 우리의 믿음을 잘 관리하십시오.  시험이 올수록 더 하나님께 순종하십시오.  시험이 올수록 더 하나님께 헌신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믿음을 증명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살아있는 믿음은 시험에 합격하는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말씀이 무엇입니까?

세 번째, 그것은 위기를 극복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야고보는 본문에서 아브라함에 이어 살아있는 믿음을 보여준 또 하나의 인물 사례를 소개합니다.  그는 바로 기생 라합입니다.  아브라함이 남자였다면 라합은 여자입니다.  아브라함이 유대인이었다면 라합은 이방인입니다.  아브라함이 경건한 삶을 살던 귀족이었다면 라합은 인생의 바닥을 살던 천민 출신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둘은 똑 같이 살아있는 믿음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라합은 어떻게 그의 믿음과 행함을 보여주었습니까?  본문 25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여기에 보면 라합은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아니라 행함으로만 구원을 받았다는 말입니까?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본문의 야고보서만 읽으면 라합의 의롭다함은 전적으로 행함에 근거한 것으로만 보여집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자 하는 내용은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히브리서 11장 31절과 비교를 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3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여기에서는 라합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소위 믿음의 장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라합이 등장을 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1장이 언급하고 있는 라합의 사건과 야고보서가 언급하고 있는 라합의 사건은 시간적인 간격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의 사건은 믿음으로 기생 라합이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인 야고보서의 사건은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해서 나가게 한 사건입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시간적 간격이 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이 살만한 땅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라합의 집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들이 라합의 집 문을 두드릴 때 그녀는 믿음으로 이들을 영접했습니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여호수아 2장 10절에 보면 어느 날 라합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고 역사하신 하나님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라합은 믿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들음은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라합은 들었고 그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사람들이 자기 집에 왔습니다.  그러니까 라합은 믿음으로 그들을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수동적인 영접입니다.  문을 열고 그냥 영접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을 믿고 영접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왜 천사들을 대접한 것입니까?  처음에는 그가 천사들인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믿기에 길가는 그들을 하나님처럼 대접을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가 바로 하나님의 천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자기 집에 들어온 지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가나안의 수색대가 자기 집으로 들이 닥쳤습니다.  절대적인 위기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이제 들키면 죽게 되는 상황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이런 뜻하지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런데 이때 라합은 목숨을 걸고 그들을 잘 숨겼다가 나가게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다 적극적인 믿음입니다.  적극적인 행함입니다.  바로 이 적극적인 행함을 통해서 라합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증명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뜻하지 않게 위기의 순간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위기는 또 한번 그 위기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의 진정성을 보여줄 수 있는 축복의 기회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과 저의 삶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 어떤 사람은 위기 앞에 좌절합니다.  위기 앞에 주저앉습니다.  위기 앞에서 신앙을 버리고 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지한 신앙, 살아있는 신앙을 가진 사람은 위기 속에서 믿음의 빛을 발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위기는 찾아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위기는 우리의 믿음의 진정성을 드러낼 수 있는 축복의 기회입니다.  내 믿음이 진짜 믿음인지, 가짜 믿음인지를 말입니다.

오늘 본문 26절은 결론적으로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묻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믿음, 그리고 저의 믿음은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당신은 위기의 순간에 주저앉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이 위기의 순간에 주를 담대하게 의지하는 행위로 당신의 믿음의 진정성을 증명하고 있는 사람입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믿음은 위기와 고난과 시험 속에서 더 빛을 발하는 살아 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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