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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천국은 섬김의 나라입니다 (마 13: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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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섬김의 나라입니다 (마 13:31-33)
   
“작은 일없이 큰 일 없다”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 네 사람이 빵집을 개업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맛있는 빵집’이라는 간판을 걸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세계에서 제일 맛있는 빵집’이라는 간판을 걸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우주에서 제일 맛있는 빵집’이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 사람은 ‘우리 동네에서 제일 맛있는 빵집’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손님들은 어느 집으로 갔겠습니까? ‘우리 동리에서 제일 맛있는 빵집’으로 몰려갔다고 합니다.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어디에 내어놓아도 최선의 사람이 됩니다. 최고가 되려고 하는 한 사람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잠시 정상에 오를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최선의 기반을 다지면서 올라온 사람은 언제나 정상에 머물 수 있습니다. 

보스턴의 15살 난 구두수선공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는 구두수선공에 불과했으므로 주일학교 교사 자격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 교회 선생님들에게 인계하는 일을 했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이 결석하는 바람에 15살 난 이 소년이 선생을 대신하여 아이들은 가르쳤습니다. 그 아이가 커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교사를 배출한 신학교의 교장이 되었고, 오늘도 그 학교의 영향력은 전 세계에 미치고 있습니다. 그 소년이 바로 ‘D. L. 무디’입니다. 그 이후 무디는 시카고 무디교회의 목사가 되었고 지금도 그 교회는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신앙운동의 시작은 겨자씨처럼 작습니다. 작은 겨자씨는 다른 씨와 비교할 때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 큰 나무를 이루는 것이 신앙운동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세상에서 아주 작은 나라인 이스라엘에서 출발하였습니다. 로마제국에 패망한 나라, 자기의 왕도 모시지 못하고 로마의 분봉왕이 다스려야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총독이 다스려야 하는 유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것도 변방의 땅, 갈릴리의 아주 작은 동리 나사렛에서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유대나라를 벗어나서 국제적으로 활동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겨우 빌립보 가이사랴에 나가 보신 것 외에는 이렇다한 이웃 나라에도 가보지도 못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에게 미움을 받아 공생애 3년으로 마지막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고,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전 세계 인구의 1/3이 넘고 있습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의 12명의 제자들 중에는 학문에 뛰어난 학자가 있는 것도 아니요, 위대한 선지자가 들어 있는 것도 아니라,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가던 어부들이었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던 세리요, 열심만 가지고 나라를 구해보려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사용하시는 우리 주님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능력이 많으셨습니다. 오순절이 지나면서 초대교회가 120명 정도 모이고 있었지만, 남자만 3000명, 5천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수만 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핍박이 일어나서 로마제국내의 여러 지역으로 도망가야 했는데, 이들로 말미암아 세계는 복음화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우리가 마지막으로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나라라고 말씀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오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임한 나라요, 우리 주님이 하나님으로부터 가지고 오신 나라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므로 확장되었고, 예수님이 재림하심으로 완성되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나의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만이 들어가는 나라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풍성한 생명을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하루도 끊임없이 확장되고 성장하는 나라요, 생명을 가진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가 만드는 나라가 아니라, 위로부터 주어지는 나라요, 위로부터 임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가지고 오신 나라요, 우리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할 때에 우리 안에 선물로 임하시는 나라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2:28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악한 영을 쫓아내셨습니다. 그 악한 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을 말합니다. 우리 주님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을 멸하러오셨습니다. 

눅17: 20-21에서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셨습니다. 롬14:17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눈물과 고통도 아픔도 다시 없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 나라는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 안에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에서 완성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 하나님의 나라는 자라나야 하고 확장되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사람이 살만한 사회로 만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읽을 때마다 힘이 얻고, 새로운 소망이 솟아나는 것을 느껴봅니다. 이 세상의 위대한 일도 아주 작은 데서 시작됩니다. 

욥기에 보면 욥의 친구인 빌닷이라는 사람이 욥에게 권면하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8:7)라고 하셨습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때로는 시련과 역경이 떠나지 않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귀한 열매를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고, 아주 작은 공동체로 출발합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은 씨앗입니다. 눈에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씨앗입니다. 유대인들은 아주 작은 씨를 말할 때에 겨자씨가 가장 작은 씨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 보다 더 작은 씨앗도 있다고 하지만, 성경이나 유대인들은 아주 작은 씨를 말할 때에 겨자씨를 말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는 겨자씨가 아니라 ‘난초’씨라고 합니다. 난의 씨를 보신 분이 있습니까? 분명히 씨는 있는데, 잘 눈에 띄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편백나무의 씨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라고 합니다. 그래도 겨자씨는 눈에 보입니다. 겨자씨는 크기도 작지만, 잘 자라고 크게 자라는 특성이 있어 교훈적인 의미로 사람들의 입에 잘 오르고 내리고 있습니다. 

겨자는 나무가 아닙니다. 십자화과의 일년생 또는 이년생의 재배식물로 봄에 노란 꽃이 피고 씨는 매우면서도 향기로운 맛이 있어 가루로 만들어 양념이나 약재로 사용하며 잎과 줄기는 채소로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다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지더니, 나무가 되어 말 탄 사람이 지나가고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란다고 하는데 크게는 3-4m 정도까지도 자라는 나무가 됩니다. 

성지에서 ‘시나피’라고 불리는 이 겨자는 다년생의 나무가 아니지만, 크게 자라는데, 마치 나무와 같이 자라납니다. 그래서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자라서 크게 되어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것을 겨자씨의 비유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생명이란 이렇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할 때에 겨자씨를 사용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겨자씨라고 하면 가장 작은 것을 말하는 관용구가 되었습니다. 사람이 아주 예민한 저울로 달아볼 수 있는 아주 가벼운 무게의 씨앗, 자로 재어볼 수 있는 물질 중에 가장 짧은 길이의 씨앗을 겨자씨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가장 작은 것을 말할 때 겨자씨를 생각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그 하찮은 겨자씨를 가지고 천국을 전망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아주 큰 것도 처음에는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예수님은 하도 작아 눈에 보일 듯, 말 듯 하는 그 하찮은 겨자씨앗을 가지고 천국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는 너무나 크고 소중하여 이런 하찮은 겨자씨로 설명하는 것이 격에 어울리지 않을 터인데, 예수님은 크고 화려한 것보다는 작지만 그 속에 생명력을 지닌 겨자씨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적은 씨앗에서 무한한 생명의 가능성을 보시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겨자씨를 보면서, 겨자가 자라서 나무와 같이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천국을 바로보고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을 설명하시는데 겨자씨를 가지고 설명하셨습니다.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기독교회는 세상에서는 아주 작은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는 생명력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증거하는 복음에는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한 사람으로 시작하여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집안이, 우리의 마을이, 우리의 민족과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로 확장되어 갔습니다. 종교개혁이 한 사람, 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되어 바른 믿음 안에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장로교회의 언더우드와 감리교회의 아펜셀러 목사님이 내한하면서 오늘에는 1천만 성도들이 믿게 되었습니다. 복음의 역사는 이렇게 미미하게 시작되었지만, 상상할 수 없는 정도로 엄청난 역사와 성장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유대의 베들레헴으로 한 아기로 태어나신 예수님, 예루살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 겨우 12제자만 남겨두시고 120명의 성도들이 모일 정도의 미미한 기독교회는 전 세계 문명을 바꾸어 놓았고, 정치와 경제를 새롭게 이 사회를 사람이 살만한 사회로 만들어갔습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아도 생명이 있었습니다. 생명은 모질게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거제의 해금강에 가보았습니다. 울릉도를 한 바퀴 돌아보면서 바닷가를 보았습니다. 높은 바위 위에서 수백 년을 자라온 소나무들을 보았습니다. 수백 년 인고의 세월을 이겨내면서 높은 바위 위에서 따가운 햇볕을 이기내고 바람을 이기내면서 비가 올 때 머금은 수분과 매일 아침 맺히는 이슬을 머금고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생명의 신비는 아무리 죽은 것 같아도 다시 살아나고 미미한 것 같아도 엄청난 역사를 이루고 맙니다. 

겨자씨가 자라납니다. 자라는데 나물보다 커집니다. 점점 더 크게 자라납니다. 이제는 나무와 같이 커집니다. 나무와 같이 우거져서 지나가는 사람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공중의 새들이 지나가다가 이 겨자 가지에 앉아 쉬어가고 어떤 새들은 아예 이 가지에 둥지를 틀고 깃들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공중에 새들에게도 햇볕을 피하게 하고 비을 비하고 바람을 피하고 그 잎이 그늘을 내어주므로 안식을 주고 유익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생활이 이렇게 나만 위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안식을 주고 생명을 살리는 유익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 개인의 삶도 겨자씨와 같아야 합니다. 정말 농사만 짓는 깡촌에서 한 어린아이가 할머니의 등에 업혀 교회를 나갔습니다. 그 아이가 성장하면서 그의 영혼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손에 붙잡혀 살았습니다. 그가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영혼에게 생명을 풍성하게 하고 낙심한 사람들에게 위로의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는 많은 가지를 내었고, 잎을 내었습니다.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앉을 수 있게 하였고, 그늘을 내어 비를 피하고 바람을 피하고 따가운 햇볕을 피하게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작은데서 출발하지만 큰 나무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누룩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33절입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성경에서 누룩은 대개 나쁜 사상이나 악한 영향력을 드러내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예수님이 말씀하신 누룩은 긍정적인 영향력을 가진 것으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누룩은 아주 적은 양이지만, 온 반죽에 퍼져 들어갑니다. 누룩은 밀가루 전체에 영향을 줍니다. 변화의 힘, 생명을 살리는 힘, 맛을 내는 힘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마치 누룩과 같이 사람들의 영혼에 들어가서 맛을 내고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우리 주님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살리는 역사, 변화의 역사를 가져옵니다. 사도바울이 변하였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고 배교시키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전 세계를 다니면서 복음을 증거하여 사람을 살렸습니다. 누룩은 눈에 띄지 않지만, 그것은 전체를 부풀어 오르게 하고 부드럽게 하고 감칠맛을 내어줍니다. 

오늘 한 교회가 전 세계에 가장 영향력을 주는 교회를 들어보라고 하면, 미국 워싱턴에 있는 세이비어교회(The Church of the Saviour)라고 합니다. 이 세이비어 교회는 윌로우크릭교회나 세들백교회나 레이크우드교회와 같이 대형교회가 아닙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는 휴스톤에 있는 레이크 우드교회 조엘 오스틴이 시무합니다. 빌 하이벨스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사카고의 윌로우그릭교회, 릭 워렌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새들백 교회는 대형교회입니다. 

물론 이런 교회도 아주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좋은 교회이지만, 워싱턴에 있는 세이비어교회는 대형교회가 아닙니다. 장년 150명 정도 모이는 작은 교회입니다. 1947년 나이 30세의 고든 코스비목사님이 설립한 교회입니다. 세이비어교회는 깊은 영성이 있고, 사회봉사를 잘 하여 세상에 가장 모법이 되고 있습니다. 영성과 사역이 함께 가는 교회요, 행함과 존재함이 함께 가는 교회입니다. 

이 교회를 설립한 고든 코스비 목사님은 올해 나이 87세이십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종군목사였습니다. 목사님이 한번은 군에서 세례를 주었는데, 세례 받은 병사들이 세례 받기 전이나 후에도 별로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밤에 적진에 투입되는 공격대원 중의 한 명이 “목사님, 저는 오늘밤 전투에 나가 죽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나에게 5분의 시간이 있는데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라고 했습니다. 전투에 나가서 죽을지도 모르는 병사가 5분의 시간이 있다고 예수님에 대하여 말해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한 마디로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 다음에 코스비 목사님은 사망의 명단에서 그 군인의 이름을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있은 후 자기의 부대에 130명의 장교 중에 21명만이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을 보고, 절규하였습니다. 

목사님은 그를 찾아온 한 명의 사람이라도 구원받은 확신과 감격에서 살게 하였습니다. 이 교회는 제자훈련에 힘을 써서 인턴교인제도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개방하여 같은 교인들과 함께 깊은 공동생활에 추구하는데 동의하여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정식교인이 되려면 그에 앞에서 같은 소그룹의 교우들에게 읽힐 수 있는 자신만의 자서전을 써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셨고, 주님의 일꾼으로 부르셨다는 것을 확신해야 하고, 모든 교인들은 매년 교인으로서의 서약을 해야 하고, 사역에 힘을 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학교에 등록하여 구약성서, 신약성서, 그리스도인의 성숙, 기독교 교리, 그리고 기독교 윤리 과목을 이수해야 합니다. 그리고 필독서를 읽어야 합니다. 영적 자서전을 씁니다. 기도모임에 나가야 합니다. 공식적인 서약에 임합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150명의 교인이지만, 1년에 1천만 불의 헌금으로 지역사회를 섬깁니다. 저는 돈 계산에 어두워서 한참 계산하였습니다. 종이에 쓰면서 10불이면 대략 1만원, 100불이면 10만원, 이런 식으로 종이에 쓰면서 1천만 불이라고 하니 100억 원이 넘는 돈이었습니다. 150명의 성도들이 내는 헌금이 100억 원이 넘어서 지역사회를 잘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섬김의 리더십 학교를 운영하여 많은 교회와 성도들을 교육합니다. 노숙자의 발을 씻기는 작은 예수의 집을 운영합니다. 자원봉사자들이 매년 7000 시간을 봉사하는 콜롬비아 로드 진료소를 운영합니다. 마약, 알코올 중독자, 노숙자들이 진정한 이웃이 되는 사마리아인의 집을 운영합니다. 

빈민지역 저소득층을 위한 만나의 집, 헨리 나우엔 신부가 감동을 받고 돌아간 전 세계 목회자들의 안식처인 축제 센터, 침묵기도 수양관을 운영합니다. 그들은 자원봉사를 주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들은 헌금하는 것을 돈 버는 것처럼 합니다. 그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데, 목숨을 걸었습니다. 1당 백이 아니라, 1당 만을 하는 교회가 되고, 그런 교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작은 교회이지만, 미국을 움직이는 작은 공동체 세이비어교회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겨자나무가 레바논의 백향목이나 상수리나무처럼 큰일을 기대할 수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물로 그치지 않고 나무로 부르게 된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겨자나무와 같은 우리의 소박한 기쁨과 행복은 나물 정도에 멈추지 않고 더욱 커서 나무가 되었고, 가지를 내고, 잎을 피워 그늘을 만들고, 우리의 가지에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서 깃들이고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겨자씨와 같이 자라나고, 섬기는 사명을 감당하라고 합니다. 주님이 사역을 위하여 우리들이 나서야 합니다. 쓰임받기를 원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장의 기쁨을 기대하고 맛보아야 합니다. 자라지 않는 사람, 자라지 않는 신앙, 성장하지 않는 교회, 나물 정도에 멈춘 교회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변의 많은 죽어 가는 심령들을 가슴에 끌어안고 생명을 살리고 안식을 제공할 수 있는 나무의 교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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