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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예수 사랑하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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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분명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된 날이었다.

학교 가는 날이 아닌데도 언니는 아침밥을 먹고 나서 또 어디론가 나가는 것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언니에게 물어보았다. “ 언니, 어디 가? ”“교회.”“거기가 어디야? 나도 가면 안 돼?” 나는 또 거절당할까봐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는데 의외로 언니는 “그래, 가자.”하고 순순히 대답하였다. 그 때의 내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야, 우리 언니가 이제 날 데리고 간다. 나도 이제 언니 따라 간다!

갑자기 언니가 좋아져서 착해진 나는 잔뜩 의기양양한 얼굴로 언니를 따라 나섰다. 그러나 언니를 처음으로 따라 나선 그 길은 한 시간을 꼬박 걸어야 하는 먼 길이었다. 어느 가까운 곳에서 친구들과 모여 노는 줄로 알았는데 한 시간을 걷다보니 일곱 살인 나는 다리가 아팠고, 나중엔 언니를 따라나선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진즉에 그렇게 먼 곳이라고 일러주지 않은 언니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면소재지에 들어서서 멀리 언덕 위에 뾰족지붕이 보일 때에야 비로소 언니는 저기가 교회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두 번 다시 교회라는 곳엘 오지 않으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힘들게 언니를 따라 좁은 계단을 올라간 나는 신발을 벗고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면서 난생 처음 접하는 새로운 세계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거기는 별천지였다. 우리 집에는 없던 풍금도 있고, 친구도 많고, 착한 선생님도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노래를 무지 많이 부른다는 것이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 노래들이 모두 내가 처음 들어보는 곡이라는 점이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같은 군가나 ‘낙양성 십리 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으로 시작하는 성주풀이나 내가 잘 부를 수 있는 멋진 ‘카수’들 노래는 하나도 안 부르고, ‘내 양말 빵꾸났네 빵꾸난 내 양말...’또는 ‘나는 진군하는 보병이다. 말 타는 기병이다....나는 주의 군병’같은 이상한 노래들만 불러대는 것이 못마땅했지만 풍금 반주에 맞추어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는 참 듣기 좋았다.

아저씨 한 사람이 나와서 연설을 하고는 모두 고개를 푹 수그리고 눈을 질끈 감고 뭐라고 중얼거리는 그것만 빼면 교회라는 곳과 나의 첫 만남은 상당히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다음날부터 나는 언니에게 언제 교회에 또 가느냐고 날마다 물었고, 날 꼭 데려가야 한다고 몇 번이나 다짐을 받았다. 나를 무척이나 귀찮아했던 언니도 이 일에 대해서만큼은 관대했다. 나는 또 그것이 좋아서 언니가 갑자기 착해졌다고 모두에게 떠들고 다녔다.

그렇게 해서 교회에 발을 들여놓게 된 나는 일주일 내내 교회에서 배운 노래를 연습하며 주일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여전히 일주일에 육일은 혼자 놀았지만 더는 외롭지 않았다. 그 때 풍금 반주에 맞추어 친구들과 함께 불렀던 새 노래는 내게 인생이 외롭고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내가 그동안 텔레비전을 보거나 라디오를 들으며 독학했던 노래들은 모두 잠깐의 즐거움은 있었지만 기쁘지는 않았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부르는 노래도 많았으니 오죽했으랴... 그러나 교회에서 부르는 노래의 가사들은 너무나 곱고 아름다웠다. 부르는 동안은 물론, 부르고 나서 한참이 지나도록 마음이 따뜻해졌다. 게다가 모두가 귀찮아하는 나를 예수님은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슴 벅찬 기쁨이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 있네.

목청껏 찬송을 부르면서 나는 처음으로 행복을 느꼈다. 아무나 붙잡고 소리치고 싶었다. 예수님이 날 사랑하신대요. 예수님이 날 사랑하신다구요. 나도 사랑하신대요...... 그 땐 정말 길 가의 돌맹이조차도 나와 함께 웃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행복하고 기쁜 교회를 가기 위해서는 넘어야 하는 벽이 있었다. 첫째는 교회를 정신병자들의 집단쯤으로 여기시는 아버지의 반대였고, 둘째는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동네 사람들의 야유였다. 동네 어른들은 우리를 아주 불쌍한 아이로 취급했고, 아이들 역시 우리가 지나가면 주먹을 들이밀며 “예수를 믿느니 내 주먹을 믿어라”고 소리를 질렀다.

외부에서 우리 마을로 들어오는 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읍내에서 들어오는 길이고, 또 하나는 면소재지에서 들어오는 길이다. 이 두 길은 동네의 이쪽 끝과 저쪽 끝에 있었는데 우리 집은 읍내에서 우리 동네로 들어오는 길목의 첫 집이자 외딴집이었고, 교회로 가려면 반대 방향인 면소재지로 가는 길로 방향을 잡아야 했다.

아이들은 동네 한 가운데로 난 길을 지나가는 우리를 보고 끈질기게 따라오며 놀려댔다. 나는 너무 화가 났는데 의외로 언니는 눈썹 하나 까딱 않고 묵묵히 그 길을 지나가는 것이었다. “아무 대꾸도 하지 말아라.”이것이 언니의 명령이었다. 우리 언니가 힘이 없어서, 내가 언니에게 당하듯이 그저 당하는구나 하고 여겼던 나는 한참 뒤에야 왜 침묵하라고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고, 그 후로 그것은 더 이상 고통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집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아버지는 사사건건 우리를 핍박하셨다. 내가 어릴 때 아버지에게 제일 많이 들은 말은 “씨찮은 지집아”라는 소리였다. 표준어로 번역하면 이것은 “쓸모없는 계집 아이”라는 뜻이다.

수십 년을 사업가로 살아오신 아버지는 모든 것을 경제원리로 이해하셨다. 경제성이 있느냐 없느냐, 더 노골적으로 말해 돈이 되느냐 안 되느냐가 아버지의 관심사였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면 딸은 쓸모가 없는 존재였다. 애써서 키워놓으면 혼수나 잔뜩 마련해서 남의 집에 보내야 하는 존재가 딸이니 ‘투자’의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그런 ‘무가치’한 존재들이 쓸데없이 시간과 돈을 낭비하러 교회에 간다는 것은 아버지로서는 용서하기 힘든 일이었다. 내가 언니를 따라 교회를 다니기 시작할 무렵 우리 가족 중에는 엄마와 둘째, 셋째오라버니, 둘째언니와 나 이렇게 다섯 명이 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우리 다섯 명의 공통점은 집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나머지 가족인 할머니와 아버지, 큰오라버니와 큰언니는 교회 다니는 우리를 심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잖아도 유순하다고 아버지에게 미움 받았던 엄마는 급기야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에게 작대기로 폭행을 당하기도 하셨다. 장대비가 내리던 그 해의 어느 여름날은 지금도 내게 아픔으로 다가온다.

아버지의 고함소리와 함께 마당으로 내던져진 밥상.... 흙과 뒤범벅이 된 밥과 반찬들이 깨진 그릇 사이로 빗물에 뒤섞여 떠내려갔다. 엄마는 쏟아지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아무 말 없이 그것들을 치우시곤 새로 밥상을 차리셨다. 그러나 이번에는 성경책이 마당에 내던져졌고, 나는 언니와 함께 처마 밑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꺼억 꺽 울었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심한 핍박 속에서도 우리는 아버지 몰래 교회를 다녔다. 여름성경학교가 열렸을 때는 한 시간을 걸어서 새벽기도까지 다녔다. 그 먼 길을 걸어 다니면서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고, 예배를 마친 뒤에는 다음 예배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설레는 맘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핍박하실 때마다 마음속으로 불렀던 찬양이 우리에게 힘이 되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그렇게 교회 생활을 이어간 지 삼년이 되던 해 겨울에 우리에게는 또 한 번의 폭풍이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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