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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이 세상을 밝히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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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이 아직 멸망하지 않는것은 아직도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것이다. 사회의 한구석 구석에 평생을 바쳐 헌신과 봉사로 이 사회에 빛을 가져온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들이 있기에 우린 아직 희망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기 한국의 슈바이쳐 박사 김종원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소개해본다...(아래의 내용은 한동대학교선린병원 홈페이지에서 발췌했다).


"80평생을 의료봉사 활동에 몸바쳐온 김종원 포항 선린병원 원장은 자산 410억원에 이르는 600병상 규모의 경북 최대의 종합병원인 포항선린병원을 의과대학 설립을 위해 의료 선교사를 배출하도록 한동대에 기증했다. 김종원 원장은 이북 출생으로 6.25전쟁시 월남하여 1954년도에 전쟁고아들을 위한 선린병원을 세워 의료 활동을 해온 의료인, 사회사업가, 그리고 신실한 기독교 신자이다. 김 원장은 오래전부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의료 인력의 양성을 위해 의과대학을 설립하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에서 구별된 삶을 살려는 한동대학 학생들의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아, 한동대학에 병원을 기증하게 되었다."  
(빛과 소금 98년 11월호 중에서...)





김종원 선린병원설립자  

아름다운 仁術…험한 세상의 등불되어…

[2001/12/10] 국민일보 창간 13주년 특집기사중


흔히들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대해 유쾌해지지 않는게 인지상정…하지만 고개를 돌려 뒤돌아 보면 나이를 먹는다는건 좀더 아름답게,좀더 풍요롭게 자신을 갈무리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다. 하얗게 센 머리칼과 수많은 주름살에 묻어나는 삶의 향기는 이웃에게 평화와 안식을 주는, 그리고 더 큰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넉넉한 햇살’이다. 격랑과 분노, 좌절을 뒤로하고 이순(耳順)을 지나쳐 완성으로 접어드는 길 위에 펼쳐진 노을은 뒤따르는 인생의 후배들에게 더없이 훌륭한 교과서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의사로서의 직분을 다하며 평생을 봉사와 헌신으로 가꿔온 ‘슈바이처’가 있다.

‘고아와 가난한 환자들의 아버지’로 불리며 그가 쌓아온 삶의 무게는 눈 앞의 이익만을 좇는 요즘 세대에 진정한 사표(師表)이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의사로서의 직분을 다하며 평생을 봉사와 헌신으로 가꿔온 ‘슈바이처’가 있다.

‘고아와 가난한 환자들의 아버지’로 불리며 그가 쌓아온 삶의 무게는 눈 앞의 이익만을 좇는 요즘 세대에 진정한 사표(師表)이다.

포항의 슈바이처 또는 페스탈로찌라 불리는 한동대 선린병원 김종원 협동원장(88·포항북부교회 원로장로)의 삶은 그야말로 ‘험한 세상의 다리’이다.

평안북도 강계가 고향인 김원장은 6.25 때 월남해 대구 동산의료원에서 첫 둥지를 틀었지만 함포사격으로 폐허가 된 포항에 미해군이 고아 무료진료소를 열자 선뜻 근무를 자원하고 나섰다.

“폭격으로 군데군데 팬 웅덩이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서너명의 고아들을 보자 북에 두고 떠나온 세 아들 얼굴이 겹쳐지더군요.그래서 영영 만나지도 못할 아들들 대신 고아들을 내 자식으로 생각하고 영원히 돌보기로 결심했었죠”

지난 53년 김원장은 선명회와 미해군의 지원을 약속받고 경북 포항시 북구 동빈동1가 허름한 2층 목조건물에 고아들을 위한 병원 ‘미해병 기념 소아진료소’를 열었다.진료소는 선교단체가 기증한 의료기재로 겨우 버텨 나갈 정도였지만 한명이라도 더 돌보고 싶은 욕심에 그는 전쟁고아들을 1000여명이나 받아들였다.

하지만 김원장의 ‘아름다운 욕심’은 갈수록 커졌다.

“요즘 부모들은 자기 자식만 소중한 줄 알지 남의 자식 귀한 줄은 모르는 것 같더군요.남의 자식이나 내 자식이나 다같이 귀한 생명이고,우리 사회의 기둥들인데 말입니다”

김원장은 인근의 선린애육원을 무작정 찾았다.당시 선린애육원은 120여명의 전쟁고아들을 모아 돌보는 시설이었지만 위생은 커녕 잦은 병치레를 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그는 병원일을 보는 짬짬이 애육원을 찾았고,그것도 모자라 자전거를 타고 흥해애육원과 가톨릭애육원 아이들까지 진료했다.

진료 뿐만 아니라 온갖 잡일도 마다 않던 김원장은 고아원 아이들이 겨울나기 준비로 직접 장작을 패다 왼쪽 눈으로 나무조각이 날아들어 동공을 다치기도 했다.

세자식에 쏟지 못한 사랑을 고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극복한 김원장은 차츰 청소년 장학사업,선도사업에 열성을 기울였다.

“그때 월급을 쪼개 장학금을 주며 돌봐준 아이들은 지금은 목사가 되기도 하고 KAIST에 들어가 훌륭한 과학자가 되어 찾아 오기도 합니다.그 애들을 보면 내가 헛살지는 않았구나 하는 건방진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합니다”

3년여간 운영하던 무료진료소는 56년 4월 미해병이 철수하면서 운영이 어려워지자 일반환자들을 받기 시작했다.그래도 김원장에겐 여전히 고아들이 최우선이었다.

진료소는 60년 6월 선린의원으로 이름을 바꾸고,재단이사회를 구성해 선린병원으로 새출발하면서 30병상 15실을 갖췄다.병원경영이 영리추구로 얼룩지거나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지 못하도록 처음부터 재단법인의 소유로 못박았다.

새벽 5시면 진료실로 나와 하루 600명이 넘는 환자를 돌보다 보면 어느새 한밤중인 일이 거듭됐다.어린 환자들의 울음 속에 파묻혀 하루를 꼬박 보내다 보니 김원장은 오래전부터 보청기 신세를 지고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 헌신에 지금 포항에 사는 40대이상 세대중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이고 3대가 내리 그의 진료를 받은 가정도 드물지 않다.선린병원은 고아와 환자들의 안식처일 뿐 아니라 포항 인근지역의 가난한 환자들에게 인술(仁術)의 빛을 주는 병원이 됐다.

그러나 김원장에게는 남모르는 아픔이 있다.

유일하게 함께 월남한 아들이 서울에서 입시공부를 하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경을 헤맬 때 김원장은 사고소식을 듣고도 “내 아들은 아직 숨이 붙어 있으니 나를 바라보는 환자를 두고 갈 수 없다”며 진료실을 지켰고 끝내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지 못했다.이같은 아픔 탓인지 김원장은 유독 나이 어린 환자들을 보면 눈가에 촉촉하게 이슬이 맺히곤 한다.

김원장은 경북 제일의 종합병원 원장이면서도 병원에서 준 관사 1동과 월급으로 생활한다.자가용보다는 버스를 즐겨 타는 그는 한국교회 100주년을 기념한 사회봉사상을 비롯 보사부장관상,예수교장로회 총회상,국민포장, 대통령포상,월남이상재상,포항시민상 등 숱한 상을 수상했지만 아직도 의료현장의 ‘최전방’인 병원 진료실을 떠나지 않고 있다.

이런 김원장에게는 몇해전부터 묘한 애칭이 따라다닌다.환자들과 병원 직원들 모두 그를 부를 때 ‘원장님’이라는 딱딱한 직함 대신 ‘할아버지’ 또는 ‘우리 할아버지’라고 부른다.대외적인 명성이나 자리엔 전혀 욕심 없이 의사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는 그를 존경의 뜻으로 부르는 이 애칭에는 선린병원 현관에 걸린 ‘하나님은 고치시고 우리는 봉사한다’는 글귀와 함께 김원장의 인생철학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한편 김원장은 고아들과 가난한 이들의 병을 고쳐주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청빈한 의사를 키우는 교육사업에도 관심을 쏟았다.83년 포항간호전문대를 인수해 선린대학을 세우고 의료인 양성에 심혈을 기울인 것이 그 첫번째 발걸음이였다.최근에는 40여년간 몸담아온 선린병원을 한동대에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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