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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기 있는 사람이 되라! (단 1:8, 3:18, 단 4:27, 단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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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있는 사람이 되라! (단 1:8, 3:18, 단 4:27, 단 6:10)

(다니엘 1장 8절)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다니엘 3장 18절)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다니엘 4장 27절)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

(다니엘 6장 10절)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오늘부터 3주 동안 새로운 성품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선 사람들의 성품,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성품을 가진 자들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나눌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시간으로 먼저 ‘용기’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선 사람, 하나님을 신뢰하고 겸손한 자들에게 따르는 성품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용기’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성품을 가지셨습니까?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면 패배주의와 교만의 죄악 가운데서 참다운 용기가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성품의 사람,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많은 것이 있습니다. 그 중의 용기 있는 삶을 살아간다면, 아주 훌륭한 성품의 한 단면을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얼마나 용기 있는 사람인가요? 사실 용기는 우리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위기의 순간에 빛이 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을 살며 그렇게 생명을 걸만한 위기를 얼마나 많이 경험하게 될까요? 제 생각에는 용기 있는 성품은 어느 날 한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작은 삶의 결단들을 통해 만들어지고, 그렇게 살아가다가 가장 명확한 용기를 드러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어느 날 새벽 다니엘서를 묵상하다가 그냥 피상적으로 읽던 말씀이 아니라 다니엘의 위대한 성품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을 생각할 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으나 총리가 되어 성공한 인물로 알았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처럼 그는 신앙을 지키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다가온 말씀은 정말 의미 없이 지나갔던 구절에서였습니다. 다니엘 1장 21절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 라고 되어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고레스는 바벨론이 무너지고 세워진 왕국 바사의 왕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다 보니까, 다니엘의 사건은 그를 잡아왔던 왕 느브갓네살에서 시작합니다. 그는 뜻을 정하여 하나님을 성실하게 섬기기로 하였고, 느브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하여 중용됩니다. 그리고 느브갓네살 왕의 아들이었던 벨사살이 왕이 되었을 때 또 한 번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벨사살은 방탕한 왕이었고, 그의 아버지였던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취하여온 성물들을 가지고 술을 마시며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손가락이 나타나 벽에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아무도 그 글을 해석하지 못할 때, 다니엘이 해석합니다. 

다니엘 5장 24-28절입니다. "이러므로 그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서 이 글을 기록하였나이다 기록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그 뜻을 해석하건 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그날 밤 벨사살 왕이 죽임을 당하고, 다리오가 왕이 됩니다. 그는 다니엘을 세 명의 총리 중의 하나로 삼았지만, 특별히 다니엘을 총애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시기하여 다니엘을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즉, 30일 동안 왕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절을 하지 못하도록 금령을 만든 것입니다. 그것을 어기는 자는 사자 굴에 던져서 죽도록 말입니다. 사람들은 다니엘이 매일매일 하나님을 섬기며 기도하는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사자 굴에서 구원받은 사건이 나오고, 이방 왕 다리오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니엘 6장 26-28절입니다.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하지 않으실 이시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의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이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니라 하였더라 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말이 있습니다. ‘형통’입니다. 용기 있는 자 다니엘의 성품은 그로 하여금 형통한 삶을 살게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니엘은 어떻게 이런 용기 있는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사소한 것에서부터

저는 목회를 하면 할수록 매 순간 용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주 사소한 일인 것 같지만, 우리는 매 순간 ‘편리한 일’과 ‘옳은 일’ 사이에서 고민하고 결정하게 됩니다. 이러한 고민은 나의 삶에서 열정이 식고, 나의 삶의 비전이 희미해지기 시작하면서 점점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늘 깨어있지 않으면 옳은 일을 선택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언젠가 제 목회에 대한 소신을 말했을 때, 저를 무척 사랑하는 장로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그 생각이 변치 않도록 하세요! 제가 만났던 많은 목사님이 젊을 때에 그런 말을 했는데 다 변하더라고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두려운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매일매일 사소한 일에 대하여 옳은 결정을 할 수 있는 목사가 될 수 있을까? 내가 품었던 그 열정과 꿈 때문에 지금 이 순간도 나를 쳐 복종하는가?

다니엘이라는 인물을 보면 그의 삶에 시작부터, 어쩌면 사소하게 넘어갈 수 있는 부분에서부터 용기 있는 결단을 하기 시작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니엘 1장 8절입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다니엘과 세 친구는 지금 포로로 잡혀 와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보통 포로가 아니라 이들 중에서 당시의 강대국인 관리로 선발될 기회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같은 음식이 제공됩니다. 모두 유대인이요 모두에게 같은 음식인데 굳이 안 먹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나 다니엘과 세 친구는 이방의 땅에서 뭔가 특별한 삶을 살기로 작정합니다. 많은 목사 중의 특별한 목사가 되기를, 많은 교인 중의 특별한 교인이 되기를, 세상 가운데 사는 크리스천 중의 특별한 크리스천이 되기를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다니엘을 주변의 사람들이 주목하게 되었고, 시험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니엘이 환관장에게 열흘의 말미를 요청합니다. 이 열흘 동안 왕의 음식을 먹는 사람과 자신을 비교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열흘이 지나서 그들의 얼굴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떨어지지 않음이 증명되었을 때, 그들은 자신의 용기 있는 삶을 3년이나 지속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용기 있는 하나님의 사람의 삶이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라 왕의 총애를 얻기에 이르게 됩니다. 

본문에 다니엘이 "뜻을 정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용기 있게 뜻을 정하면, 사람들의 주목을 받습니다. 그러나 용기 있는 자의 결단은 힘들기는 하지만, 실패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오늘도 우리가 아주 사소한 일, 결단해야 할 부분들에 대하여 뜻을 정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방 땅에서 온 어린 소년이 자신의 신앙을 지킨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모든 사람의 관심거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의 특별한 행동을 보면서 무언가 꼬투리를 잡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에게서 이런 순간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먹는 일 사소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면서 지켜야 하는 일들이 아주 하찮은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소함에 여러분의 용기가 필요함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 할수록 사도 바울의 마음이 이해가 됩니다.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라."라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사소한 일일지 모르지만,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이 세워지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은 순간에도 계속해서 자신의 몸을 쳐 복종하게 했습니다. 아주 작은 일에 결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말입니다.

여러분이 살면서 옳은 일인 줄 알지만, 귀찮다는 이유로, 혹은 나에게 돌아올 불이익 때문에 얼마나 편리한 결정들을 했습니까? 특히 우리에게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일들, 그것 때문에 얼마나 용기없는 결정들을 했습니까?

[육일 약국 갑시다]라는 책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신앙인이자 목회자의 아들로 커왔던 저자는 병사들이 휴가를 나갈 때마다 부대의 약을 가지고 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자신의 상관들에게 그것을 멈추게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소신은 그가 약을 가지고 갈 수 있는 위치가 되었을 때 고리를 끊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람들을 말릴 수 있는 자리에 올라갔을 때 관행을 고칠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용기 있는 여러분의 삶이 지금 이 순간에 어떤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으며, 그런 일들 때문에 여러분이 조롱거리가 되고 이상한 사람처럼 취급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편리함이 아닌 옳은 일을 위해 고리를 끊지 않으면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유학을 가던 시절, 목사들에게 미국 비자가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공부하러 들어간 목사 중의 많은 사람이 미국에 머물며 영주권을 신청하고 나오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불법 체류자들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사관에서 목사를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미국에서의 삶을 얼마나 동경했습니까? 이유가 무엇일까요? 편리함, 안락함 등이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 앞에서 우리의 약속, 옳음이라는 것이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살다 보니까 이렇게 됐습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라는 말들이 얼마나 비겁한 자들의 말입니까? 정치인들이 하는 말, "다른 사람들이 원합니다." 얼마나 한심한 말입니까? 이것은 용기없는 자들, 비겁한 자들의 말입니다. 어떤 인격도 성품도 없는 사람들의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의 삶은 순간순간 용기 있는 선택이 필요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치인, 성직자, 의사, 상인이 물에 빠지면 누구를 가장 먼저 건져내야 할까요?
답은 정치인입니다. 왜냐하면, 오래 두면 물이 오염되기 때문입니다. 
선거철이 되면 교회를 찾아오고, 절을 찾아가는 사람들을 봅니다. 용기없는 비겁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삶에 일관성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적어도 이 나라를 이끌어 가야 하는 사람이, 자신의 삶도 용기 있게 이끌어가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요?

솔직히! (Honest to God!)

다니엘이 이방 땅에서 여러 대에 걸쳐 ‘형통’한 삶을 살았던 이유는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용기 있는 삶의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그의 삶의 일관성 때문 아니었을까요? 

다니엘서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은 역시 사자 굴에서 구함을 받은 사건일 것입니다. 왕의 조서에도 그가 변치 않고 용기 있게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그에게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늘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이었기에 가능하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니엘 6장 10절입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그는 매일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은 그가 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았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뜻을 정하기로 작정한 용기, 그런데 이제는 그의 용기가 그를 지켜준 것이 아니라 용기 있는 결단으로 하나님 앞에 선 그를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니엘의 기도 중의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라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이미 다니엘은 왕을 제외하고는 최고의 지위에 올라 있는 사람입니다. 얼마든지 교만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처럼, 인생의 위기 가운데서는 기도하고 부르짖지만, 삶의 형통함이 올 때도 우리의 신앙을 유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런데 다니엘은 삶의 최고의 순간에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솔직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 오늘도 나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구나!’ 
‘아! 오늘도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용기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붙잡아 주시는구나!’
매일매일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볼 수 있었던 그였기에 용기 있게 변함없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요?

사실 우리가 시종여일한 삶을 살기가 얼마나 힘이 듭니까? 제가 신학교를 다니던 시절 「신에게 솔직히」라는 책이 무척 유행을 했습니다. 소위 신학생이 되면 우리의 신앙이 깨지기 시작합니다. 신학생이 되어서 방황이 시작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는 맹목적이고 자기중심적 열정이 하나님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공부하면서 나를 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 ‘솔직함’이 용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얼마나 우리가 가식적인 삶을 살며, 우리가 그런 대우를 당하는지 아십니까? 교회에서도 교단장을 뽑는 선거를 합니다. 선거에서 져본 사람들이 다 이야기를 합니다.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네."
후보자로 나온 사람들이 다 표 계산을 하는데 다 이긴다는 것입니다. 저는 가장 중요한 것이 약속한 것을 지키는 용기라는 소신이 있습니다. 저와 잘 아는 목사님이 선거에서 도와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약속한 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 생각에는 제가 정확하게 말해야 그분이 선거를 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부터 그분은 저의 삶에 적이 되었습니다. 어떤 선배 목사님이 저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김 목사는 아직 어려서 잘 몰라, 그런 때는 대충 넘어가는 거야. 그게 세상사는 방법이야!"
그렇습니까? 세상이 다 그렇게 가야겠습니까?

저는 이 세상을 정직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삶을,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용기 있게 고백할 수 있는 자만이 이 세상에서도 정직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고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나의 잘못을 내가 다시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내 더러운 모습이 드러난다는 것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유하기를 즐겨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기도를 하면 할수록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할 부분이 많아진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하나님을 대면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 앞에 고백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 기독교를 이해하십니까? 마르크스가 기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했습니다. 아니 오늘 이 시대의 유물론자들이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조롱합니다. ‘용기없는 자들, 연약한 자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존재들’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진짜 용기 있는 자들이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용기 있게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하고 용서를 빌 줄 아는 사람들, 그래서 그 하나님 앞에 솔직한 양심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 설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실 세상의 많은 사람이 자신을 드러내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어 놓을 용기가 없어서 신앙을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아주 멋진 정의를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입문(become)하는 데 용기가 필요하다면, 제대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be)데는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용기란 무엇일까요? 저는 성령님의 인도 하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를 인도하시며,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니, 우리의 삶을 지시하십니다. 우리 인생에 가장 두려운 것은 보이지 않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을 가리켜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지 않습니까? 믿음의 길은 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그런 놀이를 해보셨나요? 눈을 가리고 안내하는 사람의 말만 듣고 따라가 보는 것 말입니다. 앞에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도 그게 믿어져서 쉽게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던가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의 미래가 불투명한 순간에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 용기입니다. 우리는 길을 보고 걷는 사람들이 아니라 목표를 보고 걷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몇 해 전 여름 일본의 북해도에 갔을 때입니다. 안내자의 설명을 듣는데 그곳은 눈이 무척 많이 오는 지역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길 위에 길을 안내하는 화살표가 있습니다. 
겨울에 눈이 많이 오면 길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답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덮이면 모든 운전자는 길 위의 화살표 방향을 보고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길은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운전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7절입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다”

왜 우리에게 용기가 필요할까요? 때로 성령님의 인도 하심, 우리의 길을 지도하심이 무척 비합리적이고 반문화적으로 보일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 하나님은 용기 있게 우리로 하여금 시험의 광야로 몰아내시기도 합니다. 세상은 시험의 연속이요, 크리스천은 용기 있는 결단의 연속이 있어야 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는 어떻게 하면 결정적인 순간에 용기 있는 자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어렸을 때 이야기로 혹은 영화로 보고 들었던 이야기를 통해, 최후의 순간에 구명조끼를 벗어주며 홀로 남아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던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순교의 순간에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담대하게 죽어갔던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까? 
"나도 저럴 수 있다면…"

모두가 죽어가는 순간에,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을 때, 가라앉는 배에서 당당하게 "내 주를 가까이"를 연주했던 타이타닉호의 연주자들을 보면서 용기를 생각하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에 보면, 다니엘의 삶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이방인의 땅에서, 아니 이방신을 섬기는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기로 작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그 순간에 어떻게 그의 마음을 정할 수 있는 용기가 있을 수 있었을까요? 어쩌면 그의 삶의 순간순간이 하나님 앞에선 결단의 삶을 살았던 것이 아닐까요? 포로로 잡혀가던 때부터, 우상에게 드려진 음식을 거부할 수 있었던 사람, 그래서 왕국의 최고 관리가 되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 신실하기를 소원했던 그의 삶이 빛을 발하던 순간이 아니었을까요?

우리가 기억하는 아프가니스탄의 피랍사건이 있습니다. 저는 배 목사님이 살해당했다는 이야기를 아프리카에 있으면서 들었습니다. 그날 밤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그 자리에서 일행을 인도한 사람이었다면 마땅히 죽음을 맞이하는 첫 번째 선택은 내가 되어야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상상이 저를 무척 두렵게 했습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선교단원들과 내린 결론이 있었습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면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용기 있는 삶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성품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매 순간 성령님의 인도 하심을 받고, 동행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닐까요?
디모데후서 1장 7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용기 있는 성품의 사람이 되십시오.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용기 있게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매일매일 그렇게 살다 보면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용기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용기 있는 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세상을 놀라게 할 것입니다.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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