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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아는 것 (삼상 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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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것 (삼상 3:1-14)

기독교 문화권에 속해 있는 것과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도 다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다수이지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세상에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비록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는 않더라도 절대자의 존재를 믿고 절대자에게 자기의 소원을 빌고자 하는 마음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습니다. 설문조사를 하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다 인격적으로 알고 있느냐? 그건 완전히 별개의 문제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 여러분이 하나님을 잘 모른다고 가정하고,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셔야 됩니다 이런 식으로 지금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너무 진부한 얘기가 될 것이고 저의 우월함을 주장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여러분의 목회자로서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본문의 상황만을 봐도 그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본문에 나타나는 사무엘의 배경을 보면 그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은 선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선택된 민족의 믿는 부모에게 태어나서 어렸을 때부터 성전에서 자라났습니다. 그의 스승이 엘리 제사장입니다. 이보다 더 신앙적인 배경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어머니가 사무엘을 갖기 전에 벌써 하나님에게 드렸습니다. 사무엘이라는 이름 자체가 그가 어떻게 얻은 아들인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들으셔서 얻은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사무엘의 환경 전체가 신앙적이에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 7절 말씀을 보면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배경, 신앙의 문화, 신앙의 환경에 사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당신을 아는 것을 그렇게 어렵게 만들어 놓으셨느냐? 쉽게 만들어 놓았으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되지 않을까? 이것은 쉽다, 어렵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영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수영이 어려운 게 아니고 불가능하고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사람의 몸이 어떻게 물에 가라앉지 않고 뜰 수 있느냐. 수영을 못하는 사람에게는 수영이 어려운 게 아니고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자전거를 탈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자전거가 어려운 게 아니고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바퀴가 두 개밖에 없는데 어떻게 넘어지지 않고 서서 앞으로 갈 수 있다는 얘기냐. 그러나 자전거를 타본 사람은 자전거가 조금이라도 움직이기만 하면 넘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방언을 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방언이 어려운 게 아니고 불가사의한 것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자기도 모르는 언어를 입으로 할 수 있다는 얘기냐. 제 대학교 룸메이트는 방언이 사람이 자기의 신경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말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러나 방언을 해본 사람은 자기가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지만 임의로 시작할 수도 있고 임의로 멈출 수도 있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 기도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압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의 열쇠는 본문 7절에 나와 있습니다.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이것이 열쇠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어떤 방법도 이것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무엇을 보는 것도 아니고 기적을 경험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을 보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은 말씀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주기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동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타난다는 말을 주목해야 됩니다. 그 말은 우리의 노력이나 소원에 좌우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주도권을 쥐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나타나도록 해 주셔야 됩니다. 우리가 힘쓰고 애쓴다고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타나야 됩니다. 나타나도록 해주셔야 됩니다. 주도권을 하나님이 쥐고 계십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게 된 계기는 오늘 본문의 사건에서 하나님이 밤중에 사무엘을 부르시는 것을 경험함을 통해서 입니다. 예배 중에 일어난 일이 아니고 어떤 경건한 행위를 하는 중에 일어난 일이 아니고 사무엘이 전혀 기대하지 않고 밤중에 자기 자리에 누워있는 중에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귀로 들은 것인지 마음으로 들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귀로 듣는 것보다는 마음으로 듣는 것이 훨씬 더 분명합니다. 

마음으로 듣는 것은 이미 그 뜻을 우리가 압니다. 귀로 듣는 것은 귀로 듣고 해석해야 되지만 마음으로 듣는 것은 이미 감각의 장벽을 초월해서 우리의 마음에 인격적으로 다가온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훨씬 더 가깝고 훨씬 더 분명하고 훨씬 더 감동적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처음에는 누구의 음성인지 몰랐어요. 엘리 제사장이 그를 부르는 줄로 생각하고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그게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게 된 다음에 그가 말하지 않습니까.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본론으로 들어가서 그에게 하고자 하는 말씀을 하시는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단 몇 마디 말씀만을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긴 말씀을 하신 게 아니고 모든 것에 대해서 말씀하신 게 아니고 당신이 하고자 하는 몇 마디 말씀만을 사무엘에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에게는 이것은 장족의 발전을 가져온 것입니다. 마치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수영을 할 수 있는 쪽으로 건너온 것과 같은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 전과 말씀을 들은 후에는 하나님이 몇 마디 말씀을 하셨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이전에는 듣지 못했던 음성을 이제는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서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사무엘에게는 더 이상 막연하거나 애매하거나 멀리 있는 분이 아닌, 가깝고 또 확실하고 중요한 존재로 부각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하나님을 안다는 말로 규정한 것입니다. 몇 마디에 불과했어요. 그러나 그것으로 사무엘은 이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사람으로 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나타날 수 있다면 대박이겠네요. 이제부터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섭렵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그건 아닙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나님이 그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시는 것은 아니에요. 사무엘이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다든가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다든가 어떻게 하면 자기 소원을 이룰 수 있다든가 이런 것을 말씀하지 않았어요. 

본문을 보면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한 가지 일만을 말씀하셨어요. 이것은 어린 사무엘이 감히 생각할 수도 없고 그의 관심사도 아니었던 일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의 관심사는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관심사에 대하여 그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하도 아니에요.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고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에요. 아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고등수학을 아셨을 것 같지 않아요. 물리학의 원리를 아셨을 것 같지 않아요. 예수께서 러시아어를 아셨을 것 같지 않아요. 예수님이 필요한 모든 것을 아신다고 이 세상의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섭렵하신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안다고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섭렵하는 것은 아닙니다. 라디오 수신기가 있다고 세상의 모든 방송을 한꺼번에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지금 방송되고 있는 것만 들을 수가 있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만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만을 알게 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이미 장족의 발전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전에는 숨겨져 있는데 이제는 당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신 것과 같은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식투자를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로또에 당첨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자신의 영혼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보다도 더 큰 자산은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귀중한 자산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보다 더 귀중한 보배는 없습니다. 야곱이 아버지의 축복을 갈구해서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면서까지 아버지의 축복을 받았는데 그 결과로 어떤 이득을 얻었느냐. 그 결과로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았습니까? 아니에요. 아버지의 재산은 형 에서가 다 가졌습니다. 

그럼 야곱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유익이 있었다는 얘기냐. 그것은 그가 하란으로 갈 때 벧엘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심을 통하여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꿈속에 그에게 나타나셔서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차이점입니다. 에서는 아버지의 재물을 다 가졌지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는 못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의 축복은 받았지만 집을 떠나 멀리 떠나는 방랑객의 신세가 됐는데 그러나 하나님이 벧엘에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너의 조부 아브라함과 너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다 내가 네 누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영영히 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이 모든 것을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야곱의 일생에, 이건 우리 어느 누구도 일생에 한번 경험할까 말까 한 것인데 한번 하나님의 이러한 약속을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인생에 가장 귀중하고 가장 보배스러운 경험이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 계시는 것조차도 반신반의하는데 야곱에게는 하나님이 꿈속에 나타나셔서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경험이 야곱의 삶에 가장 큰 자산이 되어서 야곱은 가난할 때든 고통스러울 때든 고독할 때든 어떤 환경이든 어떤 인생의 장애물도 넉넉히 극복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다 경험할 수 있는 축복된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제가 이제껏 신앙생활을 하면서 발견하는 사실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굉장히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에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뭔가 달라도 분명히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봐도 다르고 사고방식을 들어봐도 다르고 사는 방식을 봐도 뭔가가 달라요. 

그렇다고 그들이 완벽하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완벽하냐?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본인들이 제일 먼저 그 사실을 인정할 것입니다. 나는 흠이 많은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특별한 면이 있어요. 그 이유는 종종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종종. 

제가 과거에 존경했던 목사님 중에 오랄 로버츠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이름이 아주 특이합니다. 이분이 특별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종종 그에게 나타납니다. 한 예를 들면 그분이 사모님과 식사를 하는 중에 별안간 마음속에 하나님이 말씀하기 시작하셨다고 했어요. 그래서 아내에게 ‘잠깐 기도하고 오리다.’ 하고 방에 혼자 들어가서 기도하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이건 그분이 설교 중에 말씀하신 예화입니다. 

제가 이러한 사례를 말씀드리는 이유는 정말로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운동을 하는 중 갑자기 마음속에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가 있어요. TV를 보는 중에 갑자기 우리에게 뭔가를 깨닫게 하실 때가 있어요. 책을 읽는 중에 그 책의 내용과는 연결되지 않았는데도 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마음속에 어떤 생각들이 떠올라요. 음성이 들린다는 말은 생각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좋은 생각, 신기한 생각, 믿음을 돕는 생각, 위로가 되는 생각, 도전이 되는 생각, 깨달음을 주는 생각, 힘을 주는 생각, 하나님을 느끼게 하는 생각,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돕는 생각. 이게 하나님의 말씀인줄 아는 이유가 무엇이냐? 우리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것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 우리의 영혼으로 그분을 느낄 수가 있고 영혼의 귀로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누누이 등장하는 성경구절이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신앙생활의 성공, 인생의 가장 큰 자산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은금보다도 더 귀중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더라도 내게 있는 것, 내게 있는 가장 귀한 것,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할렐루야.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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