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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빚 (롬 1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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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빚 (롬 13:8-10)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1. 얼마 전 2012년 런던 올림픽 축구 대표팀을 7회 연속 출전으로 이끈 홍명보 감독은 “자선사업은 내가 축구 감독하는 것 보다 더 오래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홍 감독은 지난 울산시 동구 현대중공업 인재교육원에서 이 회사 신입사원 300여명을 대상으로 ‘Dreams come true(꿈은 이루어진다). 꿈, 도전, 그리고 나눔!’이라는 주제로 가진 특강에서 “내게서 자선이란 아주 단순한데 축구를 통해서 많은 사랑을 준 국민에게 빚을 진 만큼 그것을 갚는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습니다. 

그는 2002 한일월드컵이 끝난 직후 월드컵 4강 진출에 따른 포상금과 각종 후원금, 광고 출연료 등을 모아 사회복지법인 홍명보장학재단을 설립, 매년 어려운 여건에서 축구하는 전국 초,중,고교 선수들에게 장학금과 축구용품을 지원했습니다. 2003년부터는 연말 축구스타가 모두 참여하는 자선축구 경기를 열어 수익금 전액을 공동모금회와 백혈병 소아암협회, 서울복지재단 등에 전달, 암 환자와 소년.소녀 가장을 도왔습니다.(서울=연합뉴스) 

<사랑의 빚은 빛입니다.>라는 채희동 목사의 글 내용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빚지지 않으며 사는 인생이 또 있을까요....오늘 저의 하루는 풀벌레, 가을 햇살, 바람과 구름, 풀과 나무, 나비와 잠자리, 아내와 이웃집 할머니에게 빚을 지며 산 ‘빚진 하루’였습니다. 저는 단 한순간도 누군가에게 빚지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빚진 존재’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빚진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지요. 빚 없는 인생은 하나도 없으니까요. 빚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 인생은 누구에게 감히 ‘빚 갚으라.’고 독촉을 할 수 없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빚진 인생이 누구에게 ‘빚 갚으라.’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사람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생명을 ‘빚진 존재’로 살아가도록 만드셨습니다. 달팽이와 풀잎, 지렁이와 흙, 나무와 바람, 산과 강, 해와 달, 이 모두는 서로에게 빚을 지며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서 빚지지 않고는 단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우리는 아주 작은 미생물에서 거대한 우주에 이르기까지, 작은 돌멩이에서 밤하늘별에 이르기까지 이 모두에게 빚을 지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갚아야 할 빚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 우리가 사랑할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이요, 아직 그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하기에 더 아름답게 살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빚진 인생이라는 걸 알고 그 빚이 남아 있음에 감사할 수 있는 인생은 행복합니다. 그에게는 아직 사랑할 힘이 남아 있다는 거니까요. 그래서 시인은 노래합니다. 나에게 빚이 남아 있다는 게 마음이 놓인다고...내가 가을 햇살을 받고 가을 산에 젖어들고 코스모스 길을 걸으며 내 마음이 맑아지고 깊어지고, 그래서 눈물 나게 고마운 것은, 저들에게 이렇게 내가 빚지며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빚은 아름다운 빚이요, 저들과 내가 마침내 하나가 되게 하는 사랑의 빚, 은총의 빚, 황홀한 빚입니다. 이 빚은 두고두고 갚아야 하고, 조금씩 갚아야 하고, 마음으로 사랑으로 갚아야 하는 빚입니다. 

시인은 마침내 노래합니다. 이제 빚은 빚이 아니라 빛이라고. 빚은 오래 두고 갚다 보면 빛이 된다는 걸. 우리가 조금이라도 가벼워질 수 있는 건 빚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걸. 빚이 빛이 되는 세상,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입니까. 남아 있는 빚에 감사하는 사람, 얼마나 멋진 사람인가요. 그래서 어머니에게 진 빚은 나의 빛이 되고, 온 우주 만물에게 내가 진 빚은 생명의 빛이 됩니다. 하늘에 진 빚은 별이 되고, 꽃과 흙과 나무에게 진 빚은 생명이 되고, 이웃에게 진 빚은 사랑이 됩니다. 이렇게 그대와 나는, 우주와 나는 빚진 존재가 되어 빛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진 빚은 모두 갚을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갚아도 갚아도 언제나 그만큼 빚은 쌓여 가고 다시 쌓입니다. 갚다가 갚다가 갚을 길 없으면 어찌해야 합니까. 우리 주 예수님은 하늘 아버지께 진 빚을 갚을 길이 없어 마른 육신 십자가에 남겨 두고 홀로 가셨습니다. 마치 아무도 봐주지 않고 손길 주지 않는 꽃 사과가 자기가 진 빚을 갚을 길 없어 ‘제 마른 육신을 남겨 두고 가는 것’처럼 주님도 우리가 진 빚을 갚아 주시기 위해 그렇게 제 육신 십자가에 매달아 놓으신 것은 아닐까요. 그러고도 못다 갚으면 제 마른 육신을 남겨 두고 가면 되지. 저기 좀 봐, 꽃 사과야. 오늘 우리는 또 우리 주님께 빚을 졌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께 진 빚을 어찌 갚으며 살 수 있을까요. 하늘에 빚진 새가 날아가듯, 빚진 눈이 조금씩 녹아 가듯, 오늘 주님께 빚진 우리는 사랑으로, 자기 몸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랑으로 살아가야 하리라. 그 빚을 갚기 위해서. 하늘에 빚진 새가 날아가고 있어 언덕에 빚진 눈이 조금씩 조금씩 녹아 가고 있어.>


2. 오늘 본문에서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는 말씀은 첫째로 성도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제적인 빚을 갚지 않고 남겨두는 빚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랑의 빚 외에”라는 말은 사랑이란 성도들이 갚아야 하는 빚이지만 ‘다 갚음’이 없는 영원한 빚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에게든지”라는 말씀은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하는 대상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의 빚을 갚아가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 이유를 예수께서 이러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18:23-35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기 종들과 회계를 하려고 하는 어떤 왕에 비길 수 있습니다. 왕이 회계를 시작하니, 1만 달란트 빚진 종 하나가 왕 앞에 끌려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자, 주인은 그 몸과 아내와 자녀들과 그 밖에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종이 엎드려서 무릎을 꿇어 ‘참아 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 며 애원했습니다. 주인은 그 종을 불쌍히 여겨, 그를 놓아 주고, 빚을 완전히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1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나, 붙들어서 멱살을 잡고 ‘내게 빚진 것을 당장 갚아라.’ 라고 말했습니다. 그 동료는 엎드려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라며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매몰차게 몰아붙여 그 동료를 감옥에 가두고, 빚진 돈을 갚을 때까지 갇혀 있게 했습니다.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딱하게 여겨서, 가서 주인에게 그 사실을 다 일렀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 종을 당장 불러다 놓고 말했습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간청하기에, 내가 네게 그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리고 주인이 노하여, 그를 형리에게 넘겨 주고,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가두어 두게 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 “(마18: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와서 “주님, 형제가 내게 죄를 지었을 때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일곱 번만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여라.”고 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은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무제한으로, 끝없이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용서의 기준은 이 지상에 현존하는 사회법에서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용서법은 ‘하나님 나라의 법’에 따른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왕은 ‘하나님’, 종들은 ‘예수 믿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될 자들’을, 그리고 ‘회계’는 하나님 앞에서 일생동안 자신들게 맡기워졌던 일들에 대해 결산하는 ‘심판의 자리’를 의미합니다.(고후5:10) 세상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기준에 따라 선악간에 행한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왕이 회계를 시작할 때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가 끌려왔다고 했습니다. 1달란트는 당시 순금 34kg에 해당되는 금액으로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인 1데나리온의 약 6000배에 상당합니다. 

그러므로 1만 달란트는 오늘날 금액으로 환산하면 10억달러 이상일 것으로 평가됩니다.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증언에 따르면 유대 전역에서 거둬들인 1년 세금이 고작 800달란트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1만 달란트는 하나님께 대해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큰 죄악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에 보면, “(마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기도가 있습니다. 이 말씀이 헬라어로는 “우리에게 빚는 자를 탕감하여 준 같이 우리의 빚도 탕감하여 주시옵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죄’를 갚아야 하는 ‘빚’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는 용서받기 전에는 죄로 남아 있습니다. 빚은 갚고 나면 더 이상 부채가 아닙니다. 자신이 지은 죄는 누구에게 전가할 수 없지만 부채는 제 삼자가 대신 갚아 줄 수도 있습니다. 죄는 죄를 낳고 부채는 부채를 낳는 악화 현상이 계속됩니다. 죄나 부채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무거워지고 증가되어 가는 것이 일반적 현상입니다. 부채를 채권자로부터 탕감받을 수 있듯이 죄도 하나님에 의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를 용서하시되 기억조차 하지 아니하십니다.(사 43:25) 하

나님께서 정하신 죄에 대한 법은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하심으로 인간의 죄값을 치루시고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은사”, 곧 값없이 주시는 선물로 영생,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엡1:7) 인간이 죄 사함을 받아 죄가 없다고 인정받는 것을 ‘의인(義認)이라고 합니다. 이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이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인간의 죄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써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렘 2:22)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으리니

일만 달란트 빚는 자가 숨어오다가 발각되어 끌려왔습니다. 그에게 왕은 그 종 자신과 아내, 그리고 자식들과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 빚을 갚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일만 달란트는 앞서 말씀드린 엄청난 금액으로 그 종이 자신을 비롯해서 가족들과 가진 모든 것을 다 처분해도 도저히 결코 갚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당시 노예 값은 기껏 많아봐야 10분의 1달란트 수준 이하였기 때문입니다. 다 갚으라는 왕의 명령에 종은 끝내 왕에게 호소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시간을 기다려 주시면 다 갚겠다고 호소했지만 이는 가능성 있는 약속이 아니라 다만 왕의 형벌을 일순간이나마 모면해보려는 임기응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왕은 이를 불쌍히 여겨 완전히 그 빚을 탕감해주었습니다. 종의 간절한 호소에 감동되기보다는 오로지 왕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그 빚을 탕감해주게 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실 때 죄인의 간청에 따르기 보다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 그야말로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단번에 죄를 완전히 탕감, 사해주신 것입니다.(롬8:33) 이같이 죄인의 죄를 완전히 사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죄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 죄 사함을 위해 그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요일4:10)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왕에게 전혀 상환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주시면 다 갚겠노라며 간청했던 것처럼, 죄인은 자신의 죄에 대해 용서를 진실히 구하는 간청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간청함도 없이 탕감해준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죄를 용서하되 죄를 회개하며 용서를 빌지도 않았는데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해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17: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3.이렇게 왕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종이 풀려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탕감의 은혜를 받은 그 감격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자신에게 1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만나자 마자 멱살을 잡고 당장에 갚으라고 호통을 칩니다. 기껏 1백 데나리온, 1달란트의 6천분의 1에 해당되는 계산할 가치조차 없는 아주 작은 소액을 당장 갚으라고 난리입니다. 단 1시간의 여유도 주지 아니하고 혹독하고도 매정하게 몰아부칩니다. 실로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한 인간의 비열한 속성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 1백 데나리온은 인간이 그 이웃에게 범한 죄의 정도를 상징하는 금액입니다. 이 종은 동료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그 간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얼마 전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왕처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그러한 완악한 마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긍휼히 여기는 마음, 은혜를 베푸는 마음, 사랑의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동료를 당장에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동료의 눈물젖은 호소를 냉혹하고 완악하게 거절했습니다. 자신이 받은 바 사랑을 떠올리며 그 사랑을 다시 이웃에게 베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 없는 철면피 인간이었습니다. “(마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신 말씀대로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없는 몰지각한 인간이었습니다. 

“(약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는 말씀대로 긍휼없는 심판을 받아 마땅히 파렴치한 인간이었습니다. 그 종이 동료에 이러한 악행을 보고 다른 동료들이 이 사실을 왕에게 알렸습니다. 이에 왕은 즉각 그 1만 달란트 탕감받았던 종을 재소환해서 “(마18:32-34) 

이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겨버렸습니다.” 형제, 이웃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받은 자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지 아니하는 사람은 “그 빚을 다 갚도록” 다시 말해 영원한 심판을 받아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성도로서 그 받은 바 은혜와 사랑, 용서와 긍휼을 베풀지 아니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그 큰 사랑과 은혜를 모독하는 것이 되어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웃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웃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 사랑할 수 없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요일 4:20-21) 

그러므로 사랑은 하나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마22:37-4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이 두 계명(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모든 율법과 예언자들의 본 뜻이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대로 그 모든 율법이 ‘사랑’에 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이 곧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입니다. 


4. 오늘 본문 말씀에서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느니라.”(마5:17-18)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웃을 사랑하므로 모든 율법을 완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간음할 수 없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살인할 수 없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도적절할 수 없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탐내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는 사랑을 단지 간음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고, 도적질하지 않고 탐내지 않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5:18-44을 보겠습니다. 

(마5:18-44)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살인은 물론 이웃 형제에 대하여 미움을 품고 노하거나 욕설을 퍼부으며 증오하는 것도 없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간음은 물론 여자를 보고서 음욕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맹세할 필요없이 옳은 것은 옳다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그 말을 누구든지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진실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누가 속옷을 가지고자 하면 겉옷까지 가지게 하고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라도 동행하고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할 때 진실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에 나셨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를 갈라디아서4:4-5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께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이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완전한 인간의 몸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람으로 오셨지만 그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의무를 가진 ‘유대인’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5:17-18)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고 하셨습니다. 그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의 진노를 짊어지셨던 것입니다.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정치인들, 기업인과 경영인들, 그리고 사회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이 사랑의 빚진 자의 마음으로 행하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죽기까지 사랑의 빚진 자의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은혜가 충만하여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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