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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구의 손을 들어주십니까? (눅 18: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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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손을 들어주십니까? (눅 18:9-14)

세상에서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세상적인 조건이 남들보다 모든 면에서 월등히 나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인생의 지혜자 중의 한 사람인 솔로몬이 쓴 전도서를 보면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전 9:11)고 합니다. 

자기 앞에 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은 사람, 주어진 환경에서 필요한 지혜를 얻고 활용한 사람들이 승리했습니다. 신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결국은 승리합니다. 사무엘하를 보면 다윗에 대하여 반복되어 나오는 표현이 있습니다.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8:6, 18:6) 

궁극적으로 우리의 인생의 성공여부는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들어주시는 가에 달렸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잘 나가던 사람, 세상에 많은 공헌을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모르겠다고 하신다면 얼마나 아찔합니까? 그때에는 돌이킬 기회도 없습니다. 그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려면 믿음의 현재에서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8장은 말세를 사는 성도들의 신앙자세에 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조적입니다. 한쪽은 재판관, 관원, 바리새인, 어른들로 대변되는 사회적, 종교적 강자들입니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과부, 세리, 어린아이들, 장애인들로 대변되는 약자들입니다. 

그런데 힘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서는 우선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러한 역전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주관자와 심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역전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고난과 죽음은 실패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자들로 판단 받던 자들이 하나님의 받아주심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새 주역들로 지금도 계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물과 기름 같이 도저히 섞일 수 있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한쪽에는 당대에 가장 경건한 부류로 인정받던 바리새인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죄인의 부류에 속하는 세리가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팔레스타인 지방에 사는 유대인들로서 가장 경건한 무리들로 인정이 되었는데 예수님 당시에 약 6000명가량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대하여 많이 알았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고 애썼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민족적인 자부심이 강하였고, 종교지도자로서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세리들은 어떠합니까? 로마 정부에서 따로 월급을 주지 않으니 과도하게 세금을 징수함으로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바리새인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행위에 자부심이 있고 자기 잣대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였습니다. 그들 보기에는 자기 그룹을 제외하고는 전부 엉터리요 죄인처럼 보였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바리새인이 멸시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더구나 그들이 지금 기도하는 곳은 바리새인에게는 홈그라운드 같은 성전입니다. 그들은 개인적인 의의 행위 뿐 아니라 성전을 향한 열심이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그가 자신의 의의 항목으로 열거하는 것 중의 하나인 십일조는 바로 성전의 유지를 위하여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성전에서 가장 떳떳함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바리새인입니다. 반면에 세리는 로마 정부를 위해 돈을 거두는 사람으로 어떤 면에서 성전을 허는 자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사람들이 동시에 기도한다면 하나님께서 누구의 기도를 들을 것인지 사람들의 평가와 기대는 이미 정하여 진 것입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는데 한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었으나 다른 한 사람의 기도는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두 사람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살펴보며 우리 각자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경건한 예배자요 주님의 제자들이 되고자 합니다.

자신을 높이는 사람(11-12절)

너무 self-esteem 이 낮으면 매사에 자신이 없고 의욕이 없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줄 몰라. 나는 아는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특별한 재주도 없다고 합니다. 자신의 강점이나 장점을 보지 못하고 문제점만 보고 낙심하거나 자학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주어진 환경에서 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찾아보면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반면에 self-esteem이 너무 높아도 문제입니다. 공주병, 왕자병. 되지 못한 상태에서 된 것처럼 주제 파악을 못하는 경우. 바리새인이 그렇습니다. 그의 기도 자세를 보면 ‘서서 따로 기도하여’입니다. 헬라 원어에는 따로 기도한다는 말이 없고 ‘자기 자신에게 기도한다’(pray to himself) 또는 ‘자신에 대하여 기도한다’(pray about himself)로 되어 있습니다. 그가 기도하는 목적은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며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의 경건의 모양을 자랑하며 인정을 받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드리는 기도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1)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은 것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내가 사기꾼, 불의를 하는 사람, 간음하는 사람이 아닌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현재 받은 복을 인하여 감사하면 되는데 공연히 다른 사람을 끌어 들여 비교하면서 자신의 의를 드러냅니다. 이렇게 기도하며 바리새인은 아마 내심 흐뭇하였을 것이요, 미소까지 머금었을 것입니다. 그는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의로움을 과시할 뿐 아니라 자기 옆에 있는 세리에게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이런 바리새인의 태도가 자칫하면 신앙생활을 오래한 사람들에게 나타나기 쉽습니다. 자기와 같지 않음을 인하여, 혹은 상대방이 자기가 기대한 만큼 해주지 못할 때 공연히 화를 내거나 멸시합니다.

2) 자기가 한 것을 인하여 자랑합니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금식을 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레 16:29, "칠월 십일 즉 대속죄일에 스스로 괴롭게 하라“ 일 년에 한차례 금식을 권고합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일 년에 네 차례 금식하더니 나중에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경건한 유대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 즉 월요일과 목요일에 온종일 금식합니다. 

자기들의 수입의 십분의 일은 철저히 따져 드리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주님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바리새인들은 수입의 세세한 부분까지 철저히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십일조는 마땅히 드리되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 자비, 신실함도 실천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13절)

그런데 바리새인과 함께 성전에 들어온 세리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1) 멀리 서서 

제가 공부할 때에 연구한 내용이 많거나 새로운 것이 있으면 지도교수를 더 만나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연구내용이 시원찮거나 해 놓은 것이 별로 없으면 무슨 핑계를 대어서라도 지도교수를 만나지 않으려 했습니다. 아담이 범죄 한 후에 하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고 아담이 두려워 피하였을 때 하나님이 먼저 찾으십니다. 전에는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하던 그들이었으나 죄를 짓고 난 후에는 오히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리도 멀찌감치 서 있습니다. 

2)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집에서 아이들이 그릇을 깨던지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 때 엄마와 시선을 맞추지 않으려고 합니다. 세리도 죄를 인하여 하나님을 볼 면목이 없으니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 못합니다. 

3) 다만 가슴을 치며 

자기의 죄악됨을 아는 지라 하나님께 드릴 말이 없습니다. 그저 가슴을 치며 애통해 할 뿐입니다. 

4)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베드로가 밤새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려다 실패하였습니다. 날이 밝자 그물을 씻어 정리했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4).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히자 순간 베드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며 자기의 부족함을 깨닫게 됩니다.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하였습니다. 세리도 자기의 문제가 무엇인지 하나님 앞에 어떤 죄를 범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5) 하나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세리는 하나님 앞에 내세울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의 간구는 죄인인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뿐입니다. 그가 구할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덮으심으로 그 진노를 옮기시는 것뿐입니다. 바리새인이 자신을 향하여 (따로) 기도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세리는 오직 하나님의 처분에 자신을 맡기는 것 외에는 달리 아무것도 주장하지 못합니다. 바리새인은 스스로 만족해하며 자신의 의를 나열하지만 세리는 그 통회하는 마음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판단 기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4절)

바리새인은 스스로를 구별하여 높은 사람이라고 착각하며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목이 곧은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머리를 숙이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성전에 와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도 고개를 들고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에는 회개하는 내용은 전혀 없으며 오직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내용만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죄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죄는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의식한 위선적인 기도를 드립니다. 

세리는 바리새인과 대조적인 기도를 합니다. 그는 스스로를 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언제나 낮추고 다녔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할 때도 그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항상 자신은 죄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도할 때에도 오직 회개하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그가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그의 겸손을 나타냅니다. 단순히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합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알고 있었기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판정은 사람의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줍니다.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더 의롭다 함을 받고 집으로 갔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바리새인은 세리가 굉장한 죄인으로 생각했는데 오히려 세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말입니다. 이 비유의 하이라이트는 사람들의 기대를 뒤엎는 예수님의 판정의 말씀에 있습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스스로를 낮추는 자를 하나님이 높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앞에 마음을 쏟아놓는 세리와 같은 죄인의 편에 기꺼이 서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느끼는 자, 그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어떤 자세로 신앙생활을 해야 할까 생각해봅니다. 어떤 교우들로 이루어진 교회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참 교회일까요?

1)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 애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애통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죄를 깨달음에서 오는 회개와 안타까워하는 마음, 양심의 가책과 더불어 극한 슬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상실감, 자신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마음 등을 가리킵니다. 영적으로 가난한 것 즉 자기의 부족함을 깨닫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마음 아파하고 애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것도 중요하나 그 죄에 대하여 가슴을 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어떠한 가식이나 눈치 보는 것 없이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선 자세를 가지며 우리의 마음을 비울 때 그 속에 하나님의 위로가 임합니다. 자신의 부족과 허물을 깨달은 자만이 진정으로 애통할 수 있습니다. 눈물을 흘려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런 자들이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사 57:15,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비록 죄를 지었으나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사 그들의 영혼을 새롭게 하십니다. 

성도들이 모인 곳에는 항상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에, 목장모임에, 성경공부에 모일 때마다 그 속에 웃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와 함께 필요한 것이 진정한 애통입니다. 세리는 진지하게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애통하며 하나님께 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하며 자기의 흐트러진 신앙생활을 주님 앞에 회개하였습니다. 살면서 슬픈 일이나 어려운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근심과 애통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입니다. 자신에게는 구원을 받을만한 아무런 의가 없음을 깨닫고 자기의 모습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대로 살지 못함을 인하여 안타까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를 주님 앞에 놓고 통회하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혼자 하기 힘들면 성도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회개의 기도를 드리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주님께 하소연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는 자기를 높이고 자랑하는 의가 아니라 겸손히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주의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늘 부족한 자임을 고백하고 주의 은혜와 자비에서만 살 수 있다고 믿고 자기를 낮추고 주님을 따르기를 원하는 자를 의롭다 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깊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 잠잠해야 합니다

합 2:20,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애통하는 자는 잠잠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고 어떻게 하면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 수 있을지 생각해보는 귀한 사순절에 너무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보다 사람들과 더 많은 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의 형제자매들을 판단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마음에 품은 모든 생각을 아시는 하나님, 우리 입술의 말을 다 들으시는 하나님 앞에 지금은 잠잠할 때입니다. 

지금은 세리와 같은 심정으로 통회하고 자복할 때입니다. 주님의 귀가 누구에게 열려져 있는지 우리는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또한 주님의 의의 판정이 누구에게 내려지고 있는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즉 바리새인의 교만과 세리의 겸손이 대조를 이룹니다. 이제 교회는 세상의 뒤를 좇느라 심히 어두워진 그 눈을 하나님 나라의 빛 안에서 바르게 뜨고 주님이 원하시는 제자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길이며 또한 세상을 하나님나라의 빛으로 비출 수 있는 길입니다. 세상은 그 빛을 지금 간절히 원하고 있기 때문에 믿는 자들을 세상의 빛이라 부르셨습니다. 

- 기도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세리의 기도를 담고 있는 이 비유는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적대자들인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왜 실패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마음 자세와 기도가 과연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비유에 묘사된 바리새인의 선한 행동은 그 자체가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하며 절제했던 사람입니다. 문제는 그의 행동이 자신을 ‘의롭다’고 높이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만나기에는 지나치게 스스로 의로웠고, 다른 사람과 함께 하기에는 지나치게 거룩했습니다. 그의 기도에는 전혀 회개가 없고 하나님께 대한 간구도 없습니다. 자기 자랑 일색일 뿐 하나님께 대한 찬양은 한마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한 일도 없으시고 앞으로도 할 일이 없으신 분으로 전락합니다. 그러한 행동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반면에 세리가 가슴을 치며 한말이라고는 고작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밖에는 없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낮춘 세리의 기도가 자신을 높인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더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가슴 치며 드리는 상하고 통회하는 기도를 기다리십니다. 

2) 주님의 시선으로 형제자매를 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8장 속에 기록된 이야기들이 오늘의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칩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이기는가 하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그 은혜와 사랑, 그리고 구원의 능력 면에서 크고 놀라운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제대로 알고 믿을 때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 자신만을 전적으로 의존하여 나아갈 수 있게 되고, 삶의 현장에서 놀라운 역전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 가운데 있는 하나님나라의 비밀입니다. 때로 그것은 가장 약하고 미미한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미미하고 보잘것없는 것들을 통해 그 나라를 이루어 가신다는 점입니다. 오늘날의 교회가 자기 의를 내세우는 바리새인의 교회와 같이 되어버린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은혜가 그런 곳에서는 빛을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리와 같은 자들, 멸시받는 죄 많은 여인 같은 자들, 사회적인 약자들인 과부나 장애인들이 자신의 고향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찾아올 때 따뜻하게 영접해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이 새 삶의 용기와 희망을 얻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차가운 정죄의 눈초리, 귀찮아하는 표정들,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방황하는 자들을 품지 못하는 분위기, 온갖 뒷말들. 이런 것들로 인해 교회는 하나님을 꼭 만나야 할 사람들을 도리어 멀어지게 하는 죄를 쌓지는 않습니까? 교회가 세상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난 주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어요. 난 주님밖에는 달리 찾아갈 사람이 없습니다. 나의 도움은 오직 주님께만 있습니다”하고 고백하는 사람들만이 모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을 구하며 주님 안에 머무르려 하는 열망이 가득한 곳이 참 교회의 모습입니다. 

내가 과거에 무슨 일을 하였고 현재 어떤 신분에 있는 것이 하나님께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믿음의 사람인지가 더 중요합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바리새인은 형제의 눈 속에 티끌은 보면서 자기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자입니다. 

우리 각자가 깨어 있고 주님의 마음을 갖지 않으면 누구든지 바리새인처럼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의 경험이나 기준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심지어 한 마디씩 가시 돋친 말을 던져 마음에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교만함을 인하여 주님의 책망을 받게 됩니다. 반면에 세리는 자기의 부족, 한계, 죄악됨을 아는 자입니다. 세리와 같이 하나님께서 높이시는 자는 이길 수 없습니다. 

누가 의인이요 누가 죄인인가? 이 시간 주님이 우리에게 던지시는 질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행위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죄인임을 고백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아버지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믿음의 주시요 온전케 하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며 우리의 부족하거나 깨어지지 못한 것을 인하여 마음 아파하며 통회 자복하는 가운데 다시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되고 새로이 부어주시는 지혜와 능력을 인하여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는 사순절을 맞이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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