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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을 따르는 좋은 일꾼이 됩시다 (막 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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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따르는 좋은 일꾼이 됩시다 (막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한 왕이 찾아오자 온 마을은 기쁨으로 들떴습니다. 마을 사람은 모조리 왕의 주위로 몰려들었습니다. 이윽고 왕께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이곳을 찾아온 것은 제자 열 사람을 선발하기 위함이다. 내게 합당한 제자가 되려면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 할 것 없이 모든 것을 다 떨쳐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내 너희에게 엄숙히 언약하거니와 나의 제자가 되어 나를 섬기는 사람은 그가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내 성으로 불러들여 제왕처럼 살게 해 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너나 없이 열광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왕의 제자가 되겠노라고 자원하고 나섰습니다. 왕은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열 명을 골라 내느라 하루를 보냈습니다. 선발되지 못한 사람들은 슬픔에 젖고 풀이 죽었습니다. 제자로 선발된 이들은 즉시 왕을 따라 항구로 향했습니다. 그곳에는 그들을 왕의 고장으로 데려다 줄 배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발된 이들 가운데 요밥이라는 사람이 왕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전하, 잠시 마을에 다녀와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애인에게 작별 인사하는 것을 깜빡 잊었지 뭡니까. 금방 갔다오겠습니다."

요밥은 이렇게 말한 다음 왕의 대답을 들을 틈도 없이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는 마을에 당도하여 연인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잠깐 머무르며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잽싸게 발걸음을 놀려 항구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항구에 당도한 요밥은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배는 이미 항구를 떠나 바다 한가운데를 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주변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해하는 관점은 매우 다양했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을 제자들로부터 들으신 예수님은 너희들은 나를 어떻게 보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수제자인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베드로로부터 신앙 고백을 들으신 주님은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음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막 8:31)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막 8:32-33)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단호한 반응은 자신이 선언(31절)한 고난의 길이 결코 수정될 수 없음을 확실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미 이 선언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시작 전 사탄에게 시험받으실 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 4: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자신의 제자를 사탄이라고까지 하심은 베드로 자체가 사탄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탄의 도구로 전락한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사탄이 베드로를 이용해 예수의 메시아로서의 거룩한 행진을 방해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 13:2)하신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꾸짖음은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앞세웠기 때문입니다(33절).
하나님의 일이란, 고난이 수반되는 포기와 죽음의 길입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반면에 사람의 일이란, 고난과 포기와 죽음을 두려워하며 안일과 편안함을 추구하며 현실에 안주하는 일, 그리고 십자가보다는 세상의 인기와 명예를 택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마음이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일치되고 있지 않음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바른 자세는 자신을 포기하여 기꺼이 고난의 자리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그리스도인의 길을 걷고 있는가요?
단순한 안정을 추구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는가요?
엘리트적인 종교생활을 위함인가요?
주님께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의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의 그 길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요?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십니다(34절).

주님의 뒤를 따르고 그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자들이 지녀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자기 부인'입니다.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며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는 '자기 부인'이 없이는 참된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지혜로운 종이 상전의 뜻을 잘 알고 그의 뜻대로 일을 처리하듯이, 효자가 자신의 뜻이나 고집을 꺾고 부모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듯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그리스도의 뜻에 의해 자신을 과감히 버리는 자인 것입니다.

설령 성경이 나의 이성에 맞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이치에 맞지 않게 보이며, 하나님의 뜻이 전혀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뜻이라면, 성경의 가르침이라면 과감히 자신의 뜻과 생각을 포기하는 것, 이것이 온전한 주님을 따르는 자 된 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자 된 우리는 먼저 우리의 고집을 꺾어야합니다.
자신의 자존심이나 체면보다도 하나님의 뜻과 교회의 유익을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지혜와 생각만이 최고의 선이라는 아집과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이 아무리 좋아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불완전한 인생의 계획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의 모든 생각과 계획, 판단의 기준을 하나님의 뜻에 모으는 것, 이것이 참된 주님을 따르는 자의 기본자세인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단순히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의 삶, 자신의 자아가 중심이 되는 삶을 완전히 포기함을 뜻합니다. 이는 이전의 자기의 삶을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사는 삶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길에 동참하기 전에 자신에 대한 집착과 안일함, 이기심과 자기 자랑을 모두 포기해야 합니다. 나의 삶의 원칙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위대한 화가 티티안은 예술의 재능을 가진 한 젊은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젊은 군인에게 군대생활을 포기하고 그의 재능을 그림에 바칠 것을 종용하자 그 젊은이는 실행했고 야심적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오랫동안 일을 했으나 그의 재능의 한계점을 느끼게 되는 지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절망가운데 그는 그의 붓을 집어던졌습니다. 티티안은 절망 중에 울고 있는 그를 발견했습니다. 그 탁월한 예술가는 그 이유를 묻지 않고 화실로 가서 그 그림을 쳐다보았을 때, 그 청년이 한계에 도달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티티안은 그 붓을 집어들고 미완성의 그 그림을 심혈을 기울여 완성시켰습니다. 그 다음날, 그 젊은이는 이제 더 이상 미술을 하지 않으리라고 티티안에게 말하려고 화실로 왔습니다. 그런데, 화실 입구에 완성된 자기의 그림이 걸려 있는게 아닌가요! 그는 그가 실패한 그것을 그의 스승인 티티안이 완성시켰음을 알았습니다.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그는 고백했습니다. "나는 미술을 포기할 수 없다. 나는 티티안을 위해 계속 하겠다. 그는 나를 위해 많은 것을 해 주었으므로 나는 내 자신을 잊어버리고 그를 위해 살겠다. 이제 그의 명예가 곧 나의 명예이다! 그가 나를 위해 최선을 다했으므로 나도 그를 위해 최선을 다 하겠다." 그래서 오늘날 그의 그림은 세계의 화랑에 티티안의 그림과 함께 나란히 걸려있다합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눅 22:42) 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신 주님의 뜻을 따라 우리도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철저히 부인하며 주님을 따르는 좋은 일꾼들이 됩시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34절).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직접 짊어진다는 것을 말함으로 주님 말씀 하신 그 고난의 삶이 나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자기 포기의 고난의 삶을 지속해서 행할 것을 당부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되기 위해 어떤 어려움과 시련 가운데에서도 끊임없이 따를 것을 요구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아직도 나를 메시아로 생각하고 따르기를 희망하느냐? 그렇다면 나를 따름으로 너희가 갈 곳이 어디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씀드려 고난의 삶을 동행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된다는 것은 나의 유익과 안정을 위한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사회에서 뛰어난 사람을 따르는 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앞날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비전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과 반대되는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길을 선택한 이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주를 향해 따라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야만 합니다.(빌 2:8)
또한 자신을 죄와 세상적인 모든 것에 대하여는 온전히 죽은 자로 여겨야 합니다.(골 2:20)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살아가는 자로 여겨야 합니다.

(롬 6:10-11)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주님을 따르는 자의 길은 영광만이 존재하는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은 십자가라는 고통과 환난이 존재하는 험난한 길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당하는 멸시와 조롱,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당하는 환난과 여러 가지 불이익, 모든 세상의 즐거움을 끊음으로 오는 내적 갈등 등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는 자만이 완전히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인류를 죄에서 구하시기 위한 대속의 십자가를 지셔야 했듯이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도 감당해야 될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에는 굶주림과 멸시, 그리고 핍박과 심지어는 죽음이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예수를 따르기로 작정한 자들은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가야만 합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셨던 주님처럼 그를 따르는 우리의 생애 전체가 고통의 연속이라 하더라도 져야 합니다. 
십자가 지되 '그 은혜가 내게 족한 줄로 알아'(고후 12:9) 감사함으로 져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히 12:2) 앉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며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을 기뻐해야 합니다.

(마 5:11-12)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십자가를 벗어버리는 것은 곧 사명의 회피를 뜻하는 것이며, 사명을 회피하는 자는 온전한 일꾼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골교회 장로님이 교회를 혼자서 섬기기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옛날에는 그런 교회가 많았지요. 목회자가 없어서 교회 살림도 혼자 해야 하고, 설교, 심방까지도 해야하는, ...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도시로 가서 쉽게 신앙생활을 하기로 마음먹고, 모든 재산을 정리해서 이제 내일 떠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밤이 되어 자는데 재산을 정리한 돈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혹시나 도둑맞지나 않을까 두려운 나머지, 돈을 숨겨야 하겠다고 생각해서 짚단 속에다 넣어 마루 밑에 숨겨놓았습니다. 그런데 자다보니, 추워요. 그래서 부인이 나가서 방에 불을 땝니다. 불을 때는데, 나무가 좀 모자라 이리 저리 둘러보니, 마루 밑에 짚단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짚단을 갖다가 불을 땠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난리가 났습니다. 마루 밑에 넣어둔 짚단과 돈이 없어졌습니다. 부인에게 물어보니, 지난밤에 짚단을 다 불 땠다는 것입니다. 결국 장로님은 이사를 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십자가를 피해 도망가려고 했던 잘못을 회개하고 교회를 열심히 섬겨서 존경받는 장로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십자가를 회피하지 말라. 십자가를 피해서 다른 곳으로 가면 그 곳에는 더 무거운 십자가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십자가를 달게 지면 그 십자가가 너의 원하는 곳으로 인도하여 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주님을 따르는 좋은 일꾼들이 됩시다. 

  
주님을 따르라고 하십니다(34절).

주님을 따르는 길은 주님의 인품을 닮고, 그의 지혜를 배우며 그의 삶을 뒤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길이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그의 생의 자취를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라면 그리스도께서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고 그리스도가 행동하는 대로 행동하며 그리스도께서 말하신 대로 말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그리스도만을 우리의 생의 최고선으로 모시고 그를 우리의 가치 기준으로 삼은 채 최선을 다해 그의 뒤를 따르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자는 잠시도 한눈을 팔거나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오직 주님의 모습만 바라보며,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인내하며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 하신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지라고 하신 의미를 바로 알고 따라야 합니다,

1993년에 9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마리안 앤더슨(Marian Anderson. 1897∼1993)이란 흑인가수는 세계적인 지휘자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로부터 '100년에 한 명 나온다'는 극찬을 받았던 흑인 역사상 최고 알토 가수였습다합니다. 그 마리안 앤더슨이 불러서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흑인영가 가운데 하나가 오늘 우리가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라고 합니다. 

이 찬송은 세계적인 가수가 불렀기 때문에 감동을 준 것이 아니라, 그 가사가 노래를 불렀던 마리안 앤더슨의 생애를 그대로 고백한 것이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녀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가난한 흑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3살 때에 이미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게 되었고, 6살 되었을 때에는 교회 찬양대에 들어가서 본격적인 음악 수업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음악학교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가난하기도 했지만, 그녀의 재능을 인정한 교회 성도들이 돈을 모아 음악공부를 할 수 있게 후원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단 한 번도 음악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 때문이었습니다. 

그녀가 유명해진 것은 28세 때 있었던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자 공개 모집이었는데, 여기서 그녀가 300여 명의 지원자 가운데서 최후의 한 명으로 뽑히면서였습니다. 그러나 유명해진 그녀였지만, 그때부터 그녀의 행로는 결코 승승장구가 아니었습니다. 인종 차별과 처절하게 싸워야 하는 가시밭길의 연속이었습니다. 호텔이나 식당, 공연장 등에서는 여전히 흑인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하는 일이 부지기수였습니다. 

공연을 하기로 예약되어 있던 공연장에서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공연취소 통보를 받아야 했고, 호텔에 투숙하려다가 거부당하는 일도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식당에서조차 출입을 금지 당해 식사를 하지 못한 채 공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처절한 인종 학대 속에서도 그녀는 꿋꿋하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백악관에서 루즈벨트 대통령 부처와 영국 여왕을 위한 독창회를 가질 정도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독창회가 끝났을 때 기자들이 그녀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의 생애에서 가장 기뻤던 날이 언제였습니까?" 당연히 사람들은 '루즈벨트 대통령 부부와 영국 여왕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독창회를 가졌던 오늘'이라고 대답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생애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어머니에게 더 이상 남의 집 빨래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리던 그 날이었습니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게 되었을 때가 가장 기뻤다는 것입니다.

그런 비참했던 가난과 가혹했던 인종차별의 아픔을 겪었던 그녀였기에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 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라고 찬송을 뜨거운 가슴으로 부를 수 있었고 그러한 찬양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참으로 따르는 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는 이제 주님의 교훈을 따라 살고. 주님의 삶을 본받아 따라가야 가며 주님의 삶을 우리의 삶에 적용시켜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구원하리라고 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고 합니다.
   
인간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한 것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6)고 합니다.
세상에 자기 목숨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너무도 잘 압니다. 그러나 너무도 잘 앎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잘 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을 위하고 이웃의 생명을 위하는 일보다는 재물, 권세, 명예 등을 얻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리고 시간을 투자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물론 자기 생명의 소중함까지도 잊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기 위해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귀한 것입니다. 그것은 불멸합니다. 주님의 부활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한 사건입니다. 주님 안에는 죽음이란 없습니다. 그는 죽음의 권세를 깨뜨린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의 길은 희생의 길입니다. 헌신의 길이며 드림의 길입니다. 시간을 드리고 정성을 드리며, 사랑을 드리고 몸을 드리는 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의 길로 들어선 순간 이미 자신의 생명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 되며 주님이 원하시면 언제든지 드려야 합니다. 가장 소중한 목숨까지도 말입니다.

온전한 헌신을 원하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는 헌신의 길이 곧 주님을 따르는 온전한 자가 되는 길인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끊임없이 따라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그 나라를 위해, 이웃을 위해 버려야 합니다. 그러할 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약속입니다.
   
이러한 주님을 위해 죽는 것은 곧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이 땅에서의 고통이며, 유한하고 잠깐 동안의 고통입니다. 그리고 그 끝은 영광의 면류관이며 승리의 기쁨입니다.

현재는 그를 좇는 일이 괴롭고 힘들다 하더라도 그 길에서 돌이키지 말고 오직 마음을 다하여 주를 가까이 따른다면 주께서는 그의 오른손으로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시 63:8)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또한 어두움에 다니지 않게 하실 것이며, 생명의 빛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요 8:12)
그리고 선한 싸움을 마치고 달려갈 길을 마친 후에는 의의 면류관을 얻게 하실 것입니다.

(딤후 4:7-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도니라

우리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 살아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주님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면 구원을 받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대로 묵상하며 실천천하고 또한 부흥 집회에 참석하며 주님을 따르는 좋은 일꾼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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