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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 때문에 (삼상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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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때문에 (삼상 2:1-11)
  

이런 글이 있습니다.

“살아온 삶, 그 어느 하루라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살아온 삶의/ 단 하루 지우고 싶은 날은 없습니다. 아무리 아픈 날이었다 해도/ 지우고 싶은 날은 없습니다.  그 아픔 있었기에/ 지금 아파하는 사람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며/ 그 아픔 있었기에/ 아픔을 호소하는 사람에게/ 희망을 이야기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살아온 모든 날/ 그 어지러웠던 날들도/ 단 하루 소중하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누가 혹시 아픔과 슬픔 속에/ 고통을 잊으려 한다면/ 지우개 하나 드릴 수 있지만/ 고통의 날을 지우려 한다면/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고통의 날이/ 얼마나 소중한 날이었는지 아시게 될 거예요./ 지나고 나면/ 그래서 제가 지우개를 드린 걸/ 원망하게 될 거예요.   가만히 지난날을 생각해보면/ 모든 일이 소중한 것처럼/ 가만히 지나간 날을 생각해보면/ 모든 날 중 단 하루도/ 지우고 싶은 날이 없습니다.  지금 또한 소중한 날들 중의 하나가/ 또 지나가고 또 시작 되고 있음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 감사한 일과 감사한 날들만/ 우리 생의 달력에 빼곡히 남게 됩니다.” 

본문에 나오는 ‘한나’라는 여인의 삶도 시련의 날들이 많았지만 뒤돌아보면 그 날들조차 지우고 싶지 않는 소중한 날이었음을 우리에게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한나’는 두 종류의 고통을 안고 사는 여인이었습니다.

① 아들이 없다는 정신적인 고통입니다.

삼상 1:6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그의 적수인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한나는 아이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와 천대를 받습니다. 
엘가나의 둘째 아내였던 젊은 브닌나의 빈정거림을 상상해보십시오?

② ‘혹시 하나님이 나를 돌보지 않는 것이 아닌가?’라는 영적인 고통입니다.

삼상 1:11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이 기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임신하지 못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저버림을 받았다는 영적인 고통을 한나가 가슴에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외면하는 여인! 하나님이 모른 체 하는 여인! 하나님이 돌보지 않는 여인이 받는 영적인 고통을 우리가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이중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한나는 하나님에 의해서 그 문제를 해결 받습니다. 
그래서 그는 놀라움과 감격으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그가 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 속에서 한나가 만났던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는지, 그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삶은 얼마나 신나는 것인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구절들을 통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삼상2:1절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1절에 보면 ‘여호와로 말미암아’라는 말이 세 번에 걸쳐 나옵니다. 
한나는 먹는 것조차 의미 없을 정도로 깊은 슬픔에 빠졌었는데 하나님 때문에 즐거움을 얻었습니다.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천대와 멸시를 받았었는데 하나님 때문에 그 뿔이 높아졌습니다. 
성경에서 ‘뿔’이란 명예와 권위를 상징합니다. 
그 뿔이 높아졌다는 것은 권위가 높아져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대우받고 존경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한나는 하나님 때문에 조롱하고, 비웃고, 무시하던 원수들을 향하여 그의 입이 크게 열었습니다. 

좋아서 싱글벙글하면 우리는 뭐라고 말하지요? 
‘입이 찢어지는구나!’ 
입이 크게 열었다는 말은 바로 좋아서 입이 찢어지는 모양을 말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엄청난 삶의 변화가 왔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팔자를 고쳤습니다. 
여러분, 성경 말씀은 바로 이 하나님 때문에 경험했던 삶의 변화에 대한 고백들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하나님을 여러분의 삶에 더하기 하십시오! 
십자가는 더하기 표시입니다. 
잘 보세요. 
더하기 아닙니까? 
우리의 능력이, 우리의 경험이, 우리의 재력이 대단한 것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이 더 하기 하니까 놀라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어려운 일들이 부딪힐 때 더하기 표시인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지혜를,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의 사랑을 더하기 해 주십시오. 저는 그 결과를 기다리겠습니다.” 
2+3은 5입니다. 
그러나 2+하나님은 5천이 될지 5만이 될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삼상 17장에는 블레셋의 골리앗 장군과 소년 다윗과의 싸움이 나옵니다. 
여러분, 골리앗이 어떤 사람인줄 아시지요? 
구척장신이고 호령 한마디에 이스라엘 군대가 벌벌 떠는 장군이 아닙니까? 
참 의미 있는 말씀은, 삼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는 구절입니다. 

골리앗이 가진 것은 칼과 창과 단창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인간에게서 나온 것으로 지식, 노하우, 경험, 인간관계 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가진 것은 여호와의 이름,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누가 이겼습니까? 
누가 정말 강하고 무서웠습니까? 
하나님을 더하기 한 사람이 아닙니까! 
한나의 기도는 그것이 진리라고 증거 합니다.

2. 하나님만이 내 만족이 됩니다.

삼상2:2절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몰랐는데 그분을 만난 후 주님 같은 좋은 분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기 전에는 몰랐는데 그 사랑을 체험한 후 주님의 사랑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한나가 자식이 없었을 때 남편인 엘가나가 그녀를 위로했습니다. 
그러나 그 위로는 근본적인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엘리 제사장도 나름대로 그녀를 위로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위로는 궁극적인 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어느 교우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말했듯이 하나님 외에 누가 한나의 고통을 알아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한나는 잉태의 축복을 통하여 하나님의 크고 큰 위로를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이 내 만족이 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양식이란 작은 책자에 나온 글입니다.(1994년 9월 9일)

“몇 해 전에 머리가 덥수룩하고 옷차림이 남루한 ‘팀’이라는 청년이 선교집회에 갔다가 거기서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어느 주일날 예배를 마친 다음 ‘팀’은 좀 당혹한 표정으로 황급하게 제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왜 하필 내가?’라고 자신에게 묻기를 거듭했습니다. 나는 이윽고 팀이 모든 사람이 어려움을 겪을 때 불평하는 것처럼 ‘왜 하필 내가?’하면서 원망하기를 시작했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당하면 ‘왜 하필 내가?’라고 말하잖아요? 그러나 그의 고백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나보다 더 영리하고 훌륭한 사람이 많은데 왜 하필이면 하나님이 나를 택하여 사랑하시는 지요?’라고 감격스럽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와 같이 예수님의 사랑에 취한 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여러분도 ‘주님 같은 분이 어디 있겠어요?’ 하면서 감격하는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여러분도 ‘나에게 베푸신 주님의 사랑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하면서 감격어린 얼굴로 고개를 가로 젓는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찬송가 368장) 

5절, “내 마음에 임하신 주의 성령 늘 계실 줄 믿습니다./ 
큰 은사를 나에게 부어 주사 주 섬기게 하옵소서./ 
주 예수여 충만한 은혜 내 영혼에 부으소서./ 
주 예수만 나의 힘 되고 내 만족함 됩니다.” 

하나님이 끊임없이 하시는 일은 사람을 찾는 일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모세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의 신을 벗으라.’ 
‘사무엘아, 사무엘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찾으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취하여 비틀거리는 사람, ‘주 예수만 내 힘 되고 내 만족함 됩니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주님의 사랑에 취해 사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3. 한나의 기도에서 ‘하나님이 yes하면 그만이지 그 외는 문제될 것이 없다.’라는 믿음을 봅니다. 

삼상 2:6-7절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여기서 주어는 누구입니까? 
여기서 주체는 누구입니까? 
누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누가 내리기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며, 누가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누가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십니까? 

‘여호와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삼상2:3절에서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라고 가르칩니다. 
즉, 사람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자기의 운명이 자기 손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모든 결재는 하나님의 손에서 떨어지는 것이지 사람이든가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허락이 문제이지 사람이라든가 상황은 전혀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 바네아’란 곳에서 그들이 장차 차지할 가나안땅을 탐지하기 위하여 12명의 두령들로 정탐꾼을 보냅니다. 
정탐결과를 보고합니다. 
10명의 정탐꾼은 부정 일색이었습니다. 
“안되겠어요. 포기합시다. 뭘 모르고 올라갔다는 전멸하고 맙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긍정적인 보고를 합니다. 
“올라가서 땅을 차지합시다. 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어떻게 이런 긍정적인 보고를 할 수 있습니까? 

민 14: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하나님의 허락이 문제이지 사람, 땅, 상황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아낙 자손의 대장부가 대단해 보이더라도, 아무리 상황이 나쁘더라도, 그것은 신경 쓸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사람을, 상황을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경 쓰는 사람입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은 “나에게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다른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10명을 주십시오. 그러면 세상을 뒤집어놓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출애굽 역사를 통하여 거듭 확인하는 것이지만 상황은 문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는 홍해가 어디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행진을 가로막는 광야가 어디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진군을 가로막는 여리고성은 어디 있었습니까? 
이런 믿음을 가지시고 기도하심으로 하나님의 허락을 얻고 힘차게 진군하시는 여러분이 다 되길 바랍니다.

이런 좋은 글이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세상이 바뀐 이유는’ -강영은-

“고치에서 막 나비가 눈을 떴습니다.
무엇인가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뜨거움이 느껴졌습니다.
무엇인가 세차게 가슴에서 고동쳐 올랐습니다.
용기를 가지고 뻗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과거에는 없던 전혀 새로운 어떤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날개였습니다.

날아오른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풀밭은,
기어 다니다가 땅에서 올려다본 키 큰 풀밭과 너무나 달랐습니다.
공중을 날아가면서 맡는 흐드러진 꽃밭의 향기는,
땅을 기어 다닐 때 한 번 스치던 꽃향기와 너무나 달랐습니다.

세상은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달라진 것은 나비 자신이었습니다.
땅을 기던 삶과 하늘을 나는 삶의 차이였습니다.

인생의 폭풍우 전보다 더 세차고,
고난의 바람 전보다 더 거세고,
침몰시킬 듯 밀려오는 격랑의 파도 무섭게 일어나도,
뱃전에 주무시던 주님 얼굴에 비치던 그 미소
마음속에 떠오르는 이유 무엇일까요?

더 못살게 굴고,
점점 더 속을 긁어 주고,
그것도 모자라 아예 지나는 길에 발까지 거는 그 사람이 
측은하여 조용히 두 손 모으게 되는 이유 무엇일까요?

달라진 것은 전혀 없습니다.
달라진 것은 마음 하나일 뿐,
똑같은 세상을 다른 세상으로,
똑같은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볼 수 있게 마음이 바뀌었을 뿐.......

오늘의 말씀을 정리해봅니다.

1. 십자가는 더하기 표시입니다. 
매사에 하나님을 더하기하길 축원합니다. 

2. 예수님의 사랑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이 되길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시대를 밝힐 인물로 찾고 계십니다.

3. 하나님이 yes하시면 그만이지 다른 아무것도 문제가 될 수 없음을 확신하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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