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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의 과녁 (행 13: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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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과녁 (행 13:38-39)


[그러므로 동포 여러분, 바로 이 예수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죄 용서가 선포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모세의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던 그 모든 일에서 풀려납니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예수 안에서 의롭게 됩니다.]

• 비시디아 안디옥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사순절 순례의 여정을 떠난 지 벌써 10일이 지났습니다. 1/4 정도 걸어온 셈인 데, 얼마나 깊어지고 자유로워지셨습니까? 이런 질문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스스로 서있는 자리를 가늠하며 살자는 뜻으로 한 질문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거울로 삼아 우리 삶이 지향해야 할 곳을 가늠해보려고 합니다.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은 바울과 바나바는 키프로스에서 아주 성공적인 선교활동을 벌였습니다. 그 섬을 주재하던 총독 서기오 바울까지도 사도들의 활동과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고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배를 타고 소아시아의 항구도시 버가에 도착한 후 200km을 걸어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렀습니다. 토루스 산맥을 넘어야 하는 아주 힘든 경로였습니다. 안식일이 되자 바울 일행은 회당을 찾아갔습니다. 회당장은 율법서와 예언자의 글을 낭독한 뒤에 바울과 바나바에게 ‘사람들에게 권면할 말씀이 있으면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낯선 이들을 배척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의 담지자로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주저하지 않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출애굽 사건으로부터 시작해서 가나안 입성과 사울과 다윗으로 이어지는 왕정에 이르기까지 그의 말은 거침이 없습니다. 그 대목에서 마치 호흡을 조절하는 것처럼 잠시 뜸을 들이던 바울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구주를 세우셨고, 그분이 바로 예수라고 한달음에 말합니다. 자기 말을 확증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여러분은 나를 누구로 생각하십니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는 내 뒤에 오실 터인데,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행13:25)라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덧붙입니다. 이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죄가 없었지만 성전 체제의 특권을 유지하고 싶었던 이들의 모함과 박해로 인해 죽임을 당하셨다고 말할 때 바울의 어조는 침통했을 것입니다.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하던 바울이 힘차게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그러나’라고 말할 때 돌연 바울의 말에 힘이 실립니다. 인간들이 세운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아니오’이지만,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부활은 인간의 무지한 탐욕과 음모에 대한 하나님의 ‘아니오’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다시 살리심으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하셨던 약속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살리신 분은 썩지 않으시는 불멸의 생명이 되셨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것이 자기가 전하는 기쁜 소식이라고 말합니다.

• 나는 죄인인가?

바울의 설교는 이제 정점을 향해 달립니다. 마치 소나기가 내리듯 바울의 말은 거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동포 여러분, 바로 이 예수로 말미암아 여러분에게 죄 용서가 선포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38) 
“믿는 사람은 누구나 다 예수 안에서 의롭게 됩니다.”(39) 

바울은 확신에 차서 외치고 있지만 회중들은 뜨악한 시선을 바울에게 던졌을 것입니다. ‘죄의 문제가 이렇게 쉽게 처리될 수 있단 말입니까? 짐승을 잡아 바치는 제사행위 없이도 죄 사함이 가능하단 말인가? 성경 어디에 그런 대목이 있단 말인가?’ 죄의 용서에 대한 문제는 언제나 시빗거리였습니다. 예수님이 중풍병 환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가 용서받았다”(막2:5)라고 선언했을 때 율법학자들은 예수가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느낍니다.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죄가 무엇인지, 죄의 용서가 무엇인지 참 다루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죄’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많습니다. 젊은 날에는 저도 그런 부류였습니다. 하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의 영토가 무한대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거의 대부분 우리 속에 있습니다. 

자학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파렴치한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말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인식하자는 것입니다. 문제투성이임이 다 드러나고 있는 데도 자기는 도덕적으로 흠결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보면 그 후안무치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뻔한 거짓말을 하면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어쩌자고 윤동주가 그런 시구를 남겼는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죄를 뜻하는 단어는 ‘하마르티아hamartia’입니다. 이 단어의 동사형인 ‘하마르타노’는 호메로스 이후에 ‘과녁을 빗나가다’, ‘잃어버리다’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죄는 과녁에 적중하지 못하는 삶, 혹은 마땅히 걸어야 할 길에서 벗어난 삶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인생을 걸고 겨눠야 할 과녁이 대체 무엇일까요? 성경은 그것을 두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가 가서 적중해야 할 인생의 과녁입니다. 그 과녁에서 빗나가는 게 죄라면 죄인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적당히 사랑하면 안 됩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합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웃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끼만 굶어도 어쩔 줄 모르는 우리가 굶주린 사람을 보아도 무덤덤하게 지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과녁을 겨냥하고 있기는 한 겁니까? 사랑이란 깊이 사귀는 것이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버름하게 떠있는 관계를 잇는 접착제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 속에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 아픔을 절절히 느끼고, 이웃과 피조 세계의 고통에 공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나고, 이웃 사랑은 이웃을 돌보고 지키기 위한 수고로 나타납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나는 죄인입니다. 바울 사도는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딤전1:15)라고 고백했습니다. 짐짓 해보는 고백이 아니라, 자기를 깊이 성찰한 이의 처절한 고백입니다.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 죄로 향하는 과정

한자로 ‘죄罪’라는 단어가 참 재미있습니다. 그물 망罒 부에 잘못을 뜻하는 아닐 비非 자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망은 갇혀서 답답한 상태 곧 부자유한 상태를 상징합니다. 죄는 우리를 부자유하게 만듭니다. 죄의 거미줄 위에서 몸을 뒤챌수록 부자유는 더욱 심화됩니다. 법적인 죄를 범하면 감옥에 갇히게 되지만, 과녁을 빗나가는 죄를 범하면 자기 속에 갇힌 사람이 되고 맙니다. 갇힌 상태이니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자유를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돕기 위해 몸을 굽힐 수도 없습니다. 죄의 지배를 받을 때 우리는 사랑에 무기력한 사람이 됩니다. 

존 웨슬리 목사는 우리가 은혜로부터 멀어져 죄로 향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1) 먼저 유혹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일 수도 있고, 육체나 악마로부터 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죄가 가까이에 있다고 경고하면서 더 열심히 깨어서 기도하라고 명하십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즐거움을 약속하는 유혹에 어느 정도 양보합니다. 4) 성령은 깊이 슬퍼하십니다. 

우리 믿음은 약해지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차가워집니다. 5) 성령은 더욱 날카롭게 경고합니다. “이것이 길이다. 이 안에서 걸으라.” 6) 하나님의 음성에서 돌이켜 유혹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7) 마침내 악한 욕구가 영혼 속에 펴져서 믿음과 사랑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그는 죄의 포박에 확고히 매이게 됩니다(웨슬리 설교전집2, 설교 1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의 특권>, 45쪽 참고). 어김없는 우리 현실입니다. 

예수님은 오해를 무릅쓰고 병자들에게 ‘네 죄가 사함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죄책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거룩하신 분이 하신 그 말씀은 해방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말씀은 에너지로 가득 찬 말씀, 사건을 일으키는 말씀이었습니다. ‘네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칡넝쿨처럼 그들을 동여매고 있던 죄의 사슬이 풀어졌습니다. 예수는 죄인들을 단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덕적인 우월감을 가지고 그들을 내려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의 약함을 불쌍히 여기셨을 뿐입니다.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을 향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요8:11) 말씀하셨습니다. 더럽다 하여 죄인을 떠나지도 않으시는 그 사랑, 죄인들의 삶의 자리에서 함께 아파하시는 그 사랑 앞에서 죄의 그물망은 녹아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죄를 용서하시는 데서 그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들 각자에게 평화와 기쁨과 사랑의 능력을 부여해주십니다. 그로써 우리가 성화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지난날에는 과녁을 빗나간 이로 살았다면 의롭다 여김을 받는 순간부터는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희생입니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바치는 희생은 주님과 우리를 깊이 일치시킵니다. 편안해지고 싶은 욕구를 누르면서 고통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어 세상이 아주 썩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존재 그 자체로 하나님 나라를 가리켜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 누가 참으로 믿는 사람인가?

오늘 우리 삶은 어떠합니까? 과녁을 향해 제대로 날아가고 있습니까?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불의에 희생되고 있는 이웃들 편에 설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목표점인 게 분명합니까? 성경을 읽을 때마다 바울 사도의 고백에 감동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고 싶습니다.”(빌3:10-11)

고난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게 자기 소원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견결堅潔한(굳세고 깨끗한) 목표가 있었기에 그는 흔들리지 않는 발걸음으로 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순절은 바로 이 마음 하나를 얻기 위해 구별된 시간입니다. 가야 할 길이 멀지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한 걸음 앞입니다. 헨리 뉴엔 신부는 유작이 된 <안식의 여정>에서 하루하루를 잘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오늘 평안을 베풀었는가? 누군가의 얼굴에 미소가 찾아들게 했는가? 치유의 말을 했는가? 분노와 원망을 버렸는가? 용서했는가? 사랑했는가?”((101쪽)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가시밭길 위를 걷고 있는 이들의 설 땅이 되어주는 사람입니다. 시린 마음으로 인생의 바다를 건너는 사람들의 고향이 되어주는 사람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입니다. 인간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파헤쳐지는 강과 깨지는 바위와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는 피조세계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야고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약1:27)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세상은 여전히 어둠이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어둠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가슴에서 돋아난 것입니다. 그 사실을 겸허히 인정할 때 변화가 시작됩니다. 별빛을 따라 주님께 나아왔던 동방박사들처럼 우리도 주님의 빛을 향해 혼신의 힘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을 왜소하게 만드는 이 세상에 영적인 비전을 제시할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 얼마나 많은 이들을 돕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바른 과녁을 향해 날아가고 있느냐 입니다. 그 과녁을 향해 우리 삶이 집중될 때 우리는 어떠한 세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얻게 됩니다. 이 중심을 얻지 못해 우리 삶이 맥이 없습니다. 교우 여러분, 사순절 기간 내내 혼신의 힘을 다해 예수라는 과녁을 향해 몸과 마음을 집중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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