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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학생회헌신예배] 즐거운 헌신 (시 1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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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헌신 (시 110:2-3)

대학교 장교 후보생들을 보면 대학생이지만 학교 생활하면서 나중에 장교로 가기 위해 군사훈련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멋있는 제복을 입고 반짝반짝 빛나도록 구두를 닦고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길을 가다가 고참 만나면 차렷 자세를 하고 큰소리로 구령을 붙이며 깍듯이 경례를 합니다. 멋있어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훌륭한 군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예절이 바르고 신사 같다 할지라도, 전쟁터에 나가 자기 목숨을 바칠 수 없는 한 그는 군인이 아니요, 장교가 아닙니다.

문제는 군인으로서 예절도 중요하고 절도 있는 몸가짐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전쟁이 났을 때에 얼마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싸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있어서 참 그리스도인의 정신은 무엇일까요? 
성도의 정신은 주님께 향한 헌신에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주의 권능의 날이란 구원의 날입니다. 하나님은 시온에서 권능의 홀을 우리에게 베풀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만왕의 왕으로 통치에 오르신 날입니다. 이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들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한다고 했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가 성령의 옷을 입었습니다. 이 거룩한 옷을 입은 주의 백성들은 즐거이 헌신하는 백성입니다. 

헌신이란 무엇입니까? 

주님의 요구에 응답하여 자신을 하나님의 제단에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시대에 헌신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나 물질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런데 성도가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해 물질을 드리든 제물을 드리든 그것은 자원하는 것이여야 했습니다. 

성막을 지을 때도 마음이 감동 된 자와 자원하는 자가 성막을 짓기에 필요한 모든 재료를 그리고 성막에서 쓸 기물들을 가져다가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출35:21) '무릇 마음이 감동된 자와 무릇 자원하는 자가 와서 성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 여호와께 드렸으니 .... ' 그것은 자원하는 예물이었고 자원하는 헌신이었습니다. 

나중에 백성들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일하던 일군들이 감당치 못하게 되어 모세가 그만 가져오라고 광고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의 성소의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가져온 예물을 모세에게서 받으니라 그러나 백성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져오는 고로 성소의 모든 일을 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각기 하는 일을 정지하고 와서 모세에게 고하여 가로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오므로 여호와의 명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출36:3-6)

"세가 명을 내리매 그들이 진중에 공포하여 가로되 무론 남녀하고 성소에 드릴 예물을 다시 만들지 말라 하매 백성이 가져오기를 정지하니 .... "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원하는 헌신이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16:10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칠칠절에 헌물을 드리라고 명령하면서 어디까지나 자원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못박는 것입니다. 명령 앞에 자원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헌신은 자원하는 것입니다. 

자원하는 헌신이 왜 없어질까요? 

① 죄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성도들이 남모르는 죄를 범하면 믿음이 병듭니다. 교회가 등한이 되어집니다. 출석률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그리고 짜증스럽고 말씀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럴 때에 누구 탓하지 말고 하나님께 엎드려져서 회개하여야합니다. 

죄가 있으면 은혜가 떨어지고 믿음이 식어지고 주를 향한 사랑이 식어지며 헌신하는 마음도 식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범죄로 괴로워하면서 하나님께 회개하는 노래를 부르는 중에 시51: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라고 소망하고 있습니다. 


② 주님과 멀어지면 헌신이 식어집니다. 

성도는 생활 전체가 주님과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예배드릴 때만 주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 중에도 우리가 주의 백성이지만 내가 잠잘 때에 주님의 백성이며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주님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살아갈 때 얼마나 주님과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곰곰히 눈을 감고 생각해 봅시다. 나의 오늘 삶에서 주님의 비중이 얼마나 차지하고 있습니까? 어쩌면 주님은 안중에도 없이 안하무인격으로 나 혼자 판단하고 생각하며 주님의 비위를 거스리며 살지는 아니했습니까? 

옛날 헬라의 도시 국가에 아주 부강한 왕이 하나 있었습니다. 많은 처첩들이 거느리고 있었고 그 처첩들은 모두 자기가 왕을 가장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하루는 왕이 여인들의 마음을 시험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모아 놓고 "나라와 왕권만 빼놓고 내게 있는 아름답고 진기한 보물들을 원하는 대로 모두 선물로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던 여인들의 눈이 다 뒤집혔습니다. 왕에게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을 서로 갖기 위해서 서로 싸우고 야단이었습니다. 왕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종이에 적어 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여인은 아무것도 달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왕은 그 여인에게 "너는 왜 원하는 것이 없느냐? 욕심도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부인은 "아니, 있습니다. 저는 이 나라의 금, 은 보석이 아무리 귀하고 값지다 할지라도 그것들 보다 더 값지고 아름다운 것을 갖고 싶습니다. 왕이 궁금해 하면서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여인은 "바로 당신입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비유가 적당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주님을 원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우리에게 너를 원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원하고 그분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는 것이 헌신입니다. 생활 속에서 주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세요. 그것이 바로 헌신을 유지하는 비결입니다. 


③ 자원하는 헌신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따릅니다.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하여 우리에게 헌금 드리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없어서 여러분을 불러 일군으로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이 자리에는 여러분이 있어야 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서있어야 할 자리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 앉히지 않고 나보고 그곳에 서서 헌신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 요구에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주보참고)

그러면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놀라운 은혜를 약속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헌신자에게 주시는 복은 인간이 셀 수 없는 정도의 것이었습니다. 사르밧 과부의 헌신을 보십시오.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를 드렸던 소년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길가에 앉아서 구걸을 하던 한 인도의 거지가 있었습니다. 그의 앞에 놓인 구걸그릇에 사람들이 지나며 쌀 얼마를 놓아주고 가곤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겨우 연명해 나갔습니다. 가끔 동전을 쥐어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거지는 큰 행렬이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꼭 왕자님의 행렬 같은데 그거 참 잘 됐다. 틀림없이 내게 금화를 주실 거야" 라고 기대를 했습니다. 행렬의 주인공은 거지가 생각했던 대로 왕자였고, 왕자는 빈 그릇을 들고 서 있는 거지 앞에 오자 멈추었습니다. 

뜻밖에도 왕자는 "네 그릇에 있는 그 쌀을 나에게 주지 않겠니?"하고 말했습니다. 거지는 실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어떻게 왕자가 거지에게 도와달라고 한단 말인가? 라고 생각하고는 마지못해서 깡통에서 쌀 세 톨을 꺼내어 왕자에게 주었습니다. 

왕자는 쌀 세 톨을 신하가 들고 있는 긴 자루 속에 손을 넣고 그 자루에서 금으로 만든 동전 세 개를 꺼내 그 거지의 깡통에 던져주었습니다. 거지는 이 금화를 보자 금방 후회가 되었습니다. 

"내가 왜 깡통에 있는 쌀 전체를 드리지 않았담!" 하고 후회를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주님을 향해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헌신하는 사람을 이같이 도우십니다. 

젊은 부인 한 사람이 목사님과 상담을 했습니다. 그 부인은 자기의 생활을 완전히 주님께 헌신하는 것이 어렵다고 했습니다. 훌륭한 피아노 연주자인 그녀는 하나님께 헌신하길 원하는데 음악을 포기하게 될까봐 두려워했습니다. 그 부인은 또한 하나님께서 다른 곳에 선교사로 보내실까 두려워했습니다. 

목사님은 사도행전 10:14을 펴서 베드로가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라는 성경 귀절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모순되는 말인지를 설명했습니다. 

베드로가 평상시에는 주님을 자신의 주인이라고 생각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베드로가 "그럴 수 없나이다"라고 말한 것은 그의 속내에서는 아직 예수가 자신의 주님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목사님은 종이에 그 말씀을 쓰고 그 부인에게 택하라고 했습니다. "그럴 수 없나이다"를 지우든지 또는 "주여"를 지우든지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부인 혼자 남 겨두고 방을 나갔다가 얼마 후에 돌아왔습니다. 

돌아와 보니 그녀는 "주님"이란 말을 제외하고 다른 글을 지웠습니다. 그녀는 주님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주님이라고 고백을 말든지 헌신을 하든지 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어린아이가 어렸을 때에는 부모를 의존하여 살아갑니다. 모든 앉고 일어서고 먹고 잠자는 것 까지 엄마나 아빠가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부모가 먹여주고 재워주는 데도 또 용돈을 타갑니다. 마치 직장에서 월급을 받듯이 꼬박 꼬박 요구합니다. 

그러나 아이가 장성하여 제가 직장생활을 하면 이제는 부모에게 용돈을 드립니다. 부모가 늙으면 장성한 자식은 부모의 보호자가 됩니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효도를 다합니다. 이것이 장성한 자식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여전히 똥싸놓고 앉아서 엄마를 부르는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작은 문제에만 하나님을 부르는 어린아이 신자가 되렵니까? 

아니면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안고 있는 문제를 내 문제로 알고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는 도구가 되시렵니까? 주의 일에 즐거이 헌신하는 백성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많이 있습니다. 

이 지역에서 불신자들에 어떻게 하면 칭송들을 수 있는 자신이 되고 교회가 될까를 생각합시다. 그리고 주님의 명령인 땅 끝까지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까 고민해 봅시다. 우리 교회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헌신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본문을 한번 더 봅니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주의 권능의 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재림의 날입니다. 재림과 관련하여 두가지를 조심하여야 됩니다. 한가지는 주님이 재림 하신다고 하니까 가정, 직장, 학교등 모든 것을 다 팽개치고 교회 와서만 지내면 되는 것처럼, 또 어느 특정한 곳에 가야지 구원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기록에 재림의 날은 예수님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우리 믿는 성도들로 하여금 잠자게끔 만드는 것을 조심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간절한 대망을 갖지도, 생각지도 않습니다. 그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잘 살고, 어떻게 하면 출세하고, 권세를 누릴까 하는 이런 생각들로만 꽉 차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두가지 모두 위험성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곧 오십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여 오시는 모든 징조가 다 나타나 있습니다.

“주의 백성”이라 함은 천국 시민들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한 옷을 입는다는 것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입는 것, 영적인 무장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머리에는 구원의 투구를 씁니다. 가슴에는 의의 흉배를 합니다. 또한 허리에는 진리의 띠, 발에는 복음의 평안의 신, 왼 손에는 믿음의 방패, 오른 손에는 말씀의 검을 갖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전신갑주를 입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합니까? 즐거이 헌신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때가 되면 배도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배교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마세요. 성경말씀 보면 아비가 자녀들을 죽이는 일에 앞장서고, 또 자녀들이 부모를 죽이는데 앞장서는 그런 세상이 일어난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전신 갑주를 입은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들은 더욱 충성하고, 더욱 헌신하는 역사들이 일어납니다. 헌신함에 있어서도 즐겁게 헌신합니다. 대원군때 기록을 보면 순교자들이 죽어가면서도 노래를 부르고 미소를 지었다고 합니다. 스데반 집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이 돌로 쳐서 죽이는데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이 되어졌다고 했습니다. 주를 위하여 헌신하고 충성하는 사람은 마음 속에 희열이 넘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헌신하고 있느냐하는 것이 귀한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펼쳐 나가는 그 놀라운 천국의 환상을 봅니다. 악의 사탄의 권세가 우리 대장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굴복 당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천군천사 대열에 내가 끼여들어서, 그 속에서 즐겁게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새벽이슬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게 됩니다. 청소년시기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부모들이 기쁨으로 즐거이 헌신할 때에, 우리 자녀들이 새벽이슬처럼 주께로 나오는 역사가 이뤄집니다. 새벽이슬과 같은 우리 자녀들로 인하여 이 세상의 음란의 마귀가 물리쳐 집니다. 부정적인 마귀가 물리쳐 집니다. 부패의 마귀가 물러 나가게끔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통일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에 대해 “이것은 반드시 청년세대들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처음 믿는 새신자들도 가리킨다”고 칼빈은 해석 했습니다. 진정 헌신하는 사람들, 기쁨으로 헌신하는 그런 무리들이 교회 안에 밀알이 될 때에, 그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 받도록 인도하는 역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새벽이슬과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 심령이 떨립니다. 새벽에 청년들이 주님께 나오는데 우리 교회는 오후에도 나오지 않으려고 합니다. 청년들과 새신자들이 은혜 받겠다고 맨 앞에 와서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뭉클해 집니다. 다니엘 같고, 다니엘의 세 친구 같습니다. 여기에 희망이 있고, 여기에 비전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은혜가 우리 교회에 응해지기를 바랍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되 너는 영원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성경에서 멜기세덱은 의와 평강의 왕이라 하셨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의와 평강의 왕으로서 우리의 영원한 제사장이 되십니다. 모든 원수 마귀사탄의 철권을 깨부수는 그런 능력의 왕이십니다. 또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의 짐을 짊어 주시는 제사장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와 우리를 치료하시고 씻기시는 영원한 대제사장입니다. 이제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 어떤 이상한 일이 생기고, 원수 마귀사탄이 우리를 쓰러뜨리고, 우리가 하는 일을 방해 놓고, 우리 가정을 파괴하고, 교회를 쓰러뜨리려고 해도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 대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직접 나가서 싸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원수 마귀사탄은 우리 정도는 우습게 여깁니다. 내가 싸움하려 하지 말고 우리를 위하여 대신 싸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앞장세우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지 나의 일도 지켜 주고, 우리의 자녀도 보존함을 받고, 가정도 지킴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께 충성을 하고 헌신을 해도 아깝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이 되면, 우리 주님께서 천사장들과 나팔을 불면서, 우리에게 왕의 기업을 이어 주십니다. 

여러분, 그 날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그까짓것 이 세상의 무슨 명예, 물질, 권세 그것이 대수입니까? 이젠 그런데서 자유함을 가집시다. 기쁨으로 즐겁게 헌신할 때에, 새벽이슬 같은 청년들이 확 일어납니다. 우리 자녀들이 주 안에서 온전히 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 구원 받는 많은 성도들이 구름떼처럼 모여 드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이 사회의 권세를 잡고 있는 원수 마귀사탄을 주님께서 능력으로 깨뜨려 버립니다. 

지금은 우리 민족 반만면 역사에서 가장 좋은 때를 우리가 맞이하고 있습니다. 통일한국시대에 우리가 밀알이 되어져서 우리 민족의 복음화는 물론이고, 세계를 말씀으로 깨우는 이 귀한 역사에 여러분들도 즐거이 헌신하는 귀한 심령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거룩한 성령의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는 거룩한 백성이 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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