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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양식 (요 4: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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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양식 (요 4:27-38)


한 여인이 쌍둥이 자매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한 이 여인은 몸을 파는 창녀의 노릇을 함으로써 간신히 먹고 살 수 있었으며 또한 알코올중독자였습니다. 쌍둥이 자매를 키울 수 없는 무능력자였으므로 하는 수 없이 쌍둥이 자매를 각자 다른 집으로 입양시켜서 키우기로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흘렀습니다. 가엾은 이 어머니는 숨을 거둔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을 입양시켰던 입양 기관에서 일하던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이 쌍둥이 자매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먼저 동부로 입양시킨 딸을 찾아갔습니다. 그 딸은 어머니처럼 창녀가 되어 몸을 팔고 있었으며 한시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알코올중독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안타까워서 물었습니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가?"
그러자 딸은 대답하였습니다.
"그럼 우리 어머니 밑에서 어떤 딸이 나오리라 생각하셨나요."
실망한 그 사람은 다시 서부로 또 한 명의 쌍둥이 딸을 찾아갔습니다. 그 딸은 모범적인 주부가 되어 있었으며 아이들을 훌륭하게 키우는 정숙한 어머니였습니다. 또한 마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신앙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똑같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그러자 그 딸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럼 우리 어머니 밑에서 어떤 딸이 나오리라 생각하였나요."

똑같은 어머니에게서 받은 상처가 쌍둥이 중 한 딸에게는 절망이 되었고 다른 한 딸에게는 극복해야 할 소망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나님의 씨앗입니다. 우리는 이 씨앗을 마음의 밭에 뿌리신 주님의 뜻에 따라 훌륭하게 자라서, 우리들의 생을 통하여 열매를 못 맺어 가라지가 되어버리는 것은, 쌍둥이 자매처럼 똑같은 상황을 전혀 반대로 받아들이는 우리들의 마음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항상, 영원히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하십시오. 주님의 나무에 붙어 있어 많은 열매 맺기를 기도하십시오.
중요한 것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비록 사마리아 여자였지만 그것도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살고 있는 남자조차도 남편이라 할 수 없었던 여인, 세상 불행은 혼자 다 끌어안고 사는 것만 같았던 여자가 이제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유대인들이 흔히 다니는 길이 아닌 전혀 다녀보지 않았던 사마리아 길로 해서 수가 마을까지 온 이유는 바로 상처 속에 살아가고 있는 이 이름 없는 여자를 위해서였습니다. 아마도 이 여자는 날마다 눈물로 하나님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자의 눈물을 하나님이 보셨습니다. 그래 상처 속에 살아가던 이 한 여자를 위해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 마을까지 오셨던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만나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만나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 백성으로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겠습니까?

먼저 생각할 것은 예수님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을로 양식을 구하러 갔던 제자들이 돌아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감히 나서서 “무엇을 구하십니까? 어찌해서 그 여자와 말씀을 나누고 계십니까?” 하고 묻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둔 채 마을로 달려갑니다. 그리고는 동네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이야기합니다. 그래 이게 무슨 일인가 해서 동네 사람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님께로 옵니다. 

그 사이에 제자들이 음식을 차려놓고 예수님께 잡수시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 제자들은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궁금해 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그러니까 먹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면 참으로 불쌍한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짐승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짐승은 먹고 사는 것과 종족 번식이라는 두 가지 목적 아래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과식을 하지 않습니다. 

자기 분량만큼만 먹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다른 것들이 자기 먹이에 손을 대도 그냥 내버려둡니다. 맹수들이 사냥을 하는 것도 오직 먹기 위해서이거나 아니면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좀 다릅니다.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라고 하기에는 너무 복잡합니다. 나름대로 보람된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한데 문제는 무엇이 행복이고 무엇이 가치 있는 일인가 할 때 그 기준이 애매하다는 것입니다. 

먹는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흔히 먹기 위해서 사느냐 아니면 살기 위해서 먹느냐고 합니다. 한데 사실 그 답이 없습니다. 먹기 위해서 사는 것도 맞고 살기 위해서 먹는 것도 맞습니다. 한데 반대로 먹기 위해서 사는 것만도 아닙니다. 또 살기 위해서 먹는 것만도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잘 살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잘 산다는 기준은 또 무엇입니까?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입니까? 행복하게 살면 된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입니까? 누구는 돈만 있으면 된다고 합니다. 아니다 건강해야 한다고 합니다. 아니다 출세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은 행복할까요? 

누구나 할 것 없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치 영화나 동화에 나오는 것과 같은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소위 잉꼬부부라는 말도 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잉꼬부부는 마냥 행복하기만 할까요? 그들에게는 근심될 일이나 가슴 아픈 일이 전혀 없을까요? 그렇다면 마음 아픈 일이 있으면 또 불행하기만 한 걸까요? 가진 것이 없으면 불행하고 배운 것이 없으면 불행할까요? 따지고 보면 그것만도 아닌 것 같습니다. 결국 잘 산다고 하는 것 행복하게 산다고 하는 것이 사람들마다 다 기준이 다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우리들에게 참된 기준을 말해줍니다. 진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죽어가는 생명을 건져 구원하는 일입니다.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는 씨를 뿌리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또한 수확 때를 맞추어 열매를 거두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같은 사람이 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고 열매를 거둘 수도 있고 씨 뿌리는 사람 다르고 열매 거두는 사람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여기 주님은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심고 거두기 위해서 여러 사람이 함께 협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한 알의 밀알이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은 그 한 알의 밀알 땅에 떨어져 썩어짐으로 100배 60배 30배를 거두도록 만드는 그 한 알의 밀알이 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시기에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생명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 값을 치르신 주님,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를 믿음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으신 그 주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영광은 십자가를 통한 영광입니다. 수고가 따르는 일입니다. 아니 죽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희생의 길을 조금도 망설임 없이 걸어가셨습니다. 그 길은 고난의 길이요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 어떤 사람인들 고생 좋아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죽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때 그 길을 기쁨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마지못해서 간 길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어서 간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길을 가는 것이 나의 양식이라고까지 하십니다. 먹지 않고서는 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길을 가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삶의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살아도 죽느니만 못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거기에 자신의 뜻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 아버지 하나님의 뜻만 있을 뿐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라고 합니다. 대강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완전히 죽어야만 하는 일입니다. 어린 양이 죄 값을 지고 제단에 바쳐지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 값을 대신 지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옵소서 하오나 나의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신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이니까 그 길이 아주 쉽게 갈 수 있는 길이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얼마나 힘들었으면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흘러내렸다고 합니다. 온 몸의 진액을 다 뽑아내는 기도의 끝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십니다. 
그 주님이 지금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험하고 좁아서 가는 자가 많지 않다고 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하십니다. 

억지로라도 하나님을 모독하고 부인하는 세상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세상입니다. 거짓이 참을 몰아내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산다고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힘듭니다. 피곤합니다. 오히려 어떤 때는 주님만을 위해서 사는 것 때문에 더 어려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나는 온 힘을 다 기울였는데 돌아오는 것은 코웃음밖에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좀 바보 소리 들으면 어떻습니까? 욕을 먹은들 어떻습니까? 잠시 좀 힘든다고 해서 쉬운 길을 찾지 마십시오. 쉬운 길은 없습니다. 오히려 힘들기에 더 보람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힘든다고 해도 오히려 주님을 따라, 주님과 함께 기쁨으로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우리들 각자에게 주어진 직임대로 충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국 웨일즈 지방의 어떤 시골에 한 소년이 위험한 병으로 중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의 과부 어머니는 아들을 살리고자 비가 퍼붓는 밤길 5마일을 달려 의사에게로 갔습니다. 의사는 여러 가지로 망설여졌습니다. 

“이 비오는 짙은 밤길 5마일을 어떻게 가나? 내가 가서 치료해 준들 이 가난한 과부가 치료비나 낼 수 있을 것인가? 그 소년이 생명을 건져 보아야 장래에 한 노동자에 불과 할 터인데….”
그러나 의사는 인간애와 책임감으로 그 길을 곧 떠나서 소년의 생명을 경각에서 구원해 낼 수 있었습니다. 이 소년이 장래에 영국의 정치계를 주름 잡으며, 재무장과, 군수장관, 국방장관을 역임한 로이드조지 경임을 그 누가 그 때에 알았겠습니까? 로이드조지가 재무장관이 되던 날 그 의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비가 퍼붓는 밤길을 5마일이나 가서 그 시골 가난한 농가의 소년을 구한 것이 바로 영국의 대 지도자의 목숨을 구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조차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갈수록 기독교인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고 하셨는데 희어져 추수하게 된 정도가 아니라 어쩌면 추수 때를 놓쳐서 거두기도 전에 알갱이가 다 쏟아지는 그런 지경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요? 

하지만 아직도 늦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직 주님이 다시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구원의 문이 닫히기까지 우리는 결코 낙심치 말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은다고 했습니다. 이는 거두는 자에게 삯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을 건져 구원하는 일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두는 자만 그런 것이냐 하면 아닙니다. 심는 사람도 있고 거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의 수고가 함께 어울려서 아름다운 열매를 거둘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삼으신 것도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단지 말씀을 전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예수님을 전해주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이 어떠한 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참 행복이 어디에 있고 참 사랑이 어디에 잇는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유감없이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밴댕이 소갈딱지라는 말처럼 속 좁은 사람의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은 아닌지요?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고 남의 기쁨을 나의 기쁨처럼 기뻐해줄 수 있는 삶이 우리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을 말하자면 거기에 모자라도 한참 모자랍니다. 조금만 불이익을 당했다 싶으면 못 참습니다. 조금 힘든다 싶으면 그것 때문에 온갖 불평을 터뜨리며 낙심할 때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따뜻한 말 한 마디조차 그리운 그런 세상이 아닙니까? 그런데 따뜻한 말 한마디조차 사치스럽게만 느껴지는 그런 세상이 아닙니까? 

웃으면 행복해요 웃으면서 삽시다 말은 하지만 과연 우리가 하루에 몇 번이나 웃으면서 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그렇게 웃어본 때가 언제입니까? 너무도 삭막한 세상입니다. 살기가 참으로 좋은 세상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너무도 좋아졌는데 따뜻한 정은 점점 사라져만 가는 세상입니다. 그런 세상을 다시금 살맛나는 세상으로 만들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보십시오. 사마리아 여자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깨닫자마자 동네로 뛰어갑니다. 그리고는 동네방네 떠들어댑니다. 

“이 보시오들 내 말 좀 들어보소.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이를 와서 보시오 이분이야 말로 메시야십니다.”
지금까지 피해왔던 사람들입니다. 만날까봐 두려웠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서 사람이 확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부끄러울 것도 없습니다. 숨길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거꾸로 사람들을 찾아다닙니다. 마지못해서 살던 인생이 신나는 인생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했습니까?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돌이켜 보면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정말 신기하기만 합니다.

물론 우리들 가운데는 처음부터 믿는 가정에서부터 시작을 한 사람도 있겠지만 예전에는 믿는 사람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하는 것이 보통 용기를 가지고는 힘들었던 그런 때도 있었습니다. 교회에 다니지 못하도록 핍박도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아주 교회 소리만 나오면 고개를 절래 절래 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가장 흔하게 눈에 띄는 것이 교회의 십자가일 정도로 믿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사회에 대한 영향력은 줄어든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아니 갈수록 반발하는 사람들 적대시 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 가운데 양과 염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을 두 종류로 구분하는데 하나는 양 같은 성도 또 하나는 염소와 같은 성도입니다. 물론 양은 좋고 염소는 나쁘다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단지 편의상 구분을 해놓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아주 묘합니다. 그것은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었느냐 입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그러니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베푸는 것이 곧 주님께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까지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극히 작은 자라면 흔히들 무시해 버리죠. 나보다 무언가 나은 사람이라면 그 앞에 머리를 숙이다가도 나만 못하다 싶으면 깔보고 무시해 버리지는 않습니까? 어쩌면 그게 우리 본성인지도 모르죠.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렇게 살아왔다고 해도 이제부터는 달라져야 합니다. 어찌 보면 대단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그것이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감격스러울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대놓고 무시하는 말을 들을 때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천사처럼 대해준다면 정말 감격할 겁니다. 모두가 다 무시하는데 그런 나를 사람대접해 준다고 할 때 어찌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참 내 제자가 되리라”고 하신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그리고 정말 나는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까지도 관심을 베푸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살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어주는 사랑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러시아의 블라바츠키라는 여인은 ‘꽃씨 부인’으로 불렸습니다. 그녀는 전 세계를 여행할 때마다 꽃씨가 가득 담긴 두개의 가방을 들고 다녔습니다. 그녀는 열차를 타고 가면서 창문을 열고 철로 변에 계속 꽃씨를 뿌렸습니다. 사람들은 그녀가 제 정신이 아니라고 수군거렸습니다. 한 승객이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왜 꽃씨를 창 밖에 던집니까? 당신은 두 번 다시 이 길로 지나가지 않을 텐데요.”
블라바츠키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아마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봄은 반드시 찾아올 것입니다.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꽃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은 단지 다른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인간은 남에게 사랑을 베풀 때 풍요를 느끼고 탐욕을 쌓을 때 오히려 빈곤을 느끼도록 창조됐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자는 사랑을 베풀 줄 모르고 끊임없이 받으려고만 하는 사람입니다.

왜 갈릴리 바다는 풍요로운 호수인데 사해는 죽음의 바다가 되었는지를 기억하십시오. 받은 것만큼 다시 흘려보내는 갈릴리는 풍성한 생명으로 활기가 넘쳐납니다. 하지만 사해바다는 죽음의 바다입니다. 생명이 없습니다. 누구하고도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나는 베푸는 사람인가 아니면 받으려고만 하는 사람인가? 베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계속해서 베풀도록 하십시오. 받으려고만 하는 사람이라면 이제 베푸는 쪽으로도 신경을 써보십시오. 그래서 주님의 참 사랑과 기쁨을 만끽하는 성도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모든 것을 풍성하게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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