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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간청의 기도가 필요할 때 (눅 1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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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청의 기도가 필요할 때 (눅 11:5-10) 

지진이라든지 화산폭발과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기에 앞서 일어나는 현상들 가운데 하나가 쥐라든지 새, 개미와 같은 생명체들이 살던 지역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기현상들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두꺼비 떼가 이동하는 일이 목격되고 난 이후에 지진이 발생하였거나 물고기들이 갑자기 이유 없이 떼죽음을 당하고 난 이후에 지진이 발생한 일들을 보면 짐승이나 생명체에는 우리 인간이 감지하지 못하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면밀하게 잘 관찰하면 그러한 조짐을 미리 알아낼 수 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스스로 감지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와 기도하지 않을 때의 영적 상태는 확연하게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조사에 보니까 우리나라 성도들 가운데 100명 중 97명이 매일 성경을 읽지 못하며, 예배를 마치고 교회를 나서는 사람 가운데 100명 중 5명만이 방금 전에 들은 설교 본문이 어딘지를 기억한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하십니까?

그런가 하면 잠자리에 들기전 잠시 드리는 기도와 식사기도 외에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들의 수는 극소수더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엄밀히 말해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영적인 상태가 어떠한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숨을 쉬지 못하면 인공호흡기를 달고 혼수상태에 빠지는 것처럼 성도가 기도생활을 멈추게 되면 그때부터 영적인 혼수상태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것은 대단히 심각한 일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단절이 일어나게 되는데 다시 말해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 있다고는 하지만 말이 살아있는 것이지 생기가 없고 무기력해지게 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완전히 무기력한 상태 속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을 때는 성전에서 하나님께 마음껏 예배를 드릴 수가 있었는데 바벨론에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포로생활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달프고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예루살렘에서는 안식일이 되면 하나님의 성전에 가서 예배드리고 기도하면서 보내면서도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며 살았는데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서는 안식일조차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포로 신분에 신앙의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하고 예배드리지 못하니 영적으로 더욱 방황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으로 방황하기 시작했으며 하나님을 버리고 점점 세상을 따라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영적으로 완전히 메마르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보여주신 것이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의 환상’ 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한 골짜기로 데려가셔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그 골짜기에 뼈가 가득했습니다.

에스겔이 그 뼈들의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보니 하나같이 바짝 말라있는 것입니다. 그 넓은 골짜기에 있는 뼈들이 전부 다 완전히 말라 있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말랐다’ 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영적인 메마름’ 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완전히 메말라 있었다는 말입니다. 

영적으로 메말랐으므로 성장하지 못하며 아무런 능력을 행할 수도 없습니다.
찬송을 해도 힘이 없으며 기도를 한다고 해도 형식적으로 중언부언할 뿐입니다.

기도다운 기도가 없으니 결국 영적인 판단력이 무너져서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무기력한 가운데 이스라엘이 처해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는 기도해야 영적으로 살아납니다. 
기도해야 성령 충만하게 되며 기도해야 기쁨이 생깁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불안과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가 없고, 기도하지 않으면 살았으나 죽은 것 같은 영적인 사망에 이르고 만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가끔 어떤 분들은 ‘나는 기도하지 않는데도 아무 일도 없고, 불안도 없고 두려움도 없다’ 는 태도로 살아가시는 분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설령 내가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무사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도하기 때문에 무사하고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주변을 보면 그래도 누군가 나를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나를 위해서 기도하든지, 아버지가 나를 위해서 기도하든지, 목회자가 나를 위해서 기도하든지,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기도하기 때문에 비록 내 기도가 부족하더라도 그래도 영적인 혼수상태 가운데 빠지지 않고 근근히 그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다른 사람의 기도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의 자생력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내 기도를 해 주기를 바라기에 앞서 먼저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특별히 믿음의 부모라면 자녀들을 위해 날마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험난한 세상에서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고 살도록 하는 가장 분명한 길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로 복이 있는 부모가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그런데 자녀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 부모들을 보면 ‘어떻게 저렇게 무모하고 용감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원하기는 여러분 모두가 다시 한번 이 시간 기도의 중요성을 깨닫고 기도의 자리에 서실 수 있기를 축원드립니다.
 

오늘 본문은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의 집에 한 밤중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귀한 손님이 왔는데 한 밤중이라 그 손님에게 마땅히 대접할 음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옆집 친구에게 달려가서 깊이 잠든 친구를 깨워 떡 세 덩이만 빌려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곤히 자는 자기를 깨운 것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실 아주 위급한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당장 어떻게 되는 일도 아니지만 한 밤중에 곤히 자고 있는 사람을 깨워서 떡 세 덩이만 빌려달라고 하는데 좋아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나 귀찮을 정도로 간청하면 결국에는 끝까지 거절하지 못하고 빌려주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하신 이 비유의 말씀에는 기도에 대한 중요한 세가지의 가르침이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누가 기도하는가?’ 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한 밤중에 어쩔 수 없이 친구의 대문을 두드려야 했던 이 사람에게는 떡 세 덩이가 없었습니다. 
떡 세 덩이 때문에 이 사람은 친구에게 한 밤중에 체면 불구하고 사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에게 부탁할 때에도 필요한 사람이 매달리게 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누가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까? 
떡 세 덩이가 없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떡 세 덩이’ 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말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결국 아쉬운 사람이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옛말에도 ‘목마른 자가 우물 판다’ 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쉬운 사람이 매달리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쉬움이 클수록 간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쉬움이 더하면 간절함도 더해집니다. 

그래서 저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과연 우리가 가난하고 어려움이 끊이지 않는 것이 고난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것도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언제 하나님께 더 간절히 기도하게 되겠습니까?
여유 있고 부족함이 없을 때일까요?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면 사실 그렇게 창자가 끊어질 정도의 간절함이 나오질 않습니다.

물질이 없는 가난이든, 위급한 상황에서 도와줄 사람이 없는 가난이든, 저는 없어 가난한 것이 축복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 이유가 없는 것을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더욱 간절히 기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 것도 없으면 바지가랑이라도 잡고 늘어지는 것이 사람의 심정이듯이 바로 야곱의 기도가 그런 환경에서 나온 기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깊어지고 좀 더 간절해지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떡 세 덩이가 없는 우리의 현실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만사를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물질이 있는 듯 하지만 모자라서 아쉬울 때가 많고, 지혜가 있는 듯 하지만 인생에 밀어닥치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능력이 있는 듯 하지만 한계가 있어서 할 수 있는 일보다는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가졌으면 얼마나 가졌겠습니까?
머리털하나 희어지는 것도 막지 못하는 무기력한 존재가 인간이지 않습니까?
자기 기분 하나도 마음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잘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스스로 교만에 빠져 강한 척 하고 높은 척 하고 있는 척 합니다. 그러니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기도가 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명백히 깨닫고 인정할 때 하나님께 기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기도가 간절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아직 내 부족함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아무리 힘들다고는 하지만 아직 다급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밤에 찾아온 사람은 사실 남을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한 밤중에 무례하고 염치없는 요구를 한 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찾아 온 여행 끝에 굶주리고 지친 친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언제 자기의 부족함을 깨닫게 되는지 아십니까? 바로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돕고자 할 때입니다. 

무엇을 구하는 자에게 줄 것이 없음으로 자신의 부족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위로를 구하는데 위로를 줄 만한 능력이 내게 없습니다. 
상처를 싸매어 주어야겠는데 싸매어 줄만한 능력이 내게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나약한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게 아무런 떡이 없음을 인정할 때 비로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질 것입니다. 
원하기는 하나님만이 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으로 믿으시고 더욱 기도로 하나님께 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두 번째로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왜 기도하는가?’ 에 대한 대답을 주고 계십니다. 

‘저드슨’ 선교사는 기도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기도는 결단성 있게 지속해 나가야 한다. 기도를 계속해서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감수해야 된다. 사적인 일이나 회사일 때문에 기도를 하지 못하고 기도가 끊어진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도둑맞게 될 것이다.’

여러분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고 자녀의 속마음을 속속들이 알고 싶어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와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고민을 듣기 바라시며, 문제를 이야기기를 바라십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이러하신 하나님을 잃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 된 우리는 자녀들이 모든 사정을 부모에게 말해주기를 바라면서 정작 하나님께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아뢰는 일에는 너무나 인색하지 않습니까?

자녀는 부모에게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점점 구체화시켜 나갈 수 있게 되며 이를 통해 듣게 되는 부모의 조언이나 교훈은 큰 유익이 되고 힘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과 대화하는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구체화시켜줍니다. 
또 기도 중에 듣게 되는 하나님의 음성은 순간적인 욕심이나 가벼운 소망, 잠시 마음에 품어보는 꿈과 같은 것을 버리게 하고 마음에 바른 소망을 갖게 합니다.

우리는 아무런 소원이나 다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하나님은 기도 중에 잘못된 욕심과 온전한 소원을 구별하게 하시고 잘못된 소원은 걸러내게 하십니다. 

즉 ‘내가 무엇을 소원해야 하며,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내 중심의 소원은 점점 물리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집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도를 왜 해야 합니까? 잘못된 소원을 버리고 영적으로 온전한 소망을 갖고, 그것을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의미에서 기도는 우리의 삶의 방향을 인도해주는 나침반과도 같습니다.

기도가 있어야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고, 온전한 소망을 품고 흔들림도 없고 치우침도 없이 오직 한 방향을 향해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늘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본문에서는 ‘기도의 결과’ 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전화를 거는 사람은 상대방이 받을 것을 믿고 전화 버튼을 누르지 않습니까?
요즘은 발신자를 표시해 주기 때문에 골라서 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만 기도하는 사람은 내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을 믿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9-10절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기도하는 우리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주시고 찾게 하시고 열려지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응답의 약속을 믿습니다.

오늘 비유도 바로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사람도 귀찮게 하면 마지못해 들어주는데 들어주겠다고 이미 약속하신 하나님이 어찌 응답하시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트루엣’ 이란 목사님이 계신데 이 분은 목회를 처음 시작할 당시 아침마다 마18:19-20 ‘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 말씀을 암송했다고 합니다.

한번은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교인들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씀을 믿습니까?” 그러자 일순간에 침묵이 흘렀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세탁소를 운영하는 한 여인이 일어나더니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저는 그 말씀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 남편의 구원 문제를 저와 함께 성도님들이 합심으로 기도해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그 말이 막 끝나자 이번엔 건장한 한 남성 교인이 일어나 “저도 그 말씀을 믿습니다. 제가 자매님의 남편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너도나도 성도들이 이 기도에 동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이 세탁소를 운영하는 부인의 남편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온 성도가 간절히 합심하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이 부인의 남편은 배를 타는 선원이었는데 성격이 난폭하고 술주정뱅이에 늘 술에 취해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성도들이 모여 주정뱅이 남편을 위해 서로 합심하여 기도를 시작한지 얼마 후 그 술 주정뱅이 남편이 드디어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밤중에 문을 두드리는 것은 분명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매우 부적당한 때’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 사람은 매우 부적당한 때로 보이는 그 때에도 주저하지 않고 간청한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간청기도’ 란 어린아이와 같이 무조건 떼를 쓰는 기도가 아니라 포기하지 않으며 인내하며 낙심하지 않고 뒤로 물러가지 않는 기도이며, 소리내서 구하는 기도이며 한가지에 집중해서 구하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기도의 대단히 중요한 원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친구의 집을 찾아가 두드리며 간청 하였던 그 간청함이 우리에게도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정말 내 형편이 절박하다면 기도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지금도 기도해야 할 때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고 ‘다음에 하지’ 라고 미루고자 하시는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바로 지금이 기도할 때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오늘 하나님 앞에서 이 사람과 같이 간청하시기 바랍니다. 

한번두번 하다가 응답이 없다고 포기하고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간청한다는 간절함으로 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반드시 좋은 것으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원하기는 이러한 기도의 응답을 얻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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