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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까마귀와 비둘기 (창 8: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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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육백일 년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 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말랐더라”

천지 창조 이래 물질 세상에 가장 큰 사건은 노아 홍수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온 땅이 물에 잠겼고, 호흡하는 동물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일을 성경은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7:17-20= “홍수가 땅에 사십 일 동안 계속된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물이 더 많아져 땅에 넘치매 방주가 물 위에 떠 다녔으며 물이 땅에 더욱 넘치매 천하의 높은 산이 다 잠겼더니 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나 오르니 산들이 잠긴지라  

7:21-22=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가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더라  

7:23-24=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 물이 백오십 일을 땅에 넘쳤더라” 

150 일이 지난 후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렀고, 물이 점점 감하여 약 석달 후 10월 1일에는 산들의 봉우리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40일이 지난 후 노아는 물이 감한 여부를 알기 위해 방주의 창문을 열고 까마귀를 내어보냈지만 소식이 없었습니다.  

노아는 기다리다 못해 이번에는 비둘기를 내어보냈는데, 얼마 있지 못해 방주로 돌아왔습니다. 7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내어보냈는데, 날아간 비둘기는 하루 종일 돌아오지 않다가 저물 때가 되어서야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비둘기의 입에는 새로 돋아난 감람나무 잎사귀가 물려 있었습니다. 7일 후 비둘기를 세 번째로 내어보냈는데, 날아간 비둘기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비둘기가 방주 속으로 찾아올 것이 아니라 노아가 비둘기를 따라 바깥 세상으로 나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문의 말 못하는 두 날짐승의 모습에서 사람들의 두 가지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까마귀는 까마귀 같은 사람을 상징하고 비둘기는 비둘기 같은 사람을 상징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까마귀 같은 성도와 비둘기 같은 성도는 각각 어떤 사람인가를 살펴보며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까마귀 같은 사람 (= 은혜를 알지 못하는 자, 세속적인 자)

6-7절=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어둡고 캄캄한 방주 속에서 오랫동안 지낸 노아는 온 세상을 뒤덮었던 물이 얼마나 감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까마귀를 내보냈습니다. 그런데 많은 날짐승 중에 왜 까마귀를 내보냈을까요?  

우선 까마귀는 썩은 고기를 먹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홍수 후 이곳 저곳에 널린 시체들은 까마귀의 밥이 되기에 적절했을 것입니다. 만약 까마귀가 방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는 땅 위에 물들이 현저히 감해졌음을 암시할 것입니다. 

“날아 왕래하였더라” 의 두 동사(야초, 와쇼브)에는 모두 부정사 절대형이 사용되어 까마귀의 행동이 계속되고 있음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방주 밖의 세상의 상황이 어떠한지 알기 위하여 까마귀를 내어보냈지만, 까마귀는 방주로 돌아오지 않고 계속하여 스스로 원하는 대로 앞뒤로 날아다니기만 하였던 것입니다.

아마도 까마귀는 방주 안에서 답답하게 살아가다가 세상으로 나가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썩은 고기를 찾아 제멋대로 행동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까마귀의 모습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 마음대로 생활하는 타락한 교인을 상징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의 까마귀는 방주 안에서 노아와 함께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까마귀는 노아에게 방주 밖의 소식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까마귀와 같은 교인은 교회에 속해 있으나 영원히 머무르지는 않는 악한 자를 상징합니다.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자의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사 26:10). 

우리는 까마귀처럼 은혜를 저버리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 6:1).

일반적으로 까마귀는 건망증을 생각나게 하는 동물입니다. 로마 사람들은 까마귀를 건망증의 상징으로 취급했고, 한국 사람들도 건망증 많은 사람에게 까마귀 고기를 먹었느냐고 놀리지 않습니까?

까마귀는 방주에서 나가는 즉시 방주 속을 잊어버렸습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러한 까마귀의 행동을 가리켜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하고 세상으로 나가는 교인들의 그림자’ 라고 했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떠났던 하나님께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의 현장으로 되돌아오는 것이고 말씀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까마귀처럼 건망증이 심한 사람은 아닌지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까마귀와 같은 성도는 아닌가요? 비둘기에게나 까마귀에게나 방주는 영원히 잊어버릴 수 없는 은혜의 보급자리였습니다. 어찌 그 은혜를 잊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더러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까마귀와 같은 자입니다. 답답한 방주에서 까마귀가 나온 때는 땅의 물이 아직 마르기 전이었기 때문에 온 천지가 지저분하고 습기가 가득했을 것입니다. 까마귀는 썩은 시체와 진흙탕 투성이인 그곳이 좋았습니다. 

까마귀는 썩은 고기를 잘 먹는 새입니다(잠 30:17). 모세 율법에도 까마귀는 부정한 새로 되어 있습니다(레 11:13-19). 방주에서 나간 까마귀는 제 세상을 만난 것입니다. 홍수 심판은 생각지 않고 오히려 방주 속의 갑갑했던 생활을 원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방주 속으로 돌아오겠습니까? 

어느 촌에서 전도를 마치고 돌아가는 한 선교사가 며칠 간 묵었던 성도의 집에 쓰다 남은 세탁비누를 주고 갔습니다. 그런데 비누를 처음 본 그 집주인은 떡인줄 알고 식구들과 나누어 먹었으나 통 맛이 없었습니다. 도리어 불쾌하게 여겨져 주인은 선교사가 다시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해가 지나서 선교사가 다시 오자 주인은 비누 먹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선교사는 웃으면서 “그것은 더러워진 옷을 깨끗이 세탁하여 입으라고 드린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주인이 “그것으로 더러워진 옷을 세탁하면 희어지는가요?” 라고 묻자, 선교사는 “그렇습니다” 고 했습니다. 그 때에 주인은 대단히 기쁜 표정으로 춤을 추었습니다. 이번에는 선교사가 주인에게 “왜 그렇게 기뻐하시오?” 라고 묻자 주인이 대답합니다.  

“그 비누를 우리 집 식구가 다 먹었으니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졌을 것이 아닙니까? 나는 정말로 기쁩니다.” 

인간의 죄는 물 가지고도 비누 가지고도 씻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어린 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써만 정결케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앉아야 할 곳과 가야할 곳에 대한 분별이 필요합니다. 오늘 많은 성도들은 세상의 재미에 도취하여 자기의 본분을 잊어버리고,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기웃거리고 앉지 말아야 할 자리에 앉으며 취하지 말아야 할 것에 취하고 있습니다. 

까마귀를 방주에서 내어보낸 것은 그러한 것들을 취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중에 취해도 됩니다. 지금 까마귀가 해야 할 일은 방주로 돌아가 땅의 상황을 알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이 까마귀처럼 자신의 사명을 잊고 육적인 것에 도취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2. 비둘기 같은 성도 (= 순결 추구, 복음의 전령) 

8-9절= “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노아는 물이 감한 여부를 알기 위해 이번에는 비둘기를 내어보냈습니다. 비둘기는 까마귀와는 달리 흰색의 정결한 동물로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사용되기도 합니다. 비둘기는 귀소성(歸巢性)이 강하여 옛날부터 통신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은 여호와께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을 ‘돌아올 때를 아는 비둘기’와 대조하고 있습니다(렘 8:7). 이로보아 비둘기는 까마귀에는 없는 회귀본능(回歸本能)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노아가 까마귀 다음으로 비둘기를 선택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방주 속에서 오랜만에 밖으로 나온 비둘기는 돌아다니다가 다시 방주로 돌아왔습니다. 비둘기에게는 마른 땅에만 앉는 특성이 있는데, 당시 땅은 물이 채 빠지지 않았고 물이 빠진 고지대 역시 건조되지 않은 상태에서 더럽고 지저분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방주 밖으로 날아간 비둘기는 당연히 쉴 곳을 찾았으나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왔습니다. 온 지면에 물이 있었다는 것은 아직도 죄로 세상이 더럽혀져 있는 상태임을 의미합니다.   

순결한 비둘기는 물의 범람으로 인해 더럽혀지고 시체들이 떠다니는 지저분한 세상에서는 만족과 평안을 얻지 못하고 비록 답답하고 좁은 처소이지만 방주 안에서 평안을 얻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참 성도는 본문의 비둘기와 같습니다. 신앙의 사람에게 있어서 순결은 생명보다 더 귀중한 것입니다. 순결이 상실된 것은 이미 신앙 자체가 상실된 것입니다. 비둘기 성도는 순결을 생명보다 귀중히 여깁니다. 그들은 부패가 가득한 세상에서는 만족과 평안을 얻지 못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이 만족과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비둘기는 거룩함을 추구하는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비둘기가 방주 밖에서 안식처를 찾지 못하고 방주 안으로 돌아온 것은 거룩함과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거듭난 성도는 죄악과 더러움과 부패한 것들로 가득찬 세상에서는 어떠한 만족이나 평안함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김준곤 목사님이 서울에서 공부하던 학생 시절, 방을 얻어 자취를 할 때 돈도 쌀도 다 떨어져 버렸습니다. 많은 학생 친구들이 와서 함께 먹고 마시니 도저히 당할 재간이 없었습니다. 반찬이라고는 소금만 남았습니다. 보름 동안 야채를 먹지 못하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근처에 배추 밭이 있었는데 비가 오는 날 밤에 그곳을 지내다가 문득 집에 소금이 있으니까 저 배추를 가져다가 김치를 담아 먹으면 살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이 나쁜 생각이었지만 충동적으로 배추 한 포기를 몰래 뽑아가지고 집에 돌아와 소금에 절어서 정신없이 먹었습니다.  

그러자 심중에 죄책감이 생겼습니다. 밤 12시쯤 되어 배추 절인 것을 모두 변소에다 쏟아버리고 “나는 도둑놈이고 거지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는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배추 밭 주인을 찾아가서 “저는 사실 이 부근에서 공부하는 학생으로 당신의 배추 한 포기를 몰래 가져갔는데 지금은 돈이 없지만 주소를 적어 두었다가 나중에 반드시 갚겠습니다” 하면서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 주인이 잠시 가만히 있더니 오히려 감사하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감격했다고 하며 항상 뽑아다 먹으라고 까지 하더라는 것입니다. 비둘기 성도의 승리의 간증입니다. 

10-11절=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두 번째 방주에서 나간 비둘기는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가 저녁때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저녁때’ 에 돌아왔다는 것은 첫 번째와는 달리 이번에는 비둘기가 하루 온 종일 밖에서 날기도 하며 쉴 수도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방주에서의 안식이 필요한 형편이었습니다. 

실제로 비둘기는 노아가 기다림에 지쳐 더 이상 기대를 걸 수 없는 시점에 홀연히 나타나 소망의 메시지를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비둘기가 갖고 온 희망의 증표는 노아에게 더욱 더 큰 기쁨을 안겨다 주었을 것입니다. 

비둘기가 가져온 증표는 ‘감람 새 잎사귀’ 이었습니다. 여기서 ‘새(new)' 로 번역된 히브리어(타라프)는 ’뜯어내다‘ 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는 비둘기가 물에 떠다니던 감람나무 잎을 물고 온 것이 아니라 나뭇가지에서 ’딴‘ 잎을 물고 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감람나무는 주로 저지대에서 생장하는 식물이므로 비둘기가 이 나무 잎사귀를 물고 온 것은 땅에 물이 많이 감소되었다는 충분한 증거가 됩니다. 비둘기는 노아에게 이 귀중한 소식을 전해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홍수가 지나간 뒤에 나타나게 될 새 세상의 첫 번째 징표가 푸른 나뭇잎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성도들이 세상에 전해야 할 기쁨의 소식입니다. 

온 세상에 파멸과 죽음을 가져왔던 죄가 깨끗이 정화되었고, 그리하여 세상은 선한 삶을 살고자 하는 백성이 살기에 적합한 곳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비둘기 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의 가정과 마음속에 전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온 세상을 깨끗케 하는 위대한 청정기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비둘기의 입에 물린 감람 새 잎사귀는 홍수로 말미암은 멸망이 이제 끝이 났으며, 모든 것이 황폐화된 가운데서 새롭고 좋은 창조가 일어나고 있음을 노아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감람 새 잎사귀는 노아를 보호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피뢰침과 같습니다. 그것은 노아에게 이제 하나님의 진노는 진정되었으며, 폭풍우는 지나갔고, 이 세상에서 평화와 안전을 다시금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줍니다. 

비둘기가 노아에게 가져온 푸른 잎사귀는 인간의 죄에 대한 징벌의 결과로 폐허가 되어버린 세상을 재정비하는 증거와 수단이 됩니다. 감람 새 잎사귀는 옛 강들이 다시 흐르리라는 것을 노아에게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하늘의 비둘기 되시는 성령님께서도 구원의 방주 안에 있는 우리에게 생명나무 잎사귀를 가져다 주십니다. 

감람 새 잎사귀는 새롭게 다시 회복된 세계의 첫 번째 산물로 선택되었습니다. 감람나무는 꽃과 열매가 연달아 열리고 엄청나게 무성한 풍부와 번영 그 자체의 모습입니다. 이 나무는 세상의 풍부를 소유하고 계신 주님의 선함을 잘 드러내 줍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것이 주님의 부활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보십시오. 이제 감람 새잎사귀로 시작된 새 세상은 먼 훗날 겟세마네 동산의 감람나무 아래에서 완성됩니다. 겟세마네의 감람나무 잎사귀들은 그 나무 아래에서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의 고뇌에 찬 기도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면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감람 새잎사귀를 물고 방주로 돌아온 비둘기는 기쁨의 소식을 전하는 성도를 가리킵니다. 비둘기는 방주 속에서 갑갑하게 지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이제는 해방되었다는 해방의 소식이었습니다. 이제는 방주에서 나와도 된다는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전령이었습니다. 비둘기는 생명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령이었습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노아는 세 번째로 비둘기를 내어보냈고, 그 비둘기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12절). 왜냐하면 다시 돌아올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이 깨끗해졌고 새로워졌기 때문이고, 오히려 노아의 가족이 밖으로 나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비둘기의 사명은 끝났습니다. 깨끗한 세상으로 날아간 비둘기는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보는 성도의 상징입니다. 

똑같은 신천 신지의 세계였지만 비둘기와 까마귀는 새세상을 맞이하는 태도 면에서 전혀 달랐습니다. 비둘기에게는 새하늘과 새땅의 모습이었지만 까마귀에게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까마귀의 눈에는 썩은 시체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까마귀도 돌아오지 않았고 비둘기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 차이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비둘기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했기 때문이요, 까마귀는 자기의 욕심에 빠져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는 은혜의 배신자요, 하나는 은혜를 잊지 못하여 그 은혜를 전하기 위해 떠나갔던 것입니다. 
비둘기처럼 신앙의 순결을 지키는 성도가 됩시다. 
비둘기처럼 기쁨의 소식을 전하는 전령들이 됩시다. 
그리고 비둘기처럼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보는 소망이 넘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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