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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브엘라헤로이의 하나님 (창 16: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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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엘라헤로이의 하나님 (창 16:1-16)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였고 그에게 한 여종이 있으니 애굽 사람이요 이름은 하갈이라 2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3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4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5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내가 받는 모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6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7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8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0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2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13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4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15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16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창16;1-16)

오늘 복된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 주시는 말씀은 창16장 말씀으로 ‘브엘라헤로이의 하나님’ 이러한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겠습니다. 이 말씀이 선포될 때 하나님의 위로와 놀라운 은혜가 사랑하는 주원교회 성도님들과 가족위에 함께 하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번 따라서 하시길 바랍니다. ‘브엘라헤로이의 하나님’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난 한 주간 평안하셨는지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가운데 겨울도 다 지나고 새봄을 맞이합니다. 이제는 차가운 칼 바람도 지나간 것 같습니다. 봄이 주는 생동함과 포근함이 성도님 여러분의 가정에 풍성하시기를 원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의 주인공은 사래의 여종으로 애굽 여인인 ‘하갈’ 입니다.  하갈은 성경의 주인공이 되는 인물은 아닙니다. 우리의 관심은 항상 주인공인 아브라함이나, 사라에게 맞추어져 있지만 하나님은 애굽여인이자 종인 하갈도 사랑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나 한사람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새삼 느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불러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는 아이를 갖지 못했습니다. 사라는 고민이 되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약속을 막는 것 아닌가’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을 못하신다. 임신을 못하는 나는 하나님의 계획에 방해물이다’ 하는 생각에 빠집니다. 

혹시 여러분도 이런 생각을 해보신적이 있을지 모릅니다. 참 겸손한 생각이며, 경건한 생각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생각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을 못하신다. 임신을 못하는 나는 하나님의 계획에 방해물이다’ 라는 생각은 하나님을 무능한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못한 하나님, 인간인 나 때문에 할 일을 못하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땅에 떨어뜨리는 생각입니다. 더 나아가서 내가 하나님보다 더 큽니다. 내가 하나님 위에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전능자시며,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운행하시는 분이십니다. 70억 중의 한 명인 나 때문에 뜻이 방해를 받으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아멘???
 
불임에 대한 죄책감으로, 또 자기의 양보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사래는 ‘아브라함의 씨’를 얻기 위해서, 관습에 따라 자신의 여종을 아브람에게 줍니다. 어느 여자가 첩을 들이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사라는 스스로 하나님을 위해서, ‘여호와의 약속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면서 아브라함에게 하갈을 줍니다. 성도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내가 아니면 하나님도 방법이 없어’ 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돕는 것이 옳습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돕는 것이 옳습니까? 정답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희생을 하는 것입니다.  
 
(요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하셨습니다. 사라가 하는 일은 육(肉)에서 난 행동입니다. (롬8;6-7)“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肉)은 영(靈)의 일을 이룰 수도 도울 수도 없습니다.  사라의 노력으로 난 ‘이스마엘’ 은 이삭의 원수가 되지 않습니까? 사라의 행동은 영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혀 영적인 결과를 내지 못합니다.  

성경을 좀 더 깊이 살펴보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가져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이란 말씀 속에서 “사래가... 하갈을 가져(took), 아브라함에게 주다(gave)”라는 표현은 창세기 3:6에서 하와가 아담에게 한 행동과 비슷합니다.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took), “남편에게 주매”(gave)라는 표현과 동일한 단어를 쓰고 있으며 동일한 순서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즉 이 말씀은, 사래가 한 행동, 또한 하와가 한 행동 모두 잘못된 행동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인간의 생각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 본문을 통해서 지혜를 얻기를 원합니다.
 
이제 전혀 생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갈이 잉태했습니다. 그런데하갈이 여주인 사라를 멸시합니다.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4절)  

사실 하갈의 삶에서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여인이 있다면 그것은 여주인인 사라일 것입니다. 하갈의 운명은 사라에 의해서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하갈의 신분이 사라의 여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애굽 사람 이었고, 당시는 신분사회이므로 종은 세습입니다.  그녀는 부모 때부터 종이었고, 종으로 태어났고, 그녀의 자녀도 종으로 살다가 죽을 것입니다. 그것이 운명입니다.  신분사회에서 자력으로 종의 신분을 벗어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런 하갈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아브라함의 씨받이가 되어 종의 신분에서 벗어날 길이 열린 것입니다. 사라가 자신의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 ‘자신의 자녀’ 를 얻으려고 한 것입니다.      

창세기 30장에 보면 야곱의 아내 ‘라헬’ 도 자신의 자녀를 얻기 위해서 시녀 ‘빌하’ 를 남편에게 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근동지방의 관습에 따르면 이런 행동이 비도덕적이거나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일이 아니라 자식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허용되었던 풍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별 저항 없이 사라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사라도 오랜 시간 데리고 있어 본 결과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서 씨받이로 추천을 했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갈에게는 이런 기회를 준 사라는 은인 중에 은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명의 여종 중에서 사라가 자기에게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입니다.        

이처럼 사라의 은혜로 하갈은 아브라함의 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갈이 아브라함의 첩이 되고 아브라함의 아기를 잉태하면서 그 여주인인 사라를 멸시한 것입니다.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전혀 예상 밖의 행동입니다. 하갈은 임신을 하지마자 태도가 돌변하여 자신의 옛 주인인 사라를 무시하다 못해 멸시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분노가 치밀어 오른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강력하게 항변합니다. 

(창 16:5)“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여기서 “나의 받는 욕은” 할 때의 “욕”은 “강포”와 같은 과격한 언어입니다.  하갈이 사라에게 ‘강포’를 퍼부었다는 뜻입니다.  즉 하갈이 격분(激忿)해서 사라에게 막 퍼부었다는 말입니다. 

왜 하갈은 임신을 하자마자 옛주인이자 은인이었던 사라에게 이렇게 멸시와 욕을 퍼부었을까요? 그리고 왜 사라는 이것을 아브라함에게 말을 할까요? 당시 몸종은 주인이 임의대로 처분하면 됩니다. 그런데 하갈이 사라의 몸종이었을 때는 사라 마음대로 할 수 있지만, 이제는 임신으로 아브라함의 아내(첩)의 자격을 얻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그 처분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본부인과 자기 아이를 잉태한 첩 사이의 이 문제를 좀 이상하게 해결합니다. 사라에게 “그대의 여종은 그대의 수중에 있으니 그대의 눈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창 16:6)고 주도권을 사라에게 넘겨줍니다. 즉 아브라함은 두 여자 사이의 갈등 관계에서 자기는 쏙 빠져버린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책임을 떠넘기고 빠져버리는 것이 아브라함의 방법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행동이 가장인 아브라함의 특기입니다. 그는 이미 두 번이나 애급에서(창12장) 또 그랄에서(창20장) 자기 살겠다고 아내인 사라를 ‘누이’라고 속인 경험이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무책임하게 떠넘긴 결과는 비극입니다.  남편 아브라함으로부터 허락을 받은 사라는 하갈을 학대합니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6절) 여기서 “학대”라는 표현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괴롭힘을 당한다.”는 표현과 같습니다. 애굽사람들이 이스라엘을 학대한 것처럼 사라는 임신한 하갈을 학대하였습니다. 그 학대를 견디지 못한 하갈은 아이를 임신한 몸으로 도망했습니다.  

성도여러분, 아브라함의 가정의 이야기가 어떻습니까? 엉망이지요?  아브라함의 씨를 바라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한 일이 다 깨어지고, 아브라함, 사라, 하갈 모두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만 남긴 채... 임신한 하갈의 가출로 결말이 납니다.  정말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가정이 아브라함의 가정입니다. 
  
우리는 하갈을 주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하갈은 왜 임신을 하자마자 태도가 변하여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사라에게 그런 배은망덕한 행동을 하였을까요? 성도여러분, 하갈이라는 여자는 한 맺힌 여자입니다. 대대로 노예로 살아왔던 여인, 태어나면서 종인 그녀의 혈관속에는 종의 피가 흐르고 있었고, 단 한 번도 자유를 누려 볼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오로지 복종, 책망, 채찍에 익숙해 있던 여자요, 미래에 대한 아무런 희망과 꿈을 가질 수 없는 여자입니다. 미래를 꿈꾸면 종의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에서도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말할 줄 아는 짐승, 일하는 기계가 종이요 노예입니다. 그런데 종으로 살다가 죽는 것이 운명인 그녀에게 비록 정실은 아니지만 후실(첩)으로라도 아브라함의 아내가 되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환경이 찾아 왔습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흔히 생각하듯이 큰 은혜가 주어진 것을 고마워하고, 사라에게 늘 감사하면서 사이좋은 언니 동생이 될까요? 아마도 임신을 하기 전에는 그런 마음 이었을 것입니다. 아직 그 자리가 확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임신하여 후실의 자리가 굳어지고 자유가 확정이 되면 어떨까요? 그동안 받았던 것, 자기 속에 채워져 있던 것이 나옵니다.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하갈이 노예로 있으면서 받았던 온갖 냉대와 무시들. 하갈의 가슴 속에는 이런 한(恨)들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동안은 노예였기에 어디에도 발산 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노예가 이런 것을 조금이라도 불평하면 엄한 형벌이 따릅니다. 그런데 이제는 노예가 아닙니다. 

그러니 속에 있는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호된 시집살이를 한 며느리가 나중에 독한 시어머니가 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꾸중을 잔뜩 들은 사람이 자기를 반기는 강아지를 냅다 차버리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속에 있는 울분을 만만한 것에게 풀어버리는 것입니다. 하갈이 은혜를 베푼 옛 주인에게 은혜를 원수로 갚은 이유가 이것입니다.  하갈 속에 들어 있는 온갖 상처(스트레스)들이, 쏟아질 기회조차 없던 것들이 조건이 해제되자 봇물처럼 터져 나온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사람은 그런 하갈의 행위를 이해해 주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이런 행동은 사람이 볼 때는 배은망덕입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지요.  하갈은 사라에게 그렇게 보복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하갈을 어떻게 보실까요? 하나님은 하갈의 무엇을 보실까요? 사람처럼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을 보실까요? 아니면 사람의 속의 상처를 먼저 보실까요?   (삼상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이제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의 가정사에 들어오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7절)  그 당시 신분사회에서 종이 주인에게서 도망하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일입니다. 도주하는 종이 잡히면 무서운 처벌이 있습니다. 사라의 학대가 얼마나 심했던지 하갈은 죽음을 각오하고 광야로 도망을 갑니다.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척박한 땅입니다. 하갈은 슬픈 마음을 안고 아예 죽을 생각으로 광야로 갔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셨습니다. “하갈아, 네가 어디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나의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하나님의 사자는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성도여러분, ‘이스마엘’ 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나의 고통을 들으셨다’ 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을 지켜보시고 계셨습니다.   

하갈의 가슴속에 있는 마음의 고통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하갈을 못된 사람, 배은망덕한 여인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갈의 마음속의 실상을 보시고 아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사람속의 상처와 고통을 아시는 하나님은 샘물가에서 광야를 헤메는 목마른 하갈, 그러나 더 심한 마음의 갈증을 가진 하갈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목마름을 채워주셨습니다. 무엇으로 어떻게 채우십니까??     

하나님의 사자는 하갈에게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지어주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고통을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갈의 모든 것을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여종 하갈의 억울한 일도 다 듣고 같이 아파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마엘’ 은 아브라함의 아들이기도 하지만, 하갈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단순한 이름이 아닙니다. 목마른 하갈의 갈증. 하갈의 평생의 한을 풀어주시는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갈에게 이렇게 약속해 줍니다. (창 16:10)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하갈아,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어디에도 하소연 할 곳도 없이 구박만 받으면서 노예로 살아오면서 얼마나 고통스러웠니. 그렇게 살아온 너의 고통을 나는 잘 알고 있단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네 마음을 다 안다. 그리고 네 아들에게 큰 복을 주어 너처럼 살지 않게 하겠다’  어디에도 책망의 말씀이 없습니다. 하갈의 쓰리고 아픈 가슴을 품어주시는 따스한 품입니다.  그 품속에서 하갈은 울고 또 울었습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4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사실 그녀에게는 아직 한 번도 마음 놓고 울 자유조차 없었습니다. 피눈물을 늘 혼자 삼켜야만 했던 인생이었지만, 이제는 자기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녀의 눈에서는 광야의 샘보다 더 깊은 눈물의 샘이 펑펑 솟아올랐습니다. 그 눈물은 그냥 눈물만이 아니라 그녀의 속에 있던 한이 같이 쏟아져 나오는 눈물입니다. 이 눈물이 흘리고 난 하갈은 이제 순한 양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하십니다. 하갈에게 본래의 자기자리 즉 사라의 종으로 돌아가 복종을 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먹고 살기 위해서 다시 옛날로 돌아가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또한 윤리, 도덕의 최소한을 지키라는 요청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靈)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마엘’ 이 복을 받는 것은 그 어머니인 하갈이 복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에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때문이며, 그 약속을 지키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하갈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임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라에게로 돌아가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축복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갈이 사라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축복의 전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이 요청을 행하게 하시는 능력(能力)이 됩니다. 자기의 한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품에서 실컷 울고 난 하갈,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의 샘물을 마음껏 마시고 갈증이 해결된 하갈, 이제 그녀는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음속의 모든 상처는 그녀가 흘린 눈물과 함께 다 녹아나왔습니다. 하갈 속에 가득 차 있던 온갖 상처의 자리에는 무엇으로 채워졌을까요? 술 김 샘 곁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제 하갈에게서는 옛날의 악행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치유를 받았기에, 이제는 옛 주인 사라에게 복종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위로(慰勞)하시고, 치유(治癒)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갈은 자신 속에서 일어난 변화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샘의 이름을 “브엘 라헤 로이” 라고 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입니다.    

성도여러분, “브엘 라헤 로이”는 하나님께서 병든 영혼을 치유하시는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 사마리아 여인, 삭개오, 군대귀신 들린 사람, 배반하고 떠난 제자들을 비롯하여 온갖 문제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치료하시는 원리와 이치입니다. 저도 이 하나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만난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 이셨습니다. 

(고후1;3-4)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저와 여러분이 “브엘 라헤 로이”의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하갈이 만난 하나님을 저와 여러분도 다 만나시기 바랍니다. 또 하갈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어느 목사님의 고백을 소개하면서 말씀을 마칩니다.  

‘설교만 잘 하면 되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삶이 없는 설교는 성도들의 귀만 키우는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기도만 잘 하면 되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회개 없는 기도는 교만한 바리새인은 만들어 내는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심방만 잘 하면 되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마음이 없는 심방은 성도들의 가려운 곳만 긁어 주는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장소만 좋으면 교회가 부흥되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영혼을 찾아가는 사랑이 없는 부흥은 주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되는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많은 의미가 있는 말아닙니까?  우리주원교회가 하나님의 영과 내 영혼이 만나고, 또 사람과 사람이 영혼과 영혼의 만남이 있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여 그런 교회로 만들어 주시옵소서.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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