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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르심의 사실들 (창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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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의 사실들 (창 12: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1-3)

오늘 본문은 아브람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워낙 유명한 분문이라 여러 번 설교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부르심 뒤에 숨어있는 몇 가지 사실들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진리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요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하셨습니다. 성경의 진리가 저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눅4;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하셨습니다.   포로가 되었으면 자유를, 눈이 멀어 못 보았으면 다시 보게 됨을, 눌렸으면 자유케 되는 이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성도여러분, 성경은 ‘구원의 책’입니다. 성경의 기록 목적 중의 하나가 인간의 구원이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를 보면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느냐 하는 이야기 보다는, 뱀의 유혹을 받아서 인간이 범죄하는 이야기가 먼저 나옵니다. 인간을 구원받지 못하게 하려는 사단의 방해가 가장 처음부터 기록이 되어있는 것이지요. 물론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 말씀을 ‘원시 복음’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처럼 사단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계속됩니다. 그러나 실패를 알면서도 어찌하든지 인간을 구원받지 못하게 하려는 사탄의 방해도 계속 이어집니다.  가인에 의해서 경건한 아벨이 살해당하고, 죽은 아벨대신 주어진 셋의 후손도 타락을 합니다.  

(창6;5-6)“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6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노아를 술에 취하게 하였고, 하나님이 선택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애굽왕 바로와 동침시키려고 하였고, 하만을 통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진멸시키려고 하였고, 심지어는 베들레헴 근처의 두 살 이하의 남자 아이를 모두 죽이는 방법으로라도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사실 성경의 기록은 구원을 못 받게 하려는 사단의 방해기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끝까지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이런 구원의 손길이 특히 잘 나타나 있는 것이 아브라함과 다윗입니다.  

(마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성경은 예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당당하게 말씀합니다. 또 우리들도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갈3;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가계를 통해서, 또 본문의 부르심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몇가지 사실들을 보여주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서 진리를 깨닫고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이제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볼 것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가계입니다. 

성경을 조금만 살펴보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가계(家系)는 한마디로 말하면 콩가루 집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람의 아버지는 ‘데라’ 인데 그는 전승에 의하면 우상을 만들어 파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갈대아 우르지방에서 유행했던   달신을 만들어 팔아 생활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상 숭배하는 사람 정도가 아니라 우상 제조공장의 주인입니다.  이 우상 제조공장의 주인인 ‘데라’는 칠십세에 세 아들을 낳았는데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습니다.

(창11;26)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학자들은  이들을 세쌍둥이로 보지는 않습니다. 세 아들을 한꺼번에 기록을 한 것입니다. 또 아브람을 제일 막내로 봅니다. 다만 영적인 중요성으로 이름을 먼저 기록을 했다고 봅니다. 제일 큰아들로 보이는 하란은 그 아버지인 데라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불효 중에 가장 큰 불효가 부모보다 세상을 먼저 떠나는 것이요, 불행 중에 참으로 못할 일이 자식을 먼저 앞세우는 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세 아들 중의 한 사람은 일찍 죽었습니다. 다른 아들인 나홀은 죽은 형 하란의 딸 ‘밀가’ 와 결혼을 합니다.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창11;29)  당시에 친족결혼이 일반적인 관습으로 행해지던 때였다고 하지만, 형의 딸과 결혼을 한다는 것은 정말 흔치 않은 것이고,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에서는 이런 것을 절대로 금하고 있습니다. 나홀의 이런 결혼은 당시에도 부끄러운 일로서 아버지 데라의 큰 근심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람역시 4촌이나 8촌정도 되는 친족 누이동생을 아내로 맞이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아브람에게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사래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아이가 없다는 것은 정말 가정의 큰 불행입니다.  

결론적으로 보면 우상 제조공장을 하는 데라의 집은 3아들 모두 온전한 아들이 하나도 없는 아주 문제가 많은 집안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이 있는 셈의 후예로서 아버지는 우상을 만들어 먹고 사는 영적인 타락이 극심한 사람이었고,  한 아들은 먼저 죽었고, 한 아들은 손녀와 결혼을 했고, 또 한 아들은 70세가 되도록 자녀가 없었으니 참으로 낭패스러웠을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람의 아비 데라의 가정은 영육간에 실패한 가정입니다. 혹시 저와 여러분의 집안은 어떻습니까? 명문가이고 귀족인가요?  아니면 남에게 말하기 부끄러운 별로 내세울 것 없는 집안인가요?    그러나 정말 놀라운 것은 바로 이런 가정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정에서 자란 아브람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큰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부르심에는 ‘資格 基準’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다윗의 집안을 살펴보면 그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사실 다윗의 가계를 보면서 저는 큰 충격과 그만큼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너무 너무 은혜가 됩니다.  먼저 다윗은 자기 아버지에게서도 잊혀진 아들이었습니다.  

(삼상16;11)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선지자 사무엘이 찾아온 그 순간에도 다윗은 들에서 양을 돌보고 있을 정도로, 그는 아버지와 형들에게서 잊혀진 아들이었습니다. 아무리 내놓은 자식이라도 선지자 앞에서까지 이럴 수는 없습니다. 보통 막내아들이 부모의 사랑을 더 많이 받는 것을 보면 이해가 안 되는 다윗의 집안입니다.  학자들은 다윗이 첩의 아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좀 더 나아가서  다윗의 집안을 살펴보면 아브라함의 집보다 훨씬 더 콩가루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2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3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마태1;1-6)  

다윗의 고조모인(=4대 할머니) 라합은 여리고성의 기생이었습니다. (수2;1)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그녀는 이방여인이었고, 직업은 수많은 남자들과 성관계를 가지는 기생입니다. 그런데 살몬이 그녀와 결혼(?)을 했느지.. 다윗의 증조 할아버지인 보아스를 낳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보아스는 어머니가 이방여인이요 기생인 라합입니다. 그런데 이 보아스는 나이 많아서 모압 여인인 룻과 관계해서 오벳을 낳습니다. 다윗의 증조모(=3대 할머니)인 룻은 모압 여인이었고, 기룐의 아내였으며, 나중에 나이 많은 보아스와의 사이에서 오벳을 낳습니다.  또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는 두 여인을 둔 것으로 보이며, 다윗 본인은 첩의 아들이라는 학자들의 연구가 있습니다. 아니면 사무엘이 온 순간에 다윗만을 그렇게 버려둘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았더라도 다윗의 가계는 처녀결혼이 거의 없고 특히 이방여인들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다윗자신도 수많은 아내를 두는데, 저는 다윗의 아내가 몇 명인지를 헤아릴수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다윗이 조상의 혈통의 영향인지... 많은 아내 중에서 결혼 전에 처녀였던 사람이 거의 없고 대부분 남의 아내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기의 왕위를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였던 밧세바의 아들인 솔로몬에게 넘겨줍니다. 밧세바 또한 이방여인이자 다른 사람의 아내였었습니다.  천하에서 가장 지혜로운 왕이라고 불리는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보다 훨씬 더 여자관계가 복잡하고, 이 세상의 어떤 왕이나 권세자 보다 더 여자를 밝히는 왕이었습니다. 그는 700처, 300첩을 두었고 특히 이방여인을 사랑하였습니다.

(왕상11;1,3)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3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 이것이 다윗의 가계에 흐르는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아들’ 이라는 말은 순수한 유대인 혈통이 아니라는 말과 같은 말이고, 더 나아가서 일부일처가 아니며, 이방여인이라도 반드시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였거나 직업적으로 많은 남자를 상대하는 여자가 혈통에 있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 혈통이 다윗과 솔로몬 본인들에게서 잘 나타나있습니다. 지금 현대에서도 이런 가계는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가계입니다. 

그런데 성도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恩惠)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아브람과 다윗의 혈통으로 오셨다는 것이 죄인인 우리를  얼마나 위로 하는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혈통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제까지의 죄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직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 다윗이 가졌던 신앙만이 중요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 사실을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보아야 할 사실은 아브라함의 나이입니다. 

아브람의 나이 이제 75세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인생의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가고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세월이 다 지나간 노인입니다. 황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75세 된 아브람에게 ‘이제부터...’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이 말씀은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제부터...’ 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제부터...’ 라고 말씀하시면 우리도 이제부터인 것입니다. 이제부터 복을 받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을 주어.. 이름을 창대하게’ 하실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에게 소망과 용기와 가능성을 주시는 말씀 아닙니까??? 지나간 날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요, 오늘과 앞으로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제부터 누가 나를 인도하시고, 이제부터 내가 누구의 손에 이끌림을 받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왜 75세라는 것을 분명하게 기록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75세 된 사람을 사용해서 커다란 민족을 이루시는 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는데 ‘아닙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 마십시오. 나를 쳐다보고 스스로를 제한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불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비워드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바울 사도의 고백대로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고 고백하면 됩니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이제부터 놀라운 일이 저와 여러분들에게서 일어날 것입니다. 아멘. 


세 번째로 보아야할 것은 명령과 약속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의 말씀에는 항상 두 가지가 있습니다. 뭔가요? 
첫째는 ‘명령(命令)’의 말씀입니다. 명령은 요구입니다. 순종을 요구하는 말씀이 명령의 말씀입니다. 아브람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는 ‘떠라라’ 는 명령과 ‘가라’ 는 명령으로 되어있습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1절)

떠나라!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 너가 이제까지 의뢰하고 신뢰하는 모든 것을 떠나라는 말입니다.  가라!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분만을 바라보며 믿으라 입니다.  이 두 명령은 삶입니다. 그저 ‘마음으로만 믿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은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그는 모든 것들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서 갔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완벽한 순종은 아니었지만... 그는 행동으로 믿음을 나타낸 사람입니다. 

성경은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쫒아 갔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4절)  믿음의 조상이 되는 축복된 길은 말씀을 쫒아 가는 길입니다. 상황을 쫒아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는 약속(約束)의 말씀입니다. 말씀에는 반드시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면 말씀을 쫒아 떠나는 아브람에게 어떤 약속의 말씀이 주어졌습니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2,3절) 

성도여러분, 축복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부분입니다. 이전의 아브람의 상황을 완전하게 바꾸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언제나 우리의 상황을 완전히 바꾸어 놓으십니다.  내가 하신다는 하나님.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내가’라는 말을 여러 번 사용하십니다. ‘네’가 하는 것이 아니요, ‘내’가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나의 본토가 되고, 친족이 되고, 아비가 되겠다 하십니다. 

성도여러분, ‘나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고, 나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나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나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 이라는 약속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지 아브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실까요? 안 지키실까요? 반드시 지키십니다.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이 해야 할 것을 다시 되풀이해서 말씀드립니다. 

아브람이 할 것은 오직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자신이 이제까지 의지하고 발판을 삼던 모든 것)을 떠나고, 이제 부터는 하나님 말씀만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전에 하던 모든 삶의 방식과 습관을 바꾸고 이제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모든 약속은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씨앗이 하는 일은 오직 심기는 것입니다. 자라게 하시고 열매를 맺도록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설교를 하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스스로를 돌아보니 저도 꿈이 있고 욕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험한 세상을 살아오면서 세상은 너무나 거대하고 나는 너무나 작아서 그 꿈과 욕심의 끝자락도 만져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다 사라졌느냐? 그렇지 않았습니다. 비록 이루지는 못했지만 가슴속 깊이 억눌려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 “떠나 가라” 그 꿈과 야망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제 후로는 하나님의 말씀만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죽으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전혀 새로운 삶을,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으라는 말입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나는 없고 하나님만이 있게 됩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가시겠습니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 약속의 말씀을 철썩같이 믿으시겠습니까? 
 
콩가루 집안에서 우상을 보면서 자란 아브람은 믿고 떠났습니다.  다윗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믿고 순종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이루어지는 말씀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 그 분은 죄인의 후손으로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란을 떠났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제부터’ 시작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명령에 순종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의 삶에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주인공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제2의 아브라함, 제3의 다윗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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