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무화과나무의 순종 (마 21:18-22)

첨부 1


무화과나무의 순종 (마 21:18-22)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마태21;18~22)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주기도문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옵시고’ 이 말씀그대로 되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요, 우리의 소원이며, 교회의 소원입니다. 아멘이시죠? 하나님의 소원이 곧 우리 교회의 소원이요, 나의 소원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지금 한국교회는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현실과, 사회로부터 인기 없는 종교라는 평판을 듣고 있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가 ‘개혁’되어야 하고 ‘부흥’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오늘 본문의 무화과나무를 깊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미국의‘나이아가라폭포’나 ‘그랜드케년’을 보면서 우리는 자연의 웅대함을 느낍니다.‘만리장성’이나‘피라미드’또 하늘을 찌르듯이 솟아있는 도시의 고층빌딩들은 정말 인간은 대단하구나 하는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뿌리부터 마른 무화과나무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줄까요?    

저는 오늘의 본문이 항상 궁금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른 아침에 예수님은 시장하셨다’이렇게 시작되는 본문은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했습니다. 문제는 이때가 유월절로 무화과가 열매를 맺는 시기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병행구절인 마가복음 11장 13절에는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고 분명하게 적어놓았습니다.

 성도여러분,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 감람나무와 함께 이스라엘의 3대 나무이면서 과목입니다. 무화과는 3,4월에 가지에서 새 잎이 나오는데, 이것을 푸른 무화과(히. 파그 ; 아2:13)라고 부르고, 아직 즙을 갖지 않아 먹기에 부적당하지만 그 시기에는 다른 과일들이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먹기도 합니다. 

이때에 남은 무화과들은 실제적인 첫 추수기인 6월에 싹이 나서(=이른 무화과)  8월 추수기에 익습니다. 이 늦은 무화과(히. 테에님)들은 즙이 풍부하고 매우 달콤하기 때문에 가장 이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유월절은 3월입니다. 당연히 무화과의 철이 아닙니다. 만약에 무화과가 목재로는 부적합하나 열매를 맺지 못하면 가정용 땔감이나 제사때의 장작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오직 열매로 사람들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그 무화과를 예수님은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하고 저주하신 것입니다. 열매 외에는 기대할 것이 없는 나무에게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저주하셨습니다. 그것도 무화과의 때가 아님을 아시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왜 예수님께서 때가 이르지도 않은, 그래서 열매가 없는 것이 당연한 무화과를 이토록 저주를 하셨을까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① 예수님이 시장기를 채우지 못해 홧김에 저주하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성품을 생각할 때 아무래도 바른 해석이 아닌 것 같습니다.  

② 본보기로 그랬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에 예수님은 죽으러 오셨습니다. 이제 며칠 후 유월절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예루살렘은 제자인 유다의 배신과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합작으로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한 것을 예수님도 우리도 알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열매가 없는 이스라엘에 대해, 메시야이신 자기를 배척하고 십자가에 죽이는 선민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한 징벌을 상징하는 본보기로 보여준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두려움 입니다. 아직 열매 맺을 때도 아닌 무화과나무를 열매 없음에 대한 본보기로 저주를 하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이미 열매를 맺을 시간이 몇 번이고 지났는데도 있어야 할 성령의 열매는 없고 오히려 없어야 할 죄의 열매만 가득한 오늘 우리들은 어찌합니까. 우리 중 아무도‘저주’에서 자유로울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언제 ‘저주’를 받을지 모릅니다.  제자들도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의 대답이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잘 보았느냐 너희도 정신 차려라. 남 일이 아니다. 너희도 열매 없으면 이렇게 된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라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이 대답은 의심 없는 믿음의 기도가 일으키는‘기적’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무화과나무에게 일어난 기적뿐만 아니라 산(山)더러 바다(海)에 빠지우라 하여도 그대로 이루어지는 더 놀라운 기적도 일어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이 무화과나무의 사건에 대한 예수님의 결론은 확실합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의 응답에 대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그 나무가 말라 죽은 것이 ‘기도의 응답, 기도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저주받아서 말라버린 무화과 나무를 보면서 기도의 능력에 대해서 교훈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아보고 또 묵상을 했습니다. 본문의 앞과 뒤를 같이 읽으면서 이 말씀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지를 묵상을 많이 했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결코 어려운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 책입니다. 신학자들만, 신부나 목사들만 읽고 이해하도록 주신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을 사용해서 꼼꼼히, 되풀이 하여 읽으면 다 깨닫게 되어있는 책입니다. 이럴 때에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Q.T.할 때의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누구신가?, 본문은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성령님에 대해서 무엇을 보여주시는가?’  그러자 본문이 보였습니다. 

성도여러분, 성경은 66권이지만 통일성이 있는 한권입니다. 그러면서도 각권마다 특징이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 하는 복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은 왕(王)이신 예수님을 그립니다.  마가복음은 섬기는‘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누가 복음은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요한복음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사자복음, 마가복음은 송아지 복음, 누가복음은 인자복음, 요한복음은 독수리복음이라고도 부릅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에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유대인이 기다리고 기다리는 왕(王)으로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21장 처음을 보십시오. 우리 예수님은 왕으로 예루살렘 성에 나귀를 타고 입성 하십니다. 이는 구약 스가랴서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슥9;9)“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그리고 성전에 들어오신 예수님은 제일 먼저 자기의 집이신 왕궁, 곧 성전을 청결하게 하십니다. (마21;12~1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13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 도다 하시니라”  또 자기를 다윗의 자손 메시아로 여겨서‘호산나’하는 사람들의 말을 당연한 것으로 받으시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그렇다”라고 성경을 인용하여 대답을 하십니다.   

또 본문의 뒤에서는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과‘권세’에 대하여 논쟁을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21;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하시면서 감히 예수님에게 권세를 따질 때에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하심으로 자신의‘권세’가 하늘로서 온 것임을 간접적으로 주장 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그분은 천지를 창조하신 왕이십니다. 제자들도 대 제사장들도 백성의 장로들도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무화과나무는 예수님이 왕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왕이신 그분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을 합니다. 왕의 명령을 받아들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뿌리부터 말라버린 무화과나무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어주실 수 있는 왕(王)이심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는‘개혁과 부흥’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 교회가 부흥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여기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정말 양적으로 질적으로 부흥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저도 같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부흥 과 개혁’에 대해 고민을 하면서 본문에 나오는 무화과나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신앙에는 두 가지 모습이 있다고 말 합니다. 하나는 나를 위한 하나님 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위한 나입니다. 전에 서울에서 교회를 섬길 때, 제가 아는 한 분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시장에서 생선가게를 하십니다.  

여러 교회에 등록을 한 분으로 지금은 교회를 쉬고 있습니다. 한 교회에 등록을 하고 2~3개월 다니다가는 그만두고, 옆의 다른 교회에 등록을 하고 또 2~3개월을 다니고, 이런 일을 되풀이 합니다. 교회가 새로 등록한 신자의 가게를 도와주려고 애쓰는 것을 알고 일부러 그렇게 하는 행동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나 말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어차피 나 잘 될려고 믿는 것 아니냐” 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의 시간과 삶을 바치는 신앙도 있습니다. (요12: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는 말씀처럼 자신이 죽고 썩어 많은 열매를 맺는 삶이 있습니다.  본문의 무화과나무는 후자의 경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배우는 첫 번 째 교훈은‘순종(順從)’입니다.  ‘예수님 당신이 나를 축복하십니까? 내가 축복의 존재가 되겠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나를 저주하십니까? 내가 저주의 존재가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나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축복만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축복해 주셔야 하나님이다’ 라고까지 생각을 하며, 일이 안되거나 몸이 아프면 뭔가 이상하고 잘못되었다고 항상 답을 내립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2007년 분당샘물교회에서 아프가니스탄에 선교를 가서 탈레반 반군들에게 옴 몸에 총을 맞아 죽은 배형규 목사님의 죽음을 기억하십니까? 그 분의 죽음은 축복입니까 저주입니까? 그분은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또 수많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예수님을 위하여 기꺼이 고난의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 고난은 축복입니까, 저주입니까? 무엇보다 우리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축복입니까 저주입니까?  좀 더 쉽게 말을 할까요? 부모님들 여러분, 자녀들을 사랑하시지요? 자녀들을 위해 오늘도 고생하시지요? 그 고생이 저주입니까? 자녀가 없었으면 이 고생 안하고 편하게 살텐데 하시나요? 아니면 고생이 되어도 행복이고 축복입니까?  결혼을 하고 십년이 지나도 자녀가 없어보십시오. 참 편하고 행복하겠다 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자녀가 없는 것이 아픔입니다. 자녀를 위한 수고는 축복입니다.
  
아마도 무화가나무가 사람이라면 ‘예수님 당신의 저주를 받아 뿌리부터 마른 것이 저의 행복입니다. 계절이 되지 않아 당신의 시장기를 달랠 열매는 드리지 못하지만, 나의 전부를 드려서 당신의 왕 되심을 증거 하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예수님 당신은 나의 왕이십니다.’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이 저주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무화과나무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제자들은‘뭐 예수님의 말씀도 아무것도 아니잖아. 괜히 빈말이잖아. 예수님의 말씀은 아무 권세가 없는 말이구먼’라고 말 할 것입니다.   

물론 이 무화과나무는 이제 곧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려죽으실 예수님의 순종하시는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나무이기도 합니다. 옳습니다. 우리 예수님 자신이 죄 없으신 분으로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죄인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에게 온전히 순종하신 분이십니다. 이 무화과나무처럼 온 인류를 위하여 죄를 인한 모든 저주를 온 몸으로 짊어지신 분, 자기 목숨으로 순종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성도여러분, 어떻게 하면 부흥이 일어나고 어떻게 해야 개혁이 이루어질까요?  내 생각에는 우리가 부흥이나 개혁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부흥이나 개혁이 아닙니다.  부흥이나 개혁은 그냥 우리가 순종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죽는데 까지도 순종하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리의 순종으로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부흥이고 개혁입니다. 우리의 순종으로 예수님의 왕 되심을 모두에게 알게 하는 것이 진정한 부흥이고 개혁입니다. 본문의 무화과나무처럼 죽음까지 가는 순종으로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기를 기도하는 그런 신앙을 우리 모두가 소유하게 되었으면 합니다. 한 알의 밀이 해야 할 일은 땅에 떨어져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두 번 째로 우리가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배우는 것은 ‘사랑’입니다. 

성도여러분, 이 무화과나무는 예수님을 사랑할까요? 미워할까요? 사랑합니다. 사랑하니까 자기의 전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아무것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병에 걸려서 아파합니다. 너무 고통스러워합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차라리 내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요? 부모입니다. 사랑하니까 차라리 내가 대신 아프고 자녀는 안 아프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저주도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저주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마27;46)“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엘은 하나님. 리는 나. 라마는 어찌하녀 사박다 버리다. 니는 나> 하고 외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이제는 버리십니까?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간의 모든 저주를 자기 몸에 짊어지십니까?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나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무화과나무가 왜 예수님의 저주를 받아들입니까?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뿌리부터 마를 수도 있습니다.   

(요3;30)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보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저와 여러분은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흥하십시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쇠하여지겠습니다. 이런 고백이 바른 고백이요, 부흥이 있는 고백입니다. 교회는 오직 ‘축복’만을 주는 곳이다 하는 것은 너무 어린 신앙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롬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는 이방인의 사도라고 불리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이방인 전도를 위해 그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사명에 최선을 다하고 목숨을 다했지요. 그러나 바울의 마음에는 자기 동족인 유대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저와 여러분도 이런 사랑의 고백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세 번 째로 우리가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배우는 것은 ‘믿음’입니다. 

성도여러분, 무화과나무의 결론은 ‘믿음’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무화과나무는 자기의 온 몸을 던진 순종과 사랑으로 예수님이 왕이신 것을 증거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자기 자신으로 증거를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무화과나무를 보면서 예수님의 왕 되심을 믿을 수 있습니다. ‘산을 명하여 바다에 빠지우라’ 하여도 그렇게 되겠구나 하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말씀이신 하나님이시기에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무화과나무의 사건에 대한 예수님의 결론은 확실합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무화과나무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을 보였습니다. 뿌리까지 마르는 철저한 순종으로 예수님이 왕 되심을 드러내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무화과나무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사랑이 사람을 미치게 만들 듯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저주조차 받아들이게 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셨습니다. 예수님도 기꺼이 십자가에 자기 목숨을 던져 물과 피를 다 쏟으시는 순종을 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세례요한처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바울처럼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리고 본문의 무화과나무처럼 살게 되기를 결심하는 이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예수님이 왕이신 것을 믿으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이 말씀대로 왕이신 예수님을 굳게 믿는 믿음의 기도로 기적을 체험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men.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