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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전도 성품이다 (히 11: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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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도 성품이다 (히 11:24-27)

인생은 해석의 문제입니다. 어떤 눈으로 인생을 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성품이 중요한 이유는 그 사람이 어떤 성품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품의 기초가 하나님을 향한 ‘신뢰’,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는 우리를 ‘용기’ 있는 성품의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은 우리로 하여금 나의 시각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인생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때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비전’입니다. 그래서 비전도 성품이라는 정의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눈으로 여러분의 삶을 바라보는 성품을 가지고 계십니까?

우리 교회의 변화 중에 여러분이 느끼는 것 하나가 우리 교회를 상징하는 성화가 달라진 것입니다. 그림도 바뀌었고, 빛을 발하는 방식이 바뀌었습니다. 그 성화를 다른 방식으로 바꾸기 위해 일단 작동을 중지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림이 바라고 형광등 불빛이 약해졌기 때문에 흉물스럽지 않도록 작동을 중지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 교인을 통해 듣게 된 이야기입니다. 코오롱 아파트에 사는 주민이 교회를 다니지 않으면서도 우리 교회를 염려한다는 것입니다. 
“너희 교회가 그렇게 어렵니? 그 불도 켤 수 없을 정도로…"

어떤 교인은 예배를 마치고 났는데 저에게 이야기합니다. 
“목사님 벽에 있는 목자상이 고장 났나 봐요."
목자 상 하나를 가지고도 여러 사람이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결국, 여러분의 삶에서 아주 크고 작은 많은 일을 경험합니다. 문제는 그 모든 일을 어떤 성품이라는 Frame(프레임)에서 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프레임]이라는 책에 나오는 아주 재미있는 예화입니다. 
어느 청년이 랍비에게 찾아가 묻습니다. 
“기도하면서 담배를 피워도 되나요?”
그러자 랍비가 아주 곤란해합니다. 그러자 다시 이렇게 묻습니다. 
“담배를 피우면서도 기도할 수 있나요?”

똑같은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참 의미가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전이라는 성품의 프레임을 가지고 여러분의 인생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비전의 성품이란?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선 사람의 또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겸손한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얻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특권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늘 두 가지 방법으로 세상을 봅니다. 내 눈에 보이는 대로, 환경을 바라보는 시각과 환경 저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세상,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가지고 보는 것입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며, ‘비전도 성품이다!’라는 제목을 생각했습니다. ‘비전을 가진 자의 성품이야말로 새로워진 피조물들의 특권이구나!’라고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특권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비좁은 감방에 갇힌 죄수 두 명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감방에는 빛이라고는 전혀 없고 단지 눈높이에서 석 자 위에 자그마한 창문이 나 있을 뿐이었습니다. 물론 두 죄수는 그 창문을 쳐다보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 명이 본 것은 엄연한 현실을 일깨워 주는 차가운 쇠창살이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점점 풀이 죽고 비탄에 젖어 분통을 터뜨리는가 하면 절망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다른 죄수가 본 것은 그 창문 너머에 있는 별이었습니다. 자유의 몸으로 새 생활을 시작할 것을 생각하면 그는 희망이 샘솟았습니다.

사실 별보다 창살을 보기가 훨씬 쉽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별을 보는 사람을 우리는 비전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현실 가운데 비전을 보는 성품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현실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어떻게 그런 능력을 소유한 성품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비전을 소유한 사람들의 성품 중의 하나는 늘 문제의 해결이 가능하다고 보는 시각입니다. 이러한 성품의 사람은 늘 긍정적이며, 소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나의 능력이 다한 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믿는 사람의 능력입니다. 혹시 여러분 스스로 너무 작게 생각하지는 않으신가요?

아프가니스탄의 피랍자들 때문에 문제를 해결하려던 노력 중의 하나가 우리의 얼굴을 달아오르게 한 적이 있습니다. 국가적으로 무안을 당한 일인데, 우리나라의 국회의원들이 미국의 담당자들을 만나기 위해 무작정 찾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국회의원들은 중요한 사람들을 만나지도 못하고 원론적인 이야기만 듣고 오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놓고 어떤 분이 신문에 글을 썼습니다. 한국 사람들 스스로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미 한국의 경제 규모는 세계에서 11-13위에 올라 있으며, 탈레반이 한국 사람을 납치한 이유는 이미 우리나라를 미국이나 독일 이탈리아와 동일 선상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강대국이요, 열강으로 보는데, 우리는 스스로 약소국이라고 생각하며 문제의 해결을 자꾸 남에게 의지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능력과 위상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작아지고 현실의 난감한 가운데 갇히게 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우리 자신을 가장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를 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원리를 빼고 우리 자신을 보면 우리는 참 작은 존재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포기해야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비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은 문제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늘 깨닫는 것이지만, 인생이란 늘 문제의 연속입니다. 때로 여러분의 삶에서 문제가 없으면 불안하지 않으신가요? 언제 또 문제가 터질 것인지.
아니 문제 가운데서 오히려 기대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는 없을까요? 왜냐하면,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 나갈 때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우리의 삶이 up-grade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설교하면서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여러분의 삶이 편해졌습니까? 아니면 불편한 것들이 늘어나고 힘들어졌습니까?" 그들의 같은 대답은, "힘들어졌어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믿는 순간 모든 것이 불편해지고, 이전의 삶보다 어려워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 가운데 헌신하고 봉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을까요? 그리고 왜 그들 가운데 신앙을 포기하고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생겼을까요? 

저는 정말 그들의 영혼을 바라보며 이런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시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내실 때, 필연적으로 건너야 했던 광야의 시절이 있습니다. 광야 시절은 그들의 삶을 무척 힘들게 했습니다. 애굽에서 종으로 살 때보다 더 고달픈 날들이었습니다. 그대로 종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다면 물이 없어서 고생하지도, 먹을 것이 없어서 고통을 당하지도, 광야를 지나며 적들을 만나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불평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아주 소수이기는 하지만 믿음의 사람 모세와 함께 비전을 공유한 성품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믿음으로 광야를 바라보았습니다. 이들은 믿음으로 아직 보이지 아니하는 가나안을 보았으며, 이들은 믿음으로 문제 가운데 임재하시고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12명의 정탐꾼이 가나안 땅을 보고 온 후에도 비전을 가진 믿음의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민수기 14장 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그들에게는 비전이 있었기 때문에, 비전의 프레임을 가지고 광야를 바라보고 그들이 정탐했던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허락하실 땅을 보았습니다. 비전이 없는 사람은 상황을 과장하며, 스스로 더욱 초라하게 만듭니다. 자신이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환경의 벽이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장대한 아낙 자손 앞에 메뚜기와 같은 존재로 전락하느냐, 그들을 밥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어떤 성품으로 인생을 살아가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기뻐하시며 이루어질 능력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빌 하이벨스는 그의 책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책에서 비전의 성품을 가지기 위한 4가지 창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마태복음 19장 26절을 반복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다시 반복합니다. 하나님은 내 문제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둘째는 문제 가운데서 홀로 조용히 있을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야고보서 1장 5절의 말씀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지혜를 주실 것을 믿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때로 시간이 걸릴지라도 말입니다. 

셋째는 우리 주변에 해결 지향적인 성품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늘 전염성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우리의 문제를 동정하며 안타까워하는 사람보다는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동역자를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신 주변에는 문제 가운데 그런 소망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넷째는 겸손한 마음과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직접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적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서 문을 닫으실 때는 다른 문을 열어 놓으신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본문의 주인공 모세를 통해 비전 있는 성품을 소유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에 대하여 설명하며 계속해서 "믿음으로"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비전을 소유한 사람의 성품의 특징을 몇 가지 발견하게 됩니다. 
1. 믿음으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했습니다. 
2. 믿음으로 모세는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받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자신을 다스린다!
비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의 가장 명확한 특징은 그의 삶에서 거절 지수가 높아진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비전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을 헤쳐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비전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은 대개 화려하고 편안하며 쉬운 길일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반대로 비전의 삶은 장애물을 피해 가라고 하지 않고 넘어가라고 말합니다. 편안한 삶보다는 의미 있고 옳은 길을 위해 희생하라고 말합니다. 

사실 자기희생이라는 것이 ‘자기의 정욕을 다스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교회에 헌신이 없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날 신앙인들이 무기력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비전을 상실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을 통해 이루실 분명한 목표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사명을 쫓아가지 않고 쉬운 길을 찾으며, 세상 사람의 눈치를 보게 된 것입니다. 

본문 24절에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당시 바로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공주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왕이 될 수 있는 위치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것을 과감하게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하나님께 불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모세에게 중요한 것은 그의 눈에 보이는 왕의 지위가 아니라 그의 삶에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전의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따르는 성품이 있다면 ‘자기 통제력’(self-control)입니다. 자신을 다스리는 통제력을 우리는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자기 통제력은 즐거움을 유보하는 것이다."
제가 주로 쓰는 표현에 의하면 이런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해야만 하는 일을 하면, 하고 싶은 일을 할 때가 온다."

본문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 모세는 이 부분에서 아주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상 받는 것을 유보했습니다. 그래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자신을 통제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자녀 교육을 어떻게 하십니까? 자신을 통제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부모야말로 가장 훌륭한 양육법이요, 부모입니다. 우리가 흔히 "spoil 된다!"라고 표현을 하는데, 요즘 아이들이 참을성이 없고 군대에 가서 적응하지 못하고 자살을 하며,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포기하는 이유는 자기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통제하며 키운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지난달에 미국에 있는 조카의 아들과 아내가 한 달 정도 한국에 나와 있었습니다. 이제 갓 두 돌이 지난 놈이 "작은할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자기가 조금 싫은 것이 있으면 "하지 마세요!"라고 하는데 정말 귀엽습니다. 그래서 하루를 데리고 자려고 했습니다. 애가 좋아하는 목욕을 시키고 데리고 나왔는데 이놈이 말썽을 부립니다. 그런데 혼낼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혼내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혼내면 이놈이 다시는 내가 불러도 오지 않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즐거움을 통제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다면 그 아이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 인생에서 해야만 하는 것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명확하게 아는 것도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불의한 것을 거절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 중의 하나는 사람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거절하는 용기가 부족하여서 거절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아니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의 본성을 거절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늘 두 가지의 본성이 싸우고 있으며, 그래서 매 순간순간마다 결정해야 합니다. 쉽게 예를 들어서, 우리가 운동을 하면 육체의 유익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운동을 해야 하는 순간에 우리의 육신이 가져다주는 편안함과 안일함을 거절해야 움직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음식을 절제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나요? 단지 그것을 거절하지 못하기 때문 아닙니까?
저는 거절하는 것도 훈련과 연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몇 달 전 병원에서 정기 검진을 받고 경고를 받았습니다. 고지혈증, 고혈압, 고 콜레스테롤, 지방간, 이 모든 수치가 높다는 것입니다. 일단 살을 빼라는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조절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음식을 조절하는데 가장 큰 장애는 딱 한 번 손을 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경험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음식을 절제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손을 대지 않는 것입니다. 손을 대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립니다. 그리고 손을 대고 나는 순간 내 머릿속에 정당화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이유가 생각나기 시작합니다.

영적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영적인 삶에 방해가 되는 것, 명예욕, 물질 욕심, 탐욕, 시기심을 거절하지 못하는 순간 우리는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결단에서 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것도, 누구 때문에, 무엇으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인정하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여러분의 삶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을 즐긴다!

비전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 중의 하나는 고난을 즐길 줄 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모세는 무척 적극적으로 고난을 맞이했던 것 같습니다. 참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25절에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라고 기록합니다. 모세가 비전의 성품을 소유하고 나서 일어난 여러 가지 변화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모세는 자신감이 모자란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늘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 즉, "self-control"이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감정적이었는가? 왕자이던 시절 큰 사고를 치게 됩니다. 사실 이때는 모세의 정체성이 혼란스러웠던 시절이었습니다. 왕궁에서 왕자로서 컸지만, 친어머니가 유모로 자신을 키우면서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상상이 가는 일 아닙니까? 생활은 애굽의 왕자인데, 정체성은 히브리 노예이니 말입니다. 그러던 중 일어난 사건이 출애굽기 2장 11-12절에 나옵니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그런데 이 일이 탄로 난 것입니다. 이때도 모세는 이성적으로 대처하거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바로 미디안으로 도망갑니다. 당시 고대 애굽의 왕권제도를 생각한다면, 왕자인 모세가 사람을 하나 죽였다고 목숨의 위협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도망간 것으로 보면, 내적인 고민과 갈등도 있었고, 무척 감정적으로 대처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 모세가 말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의 삶에 비전이 생긴 다음부터는 감정을 절제하기 시작합니다. 모세의 사역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정을 하십니다. 민수기 12장 3절입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도망을 하던 모세가 문제 가운데서 인내하며 오히려 그 고난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본문의 표현에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기를 더 좋아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인내의 즐거움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왜입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그 답이 본문 26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무엇입니까? 지금 그의 현실 저 건너편에 있는 가나안의 비전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며 산 사람이었기에, 그런 비전의 성품을 소유했기에, 모세는 인내하며 온유하며, 고난을 즐기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짜증을 내는 것이 보통 사람의 모습입니다. 너무나 일이 안 풀릴 때, 왜 이런 일이 나에게만 일어나는지 분노하는 것이 보통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데 출애굽기를 보면 모세가 비전의 사람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모든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 가고 있습니다. 물론 당면한 문제들이 크고 위급한 일들이었지만, 그 고통 가운데 기대감과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쌓아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고난이 닥칠 때 이유 있는 고난을 겪고, 어려움을 참을 때 참을 만한 이유가 있는 삶 말입니다. 
멋있지 않습니까? 비전의 성품을 소유한다는 것 말입니다.

아주 쉬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 가지 음식이 있을 때 그 음식을 맛있게 먹는 방법, 여러 가지 과일이 있을 때 과일을 맛있게 먹는 방법, 케이크를 먹을 때 맛있게 먹는 방법을 아십니까? 아주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방법이 있습니다. 가장 맛이 없는 것, 당도가 낮은 것을 먼저 먹는 것입니다. 맛있는 것, 당도가 높은 것을 먼저 먹으면 그다음 것의 맛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눈앞에 보이는 즐거움을 유보하고 참는 훈련을 해야 끝까지 즐거움을 맛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늘의 보화와 하나님의 상을 바라보고 사십니까? 아니면 지금 이 땅 위에 일어나는 일들에 인생을 걸고 살아가십니까? 왜 위대한 인물들은 보통 사람이 가지 않아도 되는 고통의 길을 가는 것입니까? 
저는 후배 목사님들에게나, 혹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지금은 모든 것을 희생하고 열심히 일할 때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루어 논, 결과를 보지 마시고 그 사람들이 지나갔던 과정을 보십시오."
모세가 위대한 인물이요, 비전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광야의 시간을 넘어갈 수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지나가야 했던 그 순간들을 즐기며 갔을 뿐입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불평하며 광야를 지나가느냐, 즐기며 광야의 시간을 맞이하느냐?

인내하며 고난 가운데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인내하는 일이 쉬울까요? 포기하는 일이 쉬울까요? 많은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 포기하는 쪽을 택하고 후회하는 경우들을 봅니다. 
"그때 내가 포기하지 않았다면…"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포기하는 것은 그것이 쉽기 때문입니다. 포기하는 그 순간 우리를 편안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지긋지긋한 인간관계를 끝내고 이혼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찾아올 일들, 내가 혼자가 된다는 것, 우리 아이들이 엄마나 아빠가 없이 커야 한다는 것 등의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드라마를 통해 용기 있게 상관에게 항변하고 직장을 때려치우는 사람들을 보면 멋있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도 그렇게 멋지게 끝장을 내고 싶은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순간 여러분이 실업자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순간엔가 여러분이 신앙을 버리고 마음대로 살아가고 싶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벗어나면 자유로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 우리에게서 구원이 떠난다는 것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24:13) 그렇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하는 사람은 어려운 순간에 과감하게 인생을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순간에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면 난 계속 갈 수 있어!"라고 말하고 인내하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의 말씀처럼,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말씀을 믿고 나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아 29장 13-14절의 말씀처럼,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이 약속의 말씀은 바로 여러분에게 적용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품, 비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성품의 사람이 되십시오. 세상의 유혹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즐거움을 위해 잠시 세상의 것을 참을 수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아프가니스탄에서 순교한 배형규 목사가 멋진 글을 책상에 써 놓고 살았다고 합니다.
“내 삶의 최고의 헌신은 마지막을 드리는 것이다.”
위대한 순교자 Jim Eliot은 늘 그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영원한 것을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포기하는 것은 결코 어리석은 일이 아니다.”
여러분이 환경 저 너머에 있는 곳을 비전의 눈으로 바라보며 포기해야 할 것, 거절해야 할 것, 견뎌야 할 것,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런 당신은 성품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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