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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낭비라니요? (요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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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비라니요? (요 12:1-8)


I. 낭비라니요?

1956년 미국 전역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짐 앨리엇과 함께 5명의 젊은 선교사가 선교지 에콰도르에 도착한 다음날 원주민의 창에 찔려 처참한 모습으로 죽은 사건이 전 미국에 전해졌습니다. 짐 앨리엇은 휘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신앙인이요 선교의 비전을 가진 젊은이였습니다. 그의 탁월한 능력과 영성으로 보아 미국 기독교계를 이끌어줄 인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전도종족을 찾아 선교하기로 결단하고 에콰도로에 들어갔다가 동료 선교사 4명과 함께 도끼에 찍혀 29세 나이로 죽었습니다. 당시 「Life」지에서는 이 사건을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무모한 선교 열정을 지적하며 “What a unnecessary Waste!” 이 얼마나 불필요한 낭비한가?라고 말했습니다. 

평생 선교를 위해 준비했던 그가 복음 한번 외치지 못하고 비참히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짐 앨리엇이 처참한 시신으로 돌아오자마자 부인 엘리자베스 앨리엇이 간호사가 되어 에콰도르 선교를 시작합니다. 마침 이 부족은 여자를 헤치지 않는 풍습이 있어서 그나마 작은 선교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어느날 추장이 이 엘리자베스 앨리엇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기에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며 우리를 위해 헌신하는가?” “나는 5년전 당신들이 죽인 앨리엇의 아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남편의 사랑을 안고 당신들을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도 25년이 지난 1992년 에콰도로 아우카족의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어 봉헌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앨리엇을 죽인 청년이 바로 그 자리에 목사가 되어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사를 다룬 마지막 말입니다. 
“낭비라니요? 자신이 사랑하는 소중한 것을 위해 자신을 흔쾌히 버리는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그 누가 감히 짐 앨리엇의 죽음을 낭비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이 시간 “낭비라니요?”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II. 본문의 배경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그 믿음을 칭찬하신 사람들이 서 너명 나옵니다.

① 예수님께 나아와 하인의 병을 고쳐 달라고 구하며 “내 집에 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말씀만 하옵소서”하는 백부장의 믿음을 주님은 칭찬하셨습니다. 

② 딸을 살려달라 애원하며 모진 거절을 견디어 내는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예수님께서 칭찬하셨습니다.

③ 가난한 과부의 헌금하는 광경을 보시고 그가 가진 모두를 드렸다고 칭찬하셨습니다. 

④ 그리고 예수님의 칭찬 사건 중에서도 가장 기뻐하시며 행복해 하신 사건이 오늘 본문 향유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의 헌신 사건입니다.

복음서에서 마리아는 한결같이 발 아래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 말씀을 듣기도 하고 발 아래 앉아 오라비를 위해 기도하는가 하면 발 아래 앉아 예수님께 향유를 붓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주경가들은 마리아의 별명을  “발 아래 여인”이라고 부릅니다. 발 아래 여인! 이 얼마나 아름다운 호칭입니까? 

예수님과 마리아 가족의 만남 가운데 나사로의 부활사건은 공관복음서에는 생략이 되어 있고 요한복음에만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이 귀중한 사건이 공관복음서에서 생략된 이유를 요한복음 12장 10절 이하에서 이렇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즉 공관복음서가 기록된 주후 65년경에는 아직 나사로가 살아있었고 유대 교권주의자들이 나사로를 죽이겠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상태이니 가급적 나사로 사건을 들먹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이 기록될 이 당시엔 아마 나사로도 세상을 떠나고 유대교권주의자들도 풀이 죽은 상태여서 쉽게 나사로의 부활사건을 공개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오늘 본문의 사건을 11장 나사로의 부활사건과 자연스럽게 연결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 잔치는 나사로를 살려주신데 대한 감사의 자리로 마련이 된 것 같습니다. 때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불과 일주일 전이었고 사건이 등장하는 무대는 나사로의 집이었고 때는 예수님의 마지막 고난의 여정 중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모든 잔치는 예수님께서 남의 잔치에 손님으로 참석하신 것이었는데 오늘 이 잔치만은 예수님을 위해 마련한 특별한 잔치였습니다.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잔치였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잔치였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 잔치는 십자가를 앞에 두신 예수님을 위한 마지막 잔치이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그 자리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할 그 무엇이 없을까? 고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III. 등장인물 

먼저 이 잔치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살펴 보십시다. 
우선 1. 마르다는 주님이 오실 때마다 주님을 위해 부지런히 음식을 장만하는 여인으로 나타납니다. 

한때 마르다는 동생 마리아가 철없이 자신의 일을 돕지 않는다고 불평을 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 마르다에게 그런것들은 이미 지나간 과거지사였습니다. 지금은 말없이 주님을 위해 힘든 일을 자청하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에 마르다 같은 일꾼이 필요합니다. 오늘도 교회의 잔치를 말없이 준비하는 손길들이 필요합니다. 

2. 한편 나사로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주님과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본문을 계속 읽어 내려가 보면 나사로가 살아서 앉아 있다는 그 사실 하나로 많은 전도가 된 것 같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다”고 했습니다. 반면 원수들은 이 일로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합니다.

3. 한폭 서정시의 클라이 막스는 마리아의 모습입니다. 

마리아는 주님 앞에 비싼 향유 한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주님의 몸에 향유를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이스라엘 소녀들은 훗날 남편에게 바칠 옥합을 준비했습니다. 마리아는 생명처럼 아끼던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부었습니다. 요한은 마가가 그 이름을 숨겼던 마리아의 이름을 밝히고 그 마리아가 바로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의 누이라는 사실도 11:1에서 밝힙니다. 결국 나사로의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지금 옥합을 깨뜨리는 이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예비한 사건이라고 요한은 해석을 하는 겁니다. 

다른 복음서가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진 향유에 주목하는 동안 
요한은 그 향유가 발까지 흘러내려 발을 적시는 장면에 주목을 합니다. 
나아가 마리아가 고개를 숙이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는 이 예식은 
로마의 궁중 인사법으로 왕께 드리는 예식이었습니다. 

“그리고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는 말은 예수 왕국의 향기 즉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향기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마리아의 이 의식은 왕되신 예수, 죽음으로 왕국을 이루실 예수님을 향한 용감한 예배요 최고의 헌신이었습니다.

머리는 사람의 맨 위에 있는 소중한 부분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사람들은 머리털을 여인의 면류관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5절에서 “긴 머리는 여자의 영광이다”라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지금 그 영광의 머리카락으로 인간의 가장 하찮은 자리에 있는 발을 씻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발은 노예들이나 만지고 씻기는 천한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마리아는 자신의 머리털을 수건삼아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리고 있습니다. 내게 가장 영광스러운 것도 주님께는 가장 천한 것일 수 밖에 없는데 뭘 아까와 하겠느냐는 태도입니다.

거기 부은 향유값만 하더라도 가롯 유다의 계산으로 삼백 데나리온이나 됐다고 본문은 밝히고 있습니다. 한 데나리온의 가치가 당시 숙련된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이었다고 하니 삼백 데나리온이란 한 사람의 노동자가 한푼도 쓰지않고 일년을 꼬박 모아야 하는 돈이었습니다. 아마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마리아의 혼수 준비물로 물려준 마리아의 전재산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부으며 한방울 한방울 떨어뜨리며 생색을 내지 아니했습니다. 한방울씩 흐르는 향유병 주둥이를 아예 깨뜨려 송두리째 부어버렸습니다. 향유는 붓고 병은 아낄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헌신이 마지막이요 영원한 기회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몽땅 부어 나의 모든 것이 그분에게 드려지기를 원했습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막14:8)

4. 이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도 비판을 서슴치 않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 인물로 가롯 유다를 들고 있습니다. 

본문 4절과 5절을 주목해 보십시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얼핏보면 가롯 유다야 말로 굉장한 인도주의자처럼 보입니다. 그는 서민 경제에 정통해 보이기도 하고 사회정의에 대단히 관심이 많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며 민중의 대변자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에 속아 넘어 갔습니다. 가롯 유다의 말이 매우 매력적으로 들리고 대단히 설득력이 있어 보였습니다. 사탄은 오늘도 가롯 유다의 논리로 교회를 혼란시킵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에겐 몇 가지 결정적인 잘못이 있었습니다. 

1) 첫째 마리아의 숭고한 사랑을 물질적인 것으로만 평가를 했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극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그 사랑을 돈으로 환산하려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는 매사에 타산적이었습니다. 신앙이나 사랑을 손익의 문제로만 생각을 했습니다. 

2) 둘째 유다는 그 동기가 불순했습니다. 

그 동기를 6절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3) 가롯 유다의 세번째 잘못은 언행의 모순입니다. 

만일 그토록 가롯 유다가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이 있었다면 유다 자신이 뭔가를 했어야 했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번도 자기 주머니를 털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한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신앙없는 가롯유다의 눈에 마리아의 행동은 낭비로만 보였습니다. 

IV. 사랑은 낭비하는 것

같은 본문을 다룬 마가복음 14:4에 보면 
“어떤 사람들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라고 제자들이 비난합니다. 여기 허비란 말과 같은 단어가 가롯 유다 자신에게 적용된 성경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롯 유다를 일컬어 “멸망의 자식”이라고 했는데 

원문에서는 여기 멸망이란 말과 허비란 말이 같은 단어로 쓰여졌습니다. 
예수를 위해 사랑을 낭비할 줄 모르는 자는 낭비의 자식이란 말입니다. 
사명을 낭비한 자식, 인생을 낭비한 자식! 그가 바로 가롯 유다였습니다. 
예수를 위해 자신을 낭비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결국 자신의 사명과 비전을 낭비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향유를 낭비한 마리아야 말로 예수를 알고 사랑을 알고 복음을 알고 하늘 나라의 비밀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가족의 저녁 식탁을 위해 추운날 시장바닥을 뒤지는 여인의 정성을 누가 낭비라고 비판할 수 있습니까? 

고린도 후서 12장 15절에 보면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송두리째 낭비하셨습니다. 사랑엔 낭비가 있고 손해가 따릅니다. 사랑은 논리로 따질 문제도 아니고 손익을 계산할 문제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예수를 낭비하셨습니다. 

참된 사랑은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빼앗기는 것입니다. 바치는 것입니다. 손해보고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뭔가를 잃어본 경험이 없는 사람, 뭔가를 빼앗겨 본 경험이 없는 사람, 인생을, 젊음을, 시간을, 재물을, 눈물을, 땀을, 그 무언가를 낭비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입니다. 

V. 낭비할수록 행복한 사랑

절약! 그것은 분명 그리스도인의 미덕입니다. 성경은 절약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장로교 신학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칼빈 선생은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먹고 남은 것을 거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기독교의 절약정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마지막으로 맺어야 할 열매가 절제입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절제된 삶을 삽니다. 

그런데 보십시요. 절약은 미덕이고 낭비는 죄라는 기독교의 기본진리에 반대되는 역설적인 진리와 교훈이 본문에 등장합니다. 마리아가 1년 연봉에 해당하는 옥합을 깨뜨려 향유 기름을 쏟아 부었을때 가롯 유다와 다른 제자들은 “그것이 낭비다”라고 비난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요. 예수님은 제자들 편이 아니라 낭비한 마리아 편을 들고 있습니다. 낭비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좋은 일을 하였다. 아름다운 일을 하였다. 멋진 일을 하였다. 

마리아의 낭비는 분명 아름다운 낭비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계산을 초월했던 주님을 향한 마리아의 사랑! 십자가의 죽음을 준비했던 마지막 기회. 그 아름다웠던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마리아의 헌신! 마리아의 낭비할 수 있었던 그 사랑이 주님을 감동시켰던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막14:9)

당시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그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을 믿으면 내게 어떤 유익이 있을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무엇을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더 사랑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신앙의 초급단계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때 행복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단계가 고상해지면 예수님을 사랑할수록 행복합니다. 마리아의 신앙이 그랬습니다. 낭비할수록 행복한 사랑이었습니다. 

철없는 어린아이는 엄마의 사랑을 받아서 행복합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아이를 사랑하면서 행복해 합니다. 처음 예수를 믿을 때는 내가 얻은 구원이 귀하고 내가 누리는 축복이 귀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깊어지면 주님이 귀하고 성령의 임재속에 살아감이 귀합니다. 나를 드릴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기도의 초기단계는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나 기도가 깊어지면 하나님을 구하는 기도, 하나님만을 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나를 죽이고 포기하는 차원이 다른 기도가 가능해 집니다. 

낮은 단계의 예배는 내가 받은 감동과 은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배가 깊어지면 그 예배에 임재하신 하나님 때문에 행복합니다. 나를 하나님께 더 많이 더 깊이 드릴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은 헌금의 가치가 아니라 그 헌금을 받으시는 주님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가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리아를 보십시요. 주님이 기뻐하실 수 있다면 내가 무엇을 해도 내가 무엇을 드려도 나를 깨고 나를 송두리째 쏟아 부어도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낭비할수록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 그 사랑을 누가 낭비라 할 수 있습니까? 

VI. 낭비할 줄 아는 사랑이 교회를 세운다

마리아는 돈의 가치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절대적인 가치, 사랑의 절대적인 가치를 생각했습니다. 

옳습니다. 이천년 기독교 역사는 손익계산에 빠르고 신앙을 경제의 문제로 주판을 두었던 사람들에 의해 이어져 온 것이 아니라 마리아의 뒤를 따라 옥합을 깬 순교자들에 의해 부흥하고 발전해 왔습니다. 오늘도 교회를 세우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 낭비하고도 행복해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한국교회는 자신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서 옥합을 깨뜨린 주기철을 먹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그 자식을 공산당에게 내어 주고도 행복할 수 있는 손양원을 먹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의 자신을 옥합처럼 깨뜨린 순교자들을 먹고 살아왔습니다. 그 누가 주기철의 순교를, 손양원의 죽음을 낭비라 말할 수 있습니까? 

낭비할수록 행복했던 사랑! 그것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에는 이해 타산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전부를 주셨습니다. 때문에 마리아의 깨진 옥합은 육체를 깨야할 주님의 몸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잠시 후 갈기 갈기 찢겨진 주님의 몸이었습니다. 물과 피를 송두리째 부을 예수의 몸이었습니다. 

주님을 향해 우리가 해야할 사랑도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를 위해 땀 흘리며 수고할 때에 내 수고가 힘에 겨우면 겨울수록 그 옥합은 아름답게 깨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내 시간을 드려야 되는데 세상일이 분주하고 분주해서 이것을 짜르지 않고서는 시간에 피를 내지 않고서는 주님을 섬길 수 없고 예배할 수 없고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없을 때 그 시간을 송두리째 깰 때에 그 시간은 향유 옥합을 깨서 내 주변에 향기를 진동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주변에 연약한 성도들, 셀공동체를 섬기다 보면 어린 신자를 섬긴다는 것이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게 됩니다. 주었던 사랑이 상처로 다가오게 될 때에, 쏟았던 목회적인 돌봄이 배신으로 다가오게 될 때에, 조용히 주님 앞에 나와서 흘리는 눈물은 향유 옥합처럼 깨어지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한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나를 드리고 싶은데 몸은 연약하여 드릴 수 없어서 넘어지고 지치며 병든 몸을 주님 앞에 드릴 때에 거기에 향기가 진동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사랑은 옥합이 깨어지므로 시작이 되었고 완성이 되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옥합이 무엇입니까? 그 옥합을 감추어 두고 다른 껍데기들은 사랑하겠다 말하지 마십시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손해 보고도 좋은 사랑을 아십니까? 
낭비하고도 기쁜 사랑을 맛 보셨습니까?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 뭔가를 잃어보시고 바쳐 보시고 빼앗겨 본 경험이 있습니까? 
부어지지 않은 향유는 향기가 없습니다. 

낭비할수록 행복한 사랑!
그것은 우리 주님의 사랑이었고 주님을 향한 오늘 우리의 사랑입니다. 

인도에서 선교 사역을 하시던 미국 목사님 한분이 어느날 갠지스 강가로 나갔다고 합니다. 강가에 나가보니 한 여인이 두 아들을 데리고 강둑을 따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아이는 잘 생겼고, 다른 한 아이는 몸이 불구인데다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 장애아였습니다. 인도에서 오랫동안 선교사역을 하던 이 선교사님은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 저 여자가 두 아이 중 한 아이를 갠지스강에 빠뜨려 신에게 제사하려고 하는구나’ 생각하고 부리나케 달려가서 그 부인을 붙들고 “제발 그런 미련한 짓을 하지 마시오. 그건 쓸데없는 일입니다. 왜 아이를 희생시키려고 합니까?” 간곡히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완강했습니다. 그 여인을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이 없자, 그 선교사님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참 후에 저 멀리 갔던 그 여인이 다시 걸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아이 중 하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잘 생기고 정상적인 아이는 없어지고 시각 장애아만 데리고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 놀라서 “아니 신에게 바치려면 불구에다 눈이 멀어 인생을 살아가기가 어려운 이 아이를 바칠 것이지, 왜 건강한 아이를 바치셨나요?”라고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여인이 정색을 하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미국에서는 어떤 신을 믿고 있는지 모르지만, 여기 인도에서 섬기는 신은 우리가 최선의 것을 드리는 것을 원하고 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니 정상적인 아이를 드려야지, 어떻게 장애의 몸을 가진 아이를 드리겠습니까? 미국인들의 신은 최선의 제물이 아니라도 받으십니까? 그 신은 우롱당하고도 모르는 바보 신이십니까?”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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