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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강하게 하사 (삿 16:2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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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강하게 하사 (삿 16:28-31)   
 
본문을 보노라면 마치 영화 <글레디에이터>의 마지막 장면을 보는 듯합니다. 글레디에이터란 로마 시대의 검투사를 말합니다. 한 때는 명장으로 로마 전역에 명성이 자자했고, 차기 황제 물망에까지 거론되던 인물이 더러운 음모의 희생양이 되어 검투사로 전락하고 죽을 고비들을 넘깁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명예를 회복하고, 제국을 혼란스럽게 한 당시 황제를 쓰러뜨리고, 자신도 수많은 군중이 보는 앞에서 숨을 거둡니다. 사람들은 영웅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고, 그의 시신을 최대의 경의를 다해 메고 나갑니다. 

본문에도 영웅의 죽음과 장례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주인공은 유명한 사사 삼손입니다. 31절을 보십시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다 내려가서 그의 시체를 가지고 올라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 

삼손의 이야기는 영화 소재로 손색이 없습니다. 영웅이 있고, 전쟁이 있습니다. 갈등이 있고, 러브 스토리가 있고, 음모와 위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공의 실패가 있는가 하면 극적 반전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그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삼손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진한 아쉬움과 허전함을 남기고 있습니다. 삼손의 이야기는 결코 해피엔딩이 아닙니다. 이 아쉬움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선 삼손의 처지가 안타깝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으로 구별된 나실인이었습니다. 그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않았습니다. 나실인은 시체를 가까이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깎지 않아야 했습니다. 그의 머리는 치렁치렁했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보통 사람으로 상상도 못할 힘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을 통하여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건지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고, 철기 문화를 앞세운 블레셋의 손에서 고통 받고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삼손은 수많은 블레셋 군사들을 물리쳤고, 이스라엘은 환호했고, 블레셋은 이를 갈았습니다. 그의 명성은 천하를 진동시켰습니다. 

우리의 아쉬움은 이처럼 존귀하던 그가 조롱거리가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의 힘은 사라졌고,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 두 눈이 뽑혔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끌려가서 맷돌을 돌리는 노예가 되었습니다. 적장의 두 눈을 뽑고 맷돌을 돌리게 하는 형벌은 고대 헬라와 로마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블레셋을 물리치고 호령하던 영웅이 블레셋 사람들의 노리갯감이 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만 해도 그렇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의 축제를 맞이하여 삼손을 다곤 신당으로 끌어냈습니다. 다곤은 블레셋 사람들이 섬기던 우상으로서 날씨의신, 혹은 곡물의 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고귀한 사람이 블레셋의 신전에서 조롱거리로 전락한 모습이 얼마나 마음이 아픕니까? 

삼손은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지켜내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지키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삼손은 왜 이것을 지키지 못했을까요? 

우선 그는 가까이 하지 않아야 할 것을 가까이 했습니다. 

그는 여인들을 가까이 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남자가 여성에게 관심을 갖는 것 자체는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일에 분별력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정결한 여인들 중 한 명과 결혼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블레셋 여성들을 좋아했습니다. 

어떤 학자는 이스라엘 여성과 이방 여성을 비교해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여성들은 차림새가 검소했습니다. 화려한 채색옷은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노예살이와 광야 생활을 통해 거칠어졌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여성스러움을 감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가나안에 들어온 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화려하게 꾸미지 않은 여성의 모습은 그다지 남정네들의 마음을 동하게 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이방 여성들은 달랐습니다. 그네들은 자신들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낼 수 있는 차림새를 했습니다. 이방의 우상 숭배 문화 자체가 음란한 것이었습니다. 그녀들은 성적 매력을 한없이 발산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거친 옷을 입은 이스라엘 여성들과 한껏 치장한 이방 여성들은 많이 비교되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솔로몬 왕이 많은 궁녀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의 공주들을 얻은 이유도 이런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쨌든 삼손은 블레셋 여인과 결혼한 적이 있습니다. 결국 이 결혼은 깨지고 그로 인해 많은 비극이 일어나게 됩니다. 출발부터 옳지 않은 결혼이 축복으로 유지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삼손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또 블레셋으로 출입했고, 결국에는 기생 들릴라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들릴라와의 만남은 삼손의 생애를 수렁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복 있는 사람은 시편 1편의 말씀처럼 악인의 꾀를 쫓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아야 합니다. 악한 자와 함께 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남자는 이스라엘 여자와, 이스라엘 여자는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하도록 명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방 여인은 우상 숭배자이므로 반드시 이스라엘을 타락하게 할 것을 우려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보통 사람과 다른 나실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멀리 할 것과 가까이 할 것은 구별하는 것>은 지혜의 기본입니다. 

정몽주의 어머니는 아들을 백로에 비유하면서 까마귀들과 가까이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들을 버리십시오. 가까이 하지 마십시오.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시길 바랍니다. 그 대신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과 가까이 하십시오. 거룩한 이들과 친하게 지내십시오. 


또 삼손의 문제점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소중히 여길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의 힘의 비밀은 깎지 않는 머리칼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삼손만의 비밀이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힘을 없앨 비밀을 알아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들릴라를 위협했습니다. 반드시 삼손으로부터 그 비밀을 알아내라고 협박했습니다. 삼손도 처음엔 들릴라의 집요한 요구 앞에 거짓으로 대답합니다. 차마 머리칼의 비밀을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모든 것을 털어놓게 됩니다. 사사기 16장 17절을 보면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삼손은 들릴라를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녀에게 마음을 내 보였습니다.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습니다. 

여러분, 자신하지 마십시오. 열 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가 없다고 하지요? <얼마든지 세상의 유혹을 이길 수 있다>고 자만하시면 안 됩니다. 아예 처음부터 끊어야 합니다. 이단과 사이비도 그렇습니다. <그저 가서 들어보는 거야 뭐 문제가 되겠어?> 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술자리도 그렇습니다. <가서 마시지만 않으면 되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먹물을 가까이 하면 자신도 모르게 옷에 묻게 마련입니다. 

더구나 상대방이 사악한 동기를 가지고 우리에게 접근하는데, 순진하게 넘어가면 안 됩니다. 진심은 상대방이 진심을 보일 때 보이는 것입니다. 속이려는 마귀 앞에 진심을 보이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의 세력을 진심으로 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마태복음 10장 16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눈앞의 들릴라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하나님과의 비밀을 팔아넘겼습니다. 삼손은 마치 세상의 쾌락을 위해 영혼을 파는 파우스트와 같았습니다. 들릴라가 주는 기쁨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소중한 것을 넘겼습니다. 그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그가 하나님과의 소중한 것을 가볍게 여겼을 때, 하나님께서도 그를 떠나셨습니다. 

사사기 16장 20절을 보십시오. <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여러분, 이 대목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장 비극적 장면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떠나셨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음에도 그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영적 무지를 보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을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그 어떤 달콤한 유혹 앞에서도 그 비밀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의 축복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주 예수님을 세상의 명예와 행복과 바꿀 수 없습니다. 영생의 비밀을 한 순간에 지나는 세상의 즐거움을 위해 버릴 수는 없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믿음의 자존심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삼손은 슬픈 영웅으로 그 삶을 끝내고 있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의 최후가 그의 과거를 만회하고 있습니다. 삼손의 이야기는 슬픔으로만 끝나지 않고, 은혜를 통한 회복의 이야기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16장 22절은 이미 그 회복을 암시합니다.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머리털을 깎이는 바람에 힘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의 감옥에서 그의 머리칼은 다시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소리 없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머리칼이 조금씩 자라면서 삼손의 영혼도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아름다운 여인들, 안목의 정욕을 바라보던 그 두 눈은 뽑혔지만, 그 대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영혼의 눈은 점점 밝아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명예를 회복할 날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머리칼이 자라나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은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어쨌든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놀라운 은총의 이야기입니다. <다시 자라는 머리칼의 이야기>는 절망 중에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희망의 이야기입니다. 죄인에게 주어지는 용서의 이야기입니다. 쫓겨난 사람에게 선포되는 귀환 허락의 이야기입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별 사면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깎인 머리칼이 다시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불신앙과 부주의로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머리칼이 잘린 분이 계십니까?  저는 땅끝교회 교우들 중에도 혹시 머리칼을 잃은 분이 있다면, 그래서 그로 인해 삶에 실패하고 고통을 겪는 분이 있다면 다시 회복되시길 축원합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지켜야 할 소중한 것들을 잃으신 분들이 다시 되찾으시길 기원합니다.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머리칼이 소리 없이 천천히 자라듯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회복과 은총의 시간도 서서히 다가오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결코 포기하지 말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다시 포효할 그 때를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본문에서 삼손의 회복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기도로부터 출발되고 있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아멘! 

그 날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다곤의 신전에 끌어냈습니다. 두 눈이 뽑힌 채 사슬에 매인 그를 바라보면서 모두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신전의 중심이 되는 두 기둥 사이에 기대고 선 삼손은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있었습니다. 그의 가슴은 울렁거렸고, 소리 없는 외침이 하나님을 향해 올려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기도를 시작했을 때, 승리의 추는 다시 삼손에게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삼손이 치른 생애 마지막 전쟁이었습니다. 그는 블레셋 사람들이 섬기는 다곤의 신전 한 복판에서 위대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우상의 신전에서 하나님께 올려지는 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은 대단히 상징적입니다. 기도를 시작했을 때, 이미 삼손은 승리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먹고 마시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삼손의 기도로 인해 다곤 신전은 이미 금이 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난공불락의 적진을 무너뜨리는 가장 큰 무기입니다.  기도하는 순간 이미 우리는 승리를 거두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기도를 쉬는  순간 이미 우리는 패배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 동안 삼손은 주로 자신의 힘을 의지해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기도에 의지해서 싸우려 하고 있었습니다. 이 마지막 순간에 삼손은 엔학고레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던 순간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적과 싸우던 중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샘물을 터뜨리셔서 마시게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엔학고레>란 <부르짖은 자의 샘물>이란 뜻입니다. 

그는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길 갈망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다시 힘을 주셨습니다. 그로 하여금 지난 세월의 실패를 만회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회복되고 싶으십니까? 다시 승리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기도부터 시작하십시오.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기도입니다. 기도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준 <이 엠 바운즈, E.M.Bounds, 1835-1913>는 <지옥이 무너질 정도로 기도하라! 지옥이 뒤집히고 사단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기도야말로 성도에게 최고의 전략이요, 무기입니다. 사단은 기도하는 성도를 당할 수 없습니다. 

기도로 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기도로 치유되시길 기원합니다. 기도로 사업이 부흥하고, 자녀들이 성공하길 바랍니다. 기도로 교회가 부흥되길 원합니다. 우리 교회에 기도 대장들이 많이 일어나길 원합니다. 여러분 새벽기도를 활용하십시오. 꼭 나오십시오. 기도로 힘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삼손의 회복은 그를 생각해 주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가능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삼손에게 마지막으로 힘을 주셨습니다. 그가 신전을 받치는 두 기둥에 의지하여 몸을 굽히자 신전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신전에서 먹고 마시던 블레셋 사람들이 몰살을 당했고, 삼손은 거기서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서 건져야 할 사사로서의 마지막 사명을 다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영웅의 슬프고도 장렬한 죽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회복되고 승리하길 원하신다면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힘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신앙의 기본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삼손은 <주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주>이십니다. 그 동안 삼손을 붙잡아 부린 블레셋 사람들은 주가 아닙니다. 진정한 주는 하나님뿐이십니다. 

또 하나님은 <여호와>이십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건진 분의 거룩한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계시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구원하실 것입니다. 

또 그 분은 하나님, 즉 <엘로힘>이십니다. 여기 정관사가 붙어 있는 것은 그 분만이 모든 신들 중의 신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분은 열방의 우상들을 물리치고 승리하실 분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의지하길 원합니다. <나를 생각하옵소서!>란 삼손의 기도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를 기억하셨습니다. 그리고 힘을 주셨습니다. 그로 하여금 지난날의 실패를 만회하고 영웅답게 서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그 하나님을 통해 승리하길 원합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 삼손이 되시되, 들릴라에게 넘어간 삼손, 실패한 삼손이 아닌, 처음 모습 그대로 나실인으로 살아가는 오늘의 삼손이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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