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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의 비전팀 구성 (마 4: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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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비전팀 구성 (마 4:18-22)
 

사람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외딴 섬에서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물론 가끔 아무도 없는 섬에서 혼자 살고 싶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냥 한번 해 보는 말입니다. 사람은 그렇게 혼자서 외딴곳에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모두 함께 더불어 살아가도록 지으셨습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와 함께 살고 장성하면 부모를 떠나 둘씩 짝을 이루어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살아가면서 싸우기도 하고 다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싸우더라도 모여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 준비를 다 마치셨습니다. 그것도 철저하게 준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데도 과정과 절차를 다 지키고 연단과 훈련을 다 마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가 아들인데도 오히려 더 철두철미하게 훈련을 시키시며 철저히 준비하도록 하셨습니다. 이런 과정을 다 거치신 후에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먼저 하신 일이 바로 열두제자를 선택하신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절대로 혼자 일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함께 하도록 하십니다. 

오늘 가장 서툰 삶이 매사를 혼자하려고 하는 삶입니다. 이런 생활 태도를 가진 사람은 팀 생활이 서툽니다. 하나님의 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전도하시면 얼마나 잘하셨겠습니까? 능력이 넘치고 권능이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혼자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팀을 구성해서 일 하셨습니다. 그리고 불완전하고 미덥지 않지만 제자들을 선택하여 그들에게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사역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하시는 과정을 보면 아주 신비롭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하기 위해서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갈릴리는 가난한 사람들과 낙오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좋은 인재를 뽑으려면 예루살렘대학으로 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수한 인재들은 모두 예루살렘에 모여 있습니다. 갈릴리 해변은 물고기나 잡아먹고 사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가난한 사람들이나 실패한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가난한 지역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거기에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열정

예수님은 함께 일할 제자들을 선택하는 데 있어 열정 있는 사람들을 우선으로 찾으신 것입니다. 제자의 자격에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베드로 일행이 밤새워 그물을 던지고 또 던졌습니다. 고기가 잡히지도 않는데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던졌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습을 멀찍이 서서 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대단한 열정이야. 저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야’, 신앙인에게는 이런 열정이 필요합니다. 여기 베드로를 보십시오. 밤새 그물을 던지고 아침에서야 철수준비를 하느라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오셔서 “고기를 잡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깊은 곳에 한번 더 던져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밤새워 일한 베드로는 지치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또 다시 그물을 들고 나가 던졌습니다. 이것이 열정입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베드로 일행에게 확신을 가지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따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요즘은 일자리 잡기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일자리는 적은데 사람은 넘쳐납니다. 그래서 요새는 회사에서 사원을 뽑기 위해 면접을 볼 때 면접관들이 지식이나 생김새보다 먼저 인간됨과 열정이 있는가를 본다고 합니다. 일할 사람을 뽑는데 열정이 없으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여기 베드로는 충분히 합격할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뜨거운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한번 더 던져보라는 주님의 말씀에 그는 두말하지 않고 또 던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을 때에도 다 버리고 따라 나섰던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의 자질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열정이 요구됩니다. 베드로는 여러 번 실수를 했습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재기하고 또 재기했습니다. 바로 열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열정이 있습니까? 이 열정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이 열정이 제자의 자질입니다. 

어느 암 환자가 스스로 다짐을 했습니다. “내가 죽는 날까지 걸어서 예배에 참석하리라.” 그녀는 그 다짐대로 열심히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 때마다 남편은 산소마스크를 들고 따라다녔습니다. 어느 날인가는 기진맥진했습니다. 이미 머리는 다 빠져서 얼굴은 더욱 창백해져 보였습니다. 그런 그녀가 예배 때 찬양을 하기 위해서 손을 들었습니다. 힘이 없어 들고 있는 손이 떨렸습니다. 그렇지만 끝까지 손을 들고 찬양을 했습니다. 단상 위에서는 목사님이 설교를 하셨고 단 아래에서는 그녀가 손을 들고 찬양하며 예배를 드렸는데 사람들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더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 모습이 열정입니다. 이 열정은 나 자신에게 감동과 자신감과 믿음을 줍니다. 또한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이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 모습을 통해서 투영되는 하나님의 세계와 하나님의 모습을, 하나님이 여기에 지금 함께 하심을 보게끔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그 열정이 있는 곳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대는 이 열정이 식어져갑니다. 그래서 자신감이 상실되고 믿음이 상실되고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 사라져가는 것입니다. 

오늘은 젊은 20대들이 자꾸만 늙어간다고 염려를 합니다. 주간한국이 발표한 통계(2008. 1. 29. 스페셜 리포트)를 보니까 “20대가 늙어간다”는 특집이 게재됐습니다. 오늘 20대는 정치, 경제, 건강에 대해 30대 보다 더 보수적이라고 합니다. 또한 정치성향은 30대 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경제 가치관(2007. 4. 30. 잡코리아 조사)은 20대의 직장선호도가 공무원과 교사가 47.9%이고 자영업은 4.1%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오늘 20대는 안정적인 것을 선호하는 보수적인 세대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배우자 직업 선호도도 남성은 장차 아내가 공무원이나 교사를 선호한다는 대답이 48%를 이루었습니다. 여성도 장차 남편이 전문직 종사자가 47.6%를 차지했습니다. 이 수치는 20대가 경제적으로 도전과 성취보다는 안정과 실용을 희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오늘 20대 남성이 가장 선호하는 배우자는 예쁜 여교사이고 둘째는 생김새가 보통인 여교사이고 셋째는 못생긴 여교사라는 웃지 못 할 이야기도 들립니다. 

또한 건강문제에서도 20대가 4-50대의 전유물로 알려진 한방제품이나 건강음료시장을 거의 장악중이라고 합니다. 거기다가 음식도 웰빙음식을 찾고 있다고 하니 한마디로 말하자면 오늘 젊은이들이 안정 지향적이고 모험하고자 하는 열정이 없어져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세계화 된 것은 제자들의 이 모험심과 열정 그리고 자신을 버리는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같이 몸을 사리고 안정 지향적이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하는데 갈릴리로 가셨던 것입니다. 열정자들을 찾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론이나 지식으로 앉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열정의 소산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 이 열정을 보셨습니다.

겸손 

예수님이 함께 일할 제자들을 선택하러 갈릴리로 가셔서 겸손한 자들을 찾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수재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겸손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질을 갖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순종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은 머리 숙여 인사 잘하는 차원의 말이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인정이 되었을 때 다 버리고 따를 수 있는 의지적 자질을 말합니다. 베드로 일행은 “나를 따르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물을 놓아두고 따라나섰습니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경우 먼저 따지고 계산합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득이 될지 해가 될지 머리를 굴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아무리 재보고 계산하고 따져 봐도 답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고민하고 머뭇거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머뭇거림 없이 그대로 따라나섰습니다. 제자들에게 순종과 겸손의 자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처음에는 어설펐습니다. 실패도 많이 했습니다. 시행착오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겸손했습니다. 그래서 후에 다 성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겸손이라는 자질이 있어야 합니다. 

엘리사를 보십시오. 엘리야가 죽을 때가 다 되었습니다. 그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 엘리사는 소에 멍에를 씌워서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그런 그를 향해 “나를 따르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사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좀 기다려 달라”고 한 뒤 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 소를 잡고 쟁기를 부숴 땔감으로 음식을 만들어 동네잔치를 한 뒤에 엘리야를 따라나섰습니다. 이 선지자의 길이 험하고 힘들어도 실패하고 절대로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의지입니다. 이것이 겸손의 자질입니다. 겸손은 내 의지적 결단과 그 결단에서 나오는 응답입니다. 

그 겸손에는 힘과 능력과 결심이 동반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다” 느꼈으면 즉시 응답하는 것 그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어느 젊은이가 제자가 되겠다고 수도사를 찾아갔습니다. 수도사는 그 젊은이를 데리고 채소밭으로 가서 배추를 심으라고 하면서, 뿌리가 하늘로 가도록 거꾸로 심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수도사가 조금 후에 돌아왔더니 배추가 제대로 심겨져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했느냐”고 물었더니 “배추는 뿌리가 땅으로 가게 심어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수도사는 젊은이에게 “너는 돌아가라. 나는 네게 순종을 요구한 것이지 배추 심는 방법을 구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오늘 사람들은 순종과 겸손의 자질이 많이 부족합니다. 특히 요새 아이들이 참 문제입니다. 비좁은 버스에 무섭게 생긴 아줌마가 올라탔습니다. 그리고 가장 만만한 여학생 앞으로 가서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요새 아이들은 버릇이 없어. 나이 많은 사람이 서 있으면 자리를 양보해야지.” 그러자 여학생이 “아줌마가 할머니예요”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화가 난 아줌마는 더 큰소리로 “아니,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어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대답이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여학생이 당당하게 “그럼 아줌마는 눈을 네모로 뜰 수 있어요?”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람들은 모두 자기 뜻을 내세우는데 길들여져 있습니다. 순종과 겸손의 자질이 빈약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점점 사역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 순종의 자질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선택하는데 예루살렘 번화한 거리로, 대학으로 가지 않으셨습니다. 저 시골마을 갈릴리 해변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겸손자들을 찾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재주로 지식으로 취미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일은 겸손한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다” 싶을 때 다 내려놓고 따를 수 있는 겸손의 자질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가능성

제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자질은 가능성입니다. 제자는 겸손하고 열정도 있어야 하지만 가능성도 있어야 합니다. 오늘 비록 가난하고 무능하고 낙후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능성이 있으면 주님은 그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보잘 것이 없었습니다. 가난하고 무지하고 촌스러웠습니다. 게다가 매번 실패만하는 무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고난 받으실 때는 그 고난의 과정이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결정적일 때 다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제자들이 마지막에는 다 성공했습니다. 마지막에는 다 성령 받은 후 각오하고 나아가서 실행하고 모험했습니다. 그래서 모두 지칠 줄 모르고 일하다가 순교했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순교했고, 야고보는 목이 잘려서, 안드레는 십자가에 달려서, 바돌로매는 가죽이 다 벗겨져서 순교했습니다. 또한 도마는 인도에서 칼에 맞아서, 야고보는 돌에 맞아서 순교했습니다. 모두가 아주 훌륭하게 제자의 역할을 다하고 승리했습니다. 

문제는 각오하고 결심하고 작정하고 나서면 문이 열리고 길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 생각이 소극적이고 계산적이고 안정지향적이니까 계산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니까 실패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계속 그랬다면 그들도 실패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성령강림은 기회였습니다. 성령이 강림하는 날 그들은 새 술에 취한 것 같이 성령의 힘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험하고 헌신하기로 각오하고 결단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길이 열리고 문이 열리고 기회가 주어져서 모두 승리한 것입니다. 기회는 가만히 앉아 있는데 오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앉아있는데 문이 열리고 눈이 열리는 것도 아닙니다. 결단하고 나가니까 문도 눈도 기회도 창조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에게는 이 결단의 용기와 열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때 기회도 문도 길도 보이고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해리 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이 몇 년 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고 행한 연설가운데 “세상을 바꾸는데 마법의 힘은 필요 없습니다. 우리 내면에 이미 그 힘이 존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면의 힘은 “실패의 미덕”이라고 말했습니다. 실패의 경험이 가장 큰 힘이라는 것입니다. 조앤 롤링은 해리 포터를 성공하려고 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결혼에 실패했습니다. 싱글맘으로 아주 궁핍한 삶을 살았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가 없어서 어느 날 자살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어린 딸을 놔두고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무서운 마음으로 다시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이 작정한다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이렇게 작정하고 결단하고 결심하는 것이 무서운 계기를 만들어 기적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녀는 딸에게 동화책 사줄 돈이 없어서 말해줄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마법의 소년 해리 포터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아주 단순한 동기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동화책으로 만들어지자 세상을 뒤흔드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모두에게도 이 마법을 주셨습니다. 내 안에 이 마법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이 은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은사를 개발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고 사장시킵니다. 우리 모두는 이 가능성을 발굴하고 꺼내 써야 합니다. 제자들은 모두 그 자본, 은사, 달란트, 마법을 적당한 시기에 회복시키고 꺼내서 활용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오늘 이 복음이 세계화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혼자 일하지 않으십니다. 부족하지만 사람들을 불러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일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부르실 때에는 열정이 있는 자를, 겸손한 자를, 가능성 있는 자를 부르십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이 자질을 갖추어야 합니다. 갖추고 기다리면 부르심을 받고 사용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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