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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빛의 갑옷을 입자 (롬 1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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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갑옷을 입자 

(롬13:11-14)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1. 예수께서 태어나신 후 팔일이 되어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예식을 행하는 날이 되자 그 부모가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이는 율법에 ‘첫아들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주께 드려라.’(출13:2,12)고 기록된 말씀대로 아기를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살아서 그리스도를 뵈올 것이라는 성령의 계시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므온이 성령님의 인도로 성전에 들어가자 마침 부모가 정결 의식을 행하려고 아기 예수를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안고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 이제는 약속하신 대로 이 종을 놓아 주셔서 내가 평안히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 눈으로 직접 본 하나님의 이 구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베푸신 것으로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 주는 빛이며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된 것입니다.”(눅2:29-32) 

그리고 아기 예수의 부모에게 축복하고 마리아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이 아기는 하나님이 세우신 자입니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아기를 믿지 않아 망하기도 하고 믿어서 구원을 받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기는 사람들의 비난의 대상이 될 것이며 그때 당신은 마치 예리한 칼에 찔리듯 마음이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숨겨진 생각은 다 드러날 것입니다.”(눅2:34-36) 

메시아를 기다리던 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이가 아주 많은 안나라고 하는 선지자였습니다. 안나는 결혼하여 7년 동안 살다가 과부가 되어 여든 네 살이 되기까지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 금식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안나는 마침 성전에 들어온 아기 예수가 온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이신 것을 알아보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구세주를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아기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눅 21:36-39) 

이들 시므온과 안나는 이스라엘의 암흑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추운 계절이라 할 수 있는 400년 암흑기를 살며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려 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정치, 종교적으로 혼란스럽고 가장 부패하여 역사상 가장 소망이 없던 깊은 흑암의 역사를 살며 이들은 의롭게 되기를 힘썼습니다. 경건하기를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의 구원과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항상 성령의 인도를 받았고, 날마다 성전을 가까이하여 밤낮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그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과 그 가족을 보았습니다. 이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아무리 암흑기를 산다 해도 그 시기를 분별하여 메시아를 기다리며 의롭고 경건하게 신앙 생활하다가 예언대로,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예언대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었습니다. 어두운 세상에서일지라도 살아서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도 어느 시대를 살든 항상 성령이 함께 하시는 의롭고 경건한 신앙 생활하다가 자신이 세상을 떠날 때를 알고 언제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가 사는 시기를 두고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역사 종말의 시기가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다고 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다고 합니다. 역사의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집니다. 역사가 종말을 고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그 하나님 나라가 이미 가까이 왔음을 선언하셨습니다.

(막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마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이 불원간 종말을 고하기 때문에 세상을 상징적으로 ‘밤’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그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듯 영원한 아침의 하나님 나라를 ‘낮’으로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역사의 밤이 깊다는 것은 그 종말이 가깝다, 그리고 영원한 아침이 밝아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의 시기를 두고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다.”고 했습니다. 죄의 잠에서, 육의 안일한 잠에서, 게으름과 태만에서, 영적 사망의 잠에서 깨어날 때가 가까웠다는 말씀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의 뜻은 자신의 영혼과 내면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살라, 죄를 경계하고 선한 일을 하도록 힘쓰며 언제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두고 볼 때 지금이 몇 시인지를 알지 못하고 깨어있지 못한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실패자가 될 것입니다. 역사의 흐름에서 지금이 어느 시점에 놓여 있는지를 자각하지 못한다면 지혜있는 생애를 보낼 수 없을 것입니다. 

성도는 깨어서 역사의 시간을 보고 온 세상에 그 시기를 알리는 파수꾼과 같은 것입니다. B.C. 587년경,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부정부패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로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당하리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에 항거하고 도피하지 말고 항복하여 그 형벌을 달게 받으라고 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아니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렘38:2-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이 성에 머무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리라. 그러나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는 노략물을 얻음 같이 자기의 목숨을 건지리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이 성이 반드시 바벨론의 왕의 군대의 손에 넘어가리니 그가 차지하리라.

이에 고관들이 왕께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이 사람이 백성의 평안을 구하지 아니하고 재난을 구하오니 청하건대 이 사람을 죽이소서. 그가 이같이 말하여 이 성에 남은 군사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나이다.’(렘38:4) 

고관들은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같은 것을 깨닫지 못하고 예레미야가 괜한 말로 백성과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린다며 그를 대역죄로 죽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시드기야 왕은 고관들의 말에 꼼짝하지 못하고 예레미야 선지자를 진창 구덩이에 던져 넣었습니다. 진창 구덩이에 던져지게 되면 얼마가지 않아 죽게 됩니다. 그런데 한 신하가 시드기야 왕에게 예레미야 선지자를 석방해주기를 탄원합니다. 그 신하는 하나님을 성실히 섬기는 사람으로 왕의 신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은밀히 석방해서 다시 한 번 나라 운명에 대해 묻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는 가감없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해 하신 말씀 그대로를 전합니다. 예레미야38:17-18을 보겠습니다.

(렘38:17-18)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이르되 만군의 하나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바벨론의 왕의 고관들에게 항복하면 네 생명이 살겠고 이 성이 불사름을 당하지 아니하겠고 너와 네 가족이 살려니와 네가 만일 나가서 바벨론의 왕의 고관들에게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성이 갈대아인의 손에 넘어가리니 그들이 이 성을 불사를 것이며 너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당시 이스라엘 궁중에서 세력을 장악한 무리들은 반 바벨론 파였는데 시드기야 왕은 그들 세력에 질질 끌려다니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시드시야 왕이 반 바벨론주의자들의 정책을 따르게 되면 영원히 헤어날 수 없는 파멸을 당하리라고 단호하게 전합니다. 그 누구라도 하나님의 징벌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 형벌을 달게 받는 것만이 사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얼마가지 않아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었습니다. 이 때 시드기야 왕은 야반도주(夜半逃走)를 시도합니다. 그러나 얼마 달아나지 못하고 체포되어 바벨론 왕 앞에 끌려왔습니다. 그리고 시드기야 왕은 그 아들들이 자기 앞에서 죽임당하는 것을 보아야 했고 시드기야 왕도 두 눈이 뽑히고 사슬로 결박되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예레미야39:4-7을 보겠습니다.

(렘39:4-7) 유다의 시드기야 왕과 모든 군사가 그들을 보고 도망하되 밤에 왕의 동산 길을 따라 두 담 샛문을 통하여 성읍을 벗어나서 아라바로 갔더니 갈대아인의 군대가 그들을 따라 여리고 평원에서 시드기야에게 미쳐 그를 잡아서 데리고 하맛 땅 립나에 있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로 올라가매 왕이 그를 심문하였더라 바벨론의 왕이 립나에서 시드기야의 눈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였고 왕이 또 유다의 모든 귀족을 죽였으며 왕이 또 시드기야의 눈을 빼게 하고 바벨론으로 옮기려고 사슬로 결박하였더라..

(렘 52:10-11) 바벨론 왕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눈 앞에서 죽이고 또 리블라에서 유다의 모든 고관을 죽이며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 왕이 그를 바벨론으로 끌고 가서 그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더라

이처럼 역사의 흐름과 그 시기를 분별하지 못하고 불의의 세력과 타협하거나 하나님 말씀에 깨어있지 못하면 불행한 종말을 당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하고 있습니까?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고 있는 시대는 아닙니까?(암5:7,24) 각계각층에 불의와 부패가 만연해 있고, 구멍뚤린 법망 속에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짓밟고 약탈을 일삼고 있습니다. 딸들이 음행하며 며느리들이 간음을 일삼아도 전혀 죄의식조차 없어 벌하지 아니하는 음탕한 시대가 아닙니까?(호4:1-19) 

최소한의 도덕과 윤리의 방조제가 무너져 행음의 탁류가 가정은 물론 학원, 직장, 정치 등 지위 고하, 유무식을 가리지 아니하고 휠쓸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지성인들조차 잘못 흐르고 있는 역사의 물줄기를 바르게 틀어놓지 못하고 시대에 영합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미 폐기된 사상과 이념이 혼탁한 틈에 진실이 왜곡되어 다수의 무리들에게 독극물을 마시우게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세력화된 종교 문턱에서 곤충 앞발처럼 비비대는 정치인들의 손 때로부터 종교는 과연 깨끗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 나라 민족의 역사적인 시간을 과연 ‘낮’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밤이 깊어지면 낮이 가까워지는 법입니다. 죄악이 극도에 이르는 때는,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이 불같이 임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3.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만 합니다.” 밤이 깊어질수록 죄악은 아침이 밝아오는 것이 두려워 더욱 더 발악합니다. 

경건과 성결한 삶을 위해 신명기23:18에 “(신23:18)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부정하고 추잡한 거래에서 생긴 소득, 음란하고 사악한 짓을 통해 얻어지는 모든 수입은 아무리 많을지라도 그것은 가증한 것, 즉 구역질나는 것으로 성적 문란 행위와 다를 바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유무식이나 빈부귀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삶의 그릇이 깨끗한가 더러운가에 달려있습니다. 금으로 만들어진 금 그릇이라도 더러우면 주인의 쓰임에 합당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비록 흙이나 나무로 만들어진 질그릇 나무그릇이라도 깨끗하면 주인의 쓰임에 합당합니다. 경건하고 성결해야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여기시는 사람이 됩니다. 인생의 주인되시는 하나님 앞에 경건하고 의로운 삶이 되기 위해 “빛의 갑옷을 입으시기 바랍니다.”(put on the armor of light.) ‘갑옷’은 전투를 위한 전투복입니다. 이 시대를 사는 성도들은 세상 죄악의 세력과 싸우되 갑옷, 전투복을 입고 싸우라는 것입니다. ‘빛의 갑옷’은 13절,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말합니다. 죄악된 어두움의 세상에 ‘빛’으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요1:4-5)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고후 4: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스스로의 지식이나 경험, 지식 등으로 어두움의 일, 죄악의 세력을 이기려하지 말고, 빛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능력으로 무장해서 죄악과의 싸움에서 이기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힘과 능력을 의지한다면 죄 앞에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요1:1-9).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없는 생활이 곧 어두움의 생활입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생활 곧 어두움의 죄된 생활상 여섯 가지가 본문 13,14절의 “방탕과 술취함과 음란, 호색, 쟁투, 시기” 등입니다. 육신의 일을 도모했던 어거스틴이 바로 이 말씀을 통해 회개하고 기독교 역사에 찬란한 빛을 던졌습니다. 그는 그의 ‘참회록’에서 말합니다. 

<나는 정원에서 거닐고 있었습니다. 나의 마음은 선한 생활을 하려던 계획의 실패로 절망 중에 있었습니다. 나는 비참하게 부르짖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더 오래? 얼마나? 내일, 그리고 또 내일? 왜 지금은 안 될까? 왜 이 시각에 내 타락한 생활에 종지부를 찍지 못하나?” 그가 갑자기 “들어 읽어라, 들어 읽어라” 라고 하는 말을 들을 때까지는 내가 이같이 말하고 생각하고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그 소리는 어린아이의 목소리 같았습니다. 

나는 이런 말이 나오는 아이들의 장난을 생각해 내려고 머리를 쥐어 짜보았으나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바울 서신 한 권을 두고 왔기 때문에 친구 알리피우스(Alypius)가 앉아 있던 자리로 급히 되돌아갔습니다. 나는 그 책을 날세게 집어 내 눈이 닿은 첫 구절을 조용히 읽었습니다. ‘방탕이나 술 취함과 부도덕과, 파렴치와 쟁투와 반목 속에 행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이 옷 입듯 입을 것이요, 네 첫째 생각이 그리스도 없는 인간 본능의 욕구를 만족시키려는 생활을 중지하라.’ 나는 더 읽으려 하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 문장의 끝과 함께 내 마음속에 보증의 빛이 쏟아져 들어오듯이 모든 의심의 그늘이 흔들리었습니다. 나는 내 손가락을 그 페이지에 넣고 책을 덮었습니다. 그리고는 고요한 얼굴로 알리피우스에게 향하여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로마서13:13-14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어거스틴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으로 단번에 지금까지의 방탕한 생활을 깨끗이 청산하고 의롭고 경건한 삶으로 변화된 것입니다.(눅 21:34).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그의 어두운 삶을 빛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그의 삶이 빛의 갑옷을 입게 된 것입니다. 빛의 갑옷을 입고 살게 되면 하루를 살지라도 천년같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비록 천년을 산다 해도 하루살이같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하루를 살지라도 빛의 갑옷을 입고 천년같이 사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4.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께서 “(마5: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예수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세우신 목적이 바로 ‘이방인의 빛’이 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42:5-9을 보겠습니다.

(사42:5-9)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이방’이란 예수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은 예수 믿지 아니하는 어두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빛이 되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인디언의 우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해’가 ‘어두움’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별’이 ‘해’를 데리고 아주 캄캄한 굴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 굴에 ‘해’가 들어서자마자 ‘어두움’은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에 역시 ‘해’에게 흑암을 보여 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우화가 말하려는 것은 흑암을 해결하는 길은 어두워진 원인을 분석하거나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빛”이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어두움의 세상가운데 등대와 같은 길잡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오래 전 뉴욕의 이야기입니다. 한 처녀가 등대지기에게 시집왔습니다. 총각의 이름은 제이콥 워커(Jacob Walker)였습니다. 이 두 젊은이는 등대 하나만 있는 외딴 섬 로빈스 리프(Robins Reef)에 살아야만 했습니다. 신부는 이런 데서는 도저히 못살겠다고 1개월간이나 짐을 풀지 않았으나 혼자 떠날 수도 없어 그럭저럭 정착했습니다. 그러나 3년 뒤에 남편 제이콥은 폐렴이 되어 스태튼 아이랜드 병원에 입원하였으며 얼마 뒤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임종하기 전에 제이콥이 남긴 마지막 말은 “등대에 마음을 써달라.”(Mind the light)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의 시체를 등대에서 보이는 언덕 위에 묻고 20대인 워커 부인은 등대를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수백 번 섬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북바쳐 오르는 고생과 고독의 연속이었지만 만 70세까지 41년간을 이 여성은 혼자서 등대를 지켰던 것입니다. 마음이 변하려는 때마다 언덕 위에서 ”등대에 마음을 쓰라“는 남편의 음성이 그녀의 발을 붙잡았다고 합니다. 제이콥 워커와 같은 말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

(롬13:12). 흑암의 세력이 강하게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빛의 갑옷을 입고 가정의 어두움을 몰아내고 빛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의 터전에서 빛이 되시고, 빛을 발함으로서 어두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생명의 빛으로 인도하는 사명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는 네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어두움을 만드는 인간입니다. 그 사람 때문에 사회의 한 모퉁이,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 혹은 한 나라와 세계에 문제가 생기고 싸움이 생기고 불행이 생기는 어두움의 이유가 되는 인간입니다. 

둘째는 어두움 속에 묻혀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어둠을 만들지는 않지만 어두운 상태가 편리하기 때문에 처세와 재미와 자기 보호를 위해 어두움을 묵인하거나 어두움에 협조하는 인간입니다. 간접적으로 어두움을 만드는 인간입니다. 

셋째 부류는 빛 속에 안주하는 사람입니다. 남의 수고, 남의 땀, 남들이 만들어 놓은 평화와 좋은 제도와 안전장치를 이용하고 즐기면서 사는 인간입니다. 나쁜 일도 하지 않지만 좋은 일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어둠을 만들거나 어두움에 협조하지도 않으나 자기 자신이 빛을 발하지는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넷째는 빛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등대를 지키고 어두운 바다에 방향을 알려주는 사람입니다. 역사의 밤, 죄악의 밤은 점점 더 깊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새 아침이 더욱 더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칠흑 바다같이 어두운 세상에 등대와 같이 한 줄기 빛을 비춰 항해하는 인생들에게 삶의 궁극적인 목적지인 천국의 항구에 인도하는 것이 성도 여러분의 사명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패역을 품으며 항상 악을 꾀하여 다툼을 일으키는 자에게 재앙이 갑자기 내려 당장에 멸망하여 살릴 길이 없게 될 것입니다.”(잠6:14-15)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게 됩니다.”(잠29:1-2) 

“자신이 자신의 인생의 주인처럼 생각하고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고, 자신의 종말도 생각하지 아니하며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들은 한 날에 갑자기 자녀를 잃으며 과부가 되는 등 엄청난 재앙이 임할 것입니다. 무수한 주술과 많은 주문을 빌릴지라도, 자신의 모든 지혜와 지식과 능력을 다할지라도 갑자기 임하는 재앙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재앙들을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임하여도 깨닫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사47:7-11) “

성도 여러분, 그 때와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분에게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의 날이 밤중에 도둑같이 온다는 것을 여러분이 잘 알기 때문입니다. 마치 해산할 여자에게 고통이 닥치듯 사람들이 평안하고 안전한 세상이라고 마음 놓고 있을 때 갑자기 그들에게 멸망이 닥칠 것이며 사람들은 절대로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나 여러분은 어두움 가운데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날이 여러분에게 도둑처럼 닥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들이며 낮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자고 있을 것이 아니라 깨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잠자는 사람들은 밤에 자고 술 마시는 사람들도 밤에 마시고 취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므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믿음과 사랑과 구원의 소망으로, 그리고 빛의 갑옷, 예수 그리스도의 성결한 옷으로 무장하시기 바랍니다.”(살전5:1-8)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 사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향하여 ‘나의 피난처요 요새이며 내가 신뢰하는 하나님이시라.’ 는 믿음으로 사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의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어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게 될 것입니다.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그 어떠한 재앙이 가까이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자신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화가 여러분에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여러분의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모든 길에서 여러분을 지키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너를 건지리라. 네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너를 높이리라. 네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너에게 응답하리라. 환난 당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시91:1-16) ‘빛의 갑옷’을 입고 살고자 하시는 성도 여러분에게 이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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