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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누며 삽시다 (행 4:3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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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며 삽시다 (행 4:32-37)


인간이 역사 상 발전시켜 사용해 온 사회 체계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 중에 최근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는 사회 체계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공산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입니다.

우선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제’ 대신에 ‘공유재산제’를 추구합니다. 네 것 내 것이 없이 모두가 함께 소유하고자 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면서 계급 없는 평등사회를 이룩하고자 하는 이상을 꿈꾸는 제도입니다.

그러나 아름답고 좋은 이 이상이 현실에 적용되면서, 많은 부작용이 일어났습니다. 기존의 사유재산제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혁명이 일어나, 남의 재산을 빼앗고 많은 사람을 죽이는 참혹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면서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게 되었고, 효율이 떨어져 나누는 몫이 줄어들면서 모두가 함께 가난해 지는 일이 생겼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공산주의 사회 안에 새로운 권력 엘리트들이 나타나서 새로운 계급이 형성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공산주의는 20세기 말 동유럽부터 몰락하기 시작했고,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는 상황입니다. 

다음으로 자본주의는 사유제산제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 경제 체제를 말합니다. 합리적인 자유경쟁을 통해서 이윤추구를 해가면서 사회의 부가 늘어나고, 그 과정에서 사회 구성원 모두가 더욱 잘 살게 되는 사회를 이룩하고자 하는 이상을 꿈꾸는 제도입니다.

그러나 이 체계도 현실에 작용되면서 역시 많은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가진 자들의 횡포 속에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됩니다. 지나친 경쟁 속에 약자들이 점점 더 소외되어 갑니다. 공익보다 사리사욕에 치우치면서, 환경파괴와 같은 심각한 문제들이 생겨납니다. 

결국 21세기에 들어와 자본주의는 세계가 글로벌화되면서 그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점점 현재의 자본주의로는 안 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져만 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만들어온 사회 체계는 나름대로 훌륭한 이상을 가지고 잘 발전해 왔습니다. 

공산주의를 생각하면 그 이상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모두가 함께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가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이 현실화되면서 깨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두가 고통 받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본주의를 생각해보면 또한 그 이상이 얼마나 좋습니까? 모두가 자유롭게 일하면서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여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이 현실화되면서 깨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치열한 경쟁이 일어나는 정글과 같은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이상은 좋고 체계는 나무랄 데가 없는데, 왜 현실은 그렇지 못할까요? 

간단합니다. 사람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기적이고 탐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남을 돌아보지 못하고 베풀고 나누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변하지 않는 한 아무리 좋은 체계도 그 이상대로 실현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유토피아는 건설될 수 없습니다. 성경말씀 그대로 패역한 세대,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천국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공산주의 체계 속에서든지 자본주의 체계 속에서든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특히 신앙공동체 안에서는 더더욱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인간이 경험해 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신앙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명을 따라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었습니다. 저들이 오로지 기도에 힘쓸 때, 예수님께서 약속하셨던 성령이 강림했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 모두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 받은 사람들이 전혀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초대교회에 큰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저들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게다가 영적 지도자인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다 투옥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자칫 영적 지도자를 잃게 될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저들이 풀려나고 일단 위기를 모면하게 됐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이 초대교회가 믿음이 더욱 성숙해 지게 되었습니다. 더욱 성령 충만하게 되었고, 박해를 능히 이길 담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오늘 본문을 보면 저들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나누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자기 밭과 집을 팔아 그 판 것을 사도들에게 전하니, 사도들이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서로 나누어 썼습니다. 그래서 이 공동체 안에는 가난한 사람 즉 무엇인가가 부족하여 고통 받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공산주의와는 다른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네 것과 내 것이 없이 함께 소유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네 것과 내 것이 있지만 자발적으로 나누어 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은 자본주의와도 다릅니다. 자본주의는 서로 자유롭게 경쟁하여 이익을 취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서로 경쟁이 없습니다. 그리고 서로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없습니다.

결국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공동체는 인간이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 체제이기도 합니다. 바로 서로 열심히 땀 흘려 일하고 가진 것을 나누며, 함께 더불어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체제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체제의 핵심은 나눔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심령 가운데 임하시면 나눌 수 있게 됩니다. 움켜쥐었던 손을 펼 수 있게 됩니다. 서로 서로가 나누면서 더불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하고, 오늘 우리가 추구해 가야할 모습입니다.

이제 본문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저들이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본문 34절을 보면,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편이 넉넉한 사람들 중에 자기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6-37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바나바라는 사람이 자기 밭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내놓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저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자기 재산을 사도들에게 내놓았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자기 재산을 소유하지 말라고 가르친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저들에게 재산을 팔아 가져오라고 명한 일이 없습니다. 저들이 자발적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 비결이 31절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저들이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저들이 성령이 충만한 채로 공동체 안에 가난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성령께서 저들의 마음을 감동하셔서, 저들을 불쌍히 여길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저들이 자기들이 할 일을 찾게 됩니다. 성령께서 저들로 하여금 자기 재산을 팔아서 저들과 나눌 수 있도록 권고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인간이 타락한 뒤에 인간에게 일어난 변화 가운데 하나가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지 못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우선 자신의 인생의 짐을 짊어지고 가기가 힘이 겹습니다. 노동을 해야 생존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말에 “내 코가 석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문으로는 오비삼척(吾鼻三尺) 또는 오비체수삼척(吾鼻涕垂三尺)이라고 합니다. 내 코에 콧물이 흘러 내려와 삼척이 되었는데도 닦을 여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삼척은 90센티가 넘는 길이인데, 이토록  콧물이 흐르는데도 닦을 형편이 못되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내 사정이 다급하고 궁해서 다른 사람을 돌 볼 겨를이 없을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다음으로 우리 마음속에 사랑마저 식었습니다. 그래서 여유가 있는 사람들조차 서로를 돌아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은 남의 딱한 형편을 보면서도 나누지 못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아예 남의 딱한 형편을 볼 수 있는 눈마저 멀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시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는 눈이 열립니다. 어렵지만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 받은 우리들이 어려운 이웃을 돌아볼 수 있는 눈을 더욱 활짝 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려운 중에서도 어려운 이웃과 나누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으로 나눔을 실천했습니다.

오늘 본문 32절을 보면, 믿기 어려운 내용이 기록되어있습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이웃을 위해 소유권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서로를 위해 자기 것을 내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공산주의입니다. 내 것 내 것이라 하지 않아서 모든 것이 우리의 것입니다. 모두가 소유를 주장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사용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묵시적으로 합의를 이룰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것 네 것 따지지 말고, 필요한 사람이 함께 사용하자고 합의를 이룰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힘들었던 사람이 누구였을까요? 그 중에 가장 부자였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어차피 내 놓을 것이 별로 없고, 오히려 얻을 것이 더 많기 때문에 환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얻을 것보다 내 놓아야 할 것이 훨씬 더 많기 때문에 동의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결국 여기에 더 많이 가진 자들의 나눔이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이 나눔을 실천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나눔을 실천했던 사람들이 많았고, 그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나눔의 실천에 동참했기 때문에 이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 방송국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소개된 이야기입니다. 
방송국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한 할머니가 아침 방송을 듣고 거신 것이었습니다. 그날 아침 딱한 사연이 전파를 타고 흘러 나갔습니다. 겨우 다섯 살밖에 안 된 승환이가 뇌종양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형편이 어려워 수술을 못 받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차라리 제가 아팠으면....." 하는 승환이 어머니의 울먹이는 소리로 그날 전파는 유난히 떨렸습니다. 

할머니는 승환이를 돕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남겼습니다. "직장에 다니는 저의 큰아들도 얼마 전 뇌종양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고맙게도 직장 동료들이 우리 집 어려운 사정을 알고 모금을 해 가져왔습니다. 우리 아들은 내일 수술을 받습니다. 그런데 돈이 없어 죽어 가는 아들을 지켜보고 있는 그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기도하다가 결정했습니다. 이 수술비의 반을 승환이네에게 주기로 말입니다. 우리야 또 어떻게 마련되겠지요. 그러나 승환이네는 아무 것도 없잖아요. 승환이가 수술 받고 다시 일어나 엄마 앞에서 밝게 웃기만을 기도합니다." 

방송국 실무자들은 정말 큰 감동을 맛보았습니다. 방송을 하고 있는 보람을 느꼈고 세상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보게 됐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눔은 실천되어야 합니다. 마음속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나눔이 마음속에서 실천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 용기와 능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 용기와 능력은 바로 성령께서 주십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두가 이 용기와 능력을 덧입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나눔에 동참하게 됐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이 용기와 능력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나눔을 실천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눔으로 천국이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본문 34절을 보면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난한 사람이란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 사람을 뜻합니다. 

왜 초대교회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고아도 많았고 과부도 많았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로 나눔을 통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최근 국제적십자사 연맹(IFRC)이 주목할 만한 보고서를 냈습니다. ‘연례 세계재난보고서’입니다. 이 보고서 안에 이런 보고 내용이 있습니다. “2010년 현재 지구촌 인구 가운데 약 20%에 달하는 15억 명은 비만으로 고민하고 있는 반면, 15% 정도인 9억 2500만 명은 영양실조로 고통 받고 있다.” 특히 베켈레 겔레타 사무총장은 “자유로운 시장의 힘이 상호 작용한 결과 지구촌 인구의 15%가 굶주리는 한편, 다른 20%는 비만과 과체중에 시달리고 있다면 뭔가 일이 잘못돼가고 있는 것”이라고 개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천국이 아닙니다. 점점 지옥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고 있습니다.

경주 최부자 가문은 12대를 이어 만석꾼의 복을 누렸습니다. 그렇게 된 비결이 바로 ‘육훈’(六訓)에 있습니다. 그 중 여섯 번째가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생각할 때마다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이런 갸륵한 생각을 하는데 도대체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교회 안에 굶는 사람이 있어서 되겠는가? 교회 주변에 굶는 사람이 있어서 되겠는가?”

이런 생각으로 시작한 것이 푸드뱅크 사역입니다. 교회 주변의 독거노인들을 섬기자는 사역입니다. 홀로 사시면서 먹는 문제 때문에 힘겨워하시는 분들을 돕자는 사역입니다. 우리 지역이 지옥으로 변해가는 것을 막아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청년부에서 하는 아프리카 긍휼 사역입니다. 멀리 아프리카에 물이 없어 목말라하는 사람들에게 우물을 파 주자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사람들을 돕자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지옥으로 변해가는 것을 막아보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이 지옥으로 변해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우리 때문에 우리 가까운 주변이 보다 따뜻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성령의 은혜로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이 우리의 나눔으로 천국으로 변해가게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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