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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눅 18: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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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눅 18:18-30)

몇 년 전 삼성그룹의 고 이병철 회장과 높은뜻 숭의교회 김동호 목사님이 면담했던 내용이 인터넷에 실렸습니다. 이 회장이 질문을 했습니다. 성경에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는 말이 있다는데 이는 부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입니까? 

이에 김 목사님은 예수님의 말씀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재물이 많으므로 하나님을 찾을 일이 별로 없다는 말이라고 답변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병철 회장에게 두 가지를 권고했답니다. 이 회장님은 앞으로 하나님을 아는 일과 재물을 나누는 일을 많이 하셔야 한다구요. 아마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이병철 회장과 같은 고민을 갖고 있을 겁니다.

낙타의 비유는 어떤 청년이 영생의 문턱에서 재물을 포기하지 못하여 근심하며 돌아간 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청년의 영적인 상태를 정확히 진단하시고 그에게 부족한 한 가지인 돈이 영생을 얻는데 걸림돌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의 신앙상태를 진단하신다면‘부족한 한 가지’는 과연 무엇이 될까요? 그 부족함을 채우면서 분명한 구원의 확신과 더불어 주 안에서 부요한 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가버나움을 떠나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그의 생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누가복음 18장은 세상에서 약자로 여김 받는 자들이 소위 세상의 강한 자들보다 하나님 나라에서 인정받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1~8절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의한 재판관이 자기를 계속해서 귀찮게 하는 과부의 억울함을 마침내 들어주는 스토리가 나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 성도들의 끈질긴 믿음의 간구가 종말을 사는 성도들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지난 주일에 다루었던 9~1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가장 경건한 부류로 인정받으며 자기의 의를 세우는 바리새인보다, 사람들에게는 죄인 취급을 당하나 하나님 앞에 가슴을 치며 애통하는 세리를 의롭다고 손을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15-17절에서는 안수를 받겠다고 아이들이 예수님께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 제자들이 꾸짖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자들의 것이라 하시면서 아이들이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하십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만을 취하고 그렇지 않으면 버리려 하는 계산적 태도가 아니라 온 마음을 다해 그것을 사모하고, 다른 모든 것을 버려서라도 원하는 것을 취하려고 하고, 얻으면 감사하는 어린이와 같은 자세가 천국백성의 모습이라고 하십니다. 

본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누가 과연 주님이 인정하는 사람입니까?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1)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사람입니다 (18-19절) 

그 동안 예수님 앞에 나온 사람들은 질병에 걸렸거나 귀신에 들렸거나 사회적으로 소외된 계층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는 청년은 그들과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입니다. 같은 사건이 마태복음 19장과 마가복음 10장에 나오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재물이 많은 청년으로, 마가복음에서는 부자로 소개됩니다. 

세 복음서를 종합해보면 예수님 앞에 나온 사람은 부자 청년이요 관리입니다. 젊은 나이에 어떻게 해서 많은 재산을 가지게 되고 관리가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더구나 그 청년은 그저 세상의 것만을 목표로 삼고 육신의 쾌락을 추구하는 보통 젊은이들과 달리 영생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자부할 만큼 모범적이고도 경건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앞에 나온 바리새인과 같이 이 청년 역시 자신의 의를 충분히 자랑할 만한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율법적인 종교생활을 열심히 해도 영의 필요를 채울 수 없었습니다.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그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도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에 영생을 하나 추가하기만 하면 더 이상 부족한 것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예수님께 나아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그 비결을 묻습니다.  

청년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였지만 청년은 예수님을 단지 착한 일을 많이 한 선생님으로 이해하였기에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자기 죄를 구원하실 수 있는 구주로는 알지 못합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선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만약 선하지 않으시다면 예수님은 죄인이요 예수님이 죄인이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실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청년이 생각하는 선함의 차원이 주님의 것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선하시다는 것을 강조함으로 어느 누구도 선할 수 없고, 어떤 행위로도 영생을 얻을 수 없고, 영생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라는 것을 말해주십니다. 하나님께 속한 선함의 의미를 제대로 알았더라면 그 청년은 예수님께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전적으로 순종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순종할 수 없었기에 그토록 원하는 영생을 얻지 못하고 돌아서고 맙니다. 

2)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20-21절) 

예수님께서 영생을 얻기 위해 해야 할 것으로 십계명의 일부를 언급하십니다. 사실 하나님의 법을 다 행하면 삽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법을 지켰더라면 영생을 얻었을 것입니다. 율법의 본래 의미는 instruction, 지침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 위하여 주신 지침입니다. 그 지침대로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신 28:2). 

문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율법의 규정된 계명을 대부분 다 지키고 한 가지만 못 지켜도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롬 3:10,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우리 속에는 아담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죄성이 있기에 본질상 선할 수 없고, 하나님의 법을 제대로 지킬 수 없습니다. 청년은 영생을 얻으려면 어떤 노력이나 선행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예수님께서 자기가 어릴 때부터 잘 지켰다고 자부하는 계명들을 언급하셨을 때 만족해하는 표정을 지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행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과 얼마나 올바른 관계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영생은 인간의 노력이나 재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얻습니다.  

3) 인생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22-23절)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을 것 같은 그 청년,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청년을 기특하게 여기시면서도 예수님은 그의 “한 가지 부족한 것”을 지적하십니다. 만약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면 예수님은 청년에게 계명을 계속해서 완벽하게 지키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대신 예수님은 말씀으로 도전하십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하시면서 그 청년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십니다.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단지 나를 좇으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네 소유를 당장에 다 팔아라. 가난한 자들에게 당장 나누어 주라. 그러고 나서 나를 계속해서 좇으라고 하십니다. 주님을 따르며 영생을 얻을 것이냐 아니면 자기의 재물에 집착할 것이냐의 기로에서 그 청년은 재물이 많은 고로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버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를 설득하면서 가지 말라고 붙들지 않으십니다. “힘든 요구를 해서 미안하다. 너를 놀라게 하여 떠나게 할 생각은 없었단다. 네가 소유한 모든 것을 팔 생각이 없다면 좋다 얼마까지 포기할 수 있겠니?”라고 말씀하지도 않으십니다. 영생을 얻기 위한 조건은 토론이나 타협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 청년은 삶의 우선순위를 제대로 몰랐습니다. 그가 이해한 영생의 가치는 그의 재물보다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였고,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였습니다. 율법의 참 정신은 규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의 소유를 모두 포기한다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의 명령이 모든 부자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원리는 아닙니다. 이 청년의 경우는 재물에 대한 집착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는데 걸림돌이 되었기에 재물 문제를 언급하셨을 뿐입니다. 성경에는 부해지려는 욕심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말씀들이 많이 있지만 부를 소유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삶에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우상, 즉 그의 소유욕을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상, 온전한 주인으로 행하실 수 없는 자리에는 거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각 사람의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내용으로 도전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모든 성도들의 궁극적인 목표요 그런 과정에서 걸림돌이 되는 것은 없애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데 방해되거나 지체시키는 것이 우리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됩니다. 그‘한 가지 부족한 것’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을 때만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게 되고 영생을 소유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좇다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보다 가치 있고 영원한 것을 놓치는 어리석음이 없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보니 전에 대단하게 여기던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청년은 영생을 그가 가진 재물을 포기하면서까지 얻을 만한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만나면 위로를 받고 치유를 받고 삶에 변화가 나타납니다. 혈루증 걸린 여인은 주님을 만나고 나서 그 병을 치료받았습니다. 야이로의 딸은 주님이 찾아가시니 다시 살아났습니다. 사람의 낯을 피하던 뜨거운 낮에 몰래 물을 길던 수가성 여인은 주님을 만나고 나서 새롭게 인생의 의미를 깨달으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귀신들린 아이를 데리고 왔던 아버지는 주님을 만나고 나서 믿음을 가지게 되고 자기 아들은 치료함을 받았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시면서 주님은 우리의 무거운 짐을 져 주시는 분이신데 이 청년은 혹 떼려 왔다가 혹 붙이는 격으로 오히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예수님 곁을 떠나간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자와 받지 못하는 자의 차이입니다.    

*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24-27절)

예수님은 근심하고 돌아서는 청년을 보시며 하나의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4절) 

그 당시 사람들은 부자란 하나님의 복을 특별히 받은 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하시니 제자들이 많이 놀랐을 것입니다. 많은 경우 부자는 재물에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을 찾지 않거나 하나님만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하시며 그들에게 천국을 약속하셨습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27절). 자신의 가진 것을 포기한다는 게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합니다. 

사실 크든 작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을 전적으로 포기하는 일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회개도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제대로 회개합니다. 믿는 것도 하나님이 믿음을 주셔야 믿습니다. 사람의 행위나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지만 하나님은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습니다. 구원이란 인간이 가진 조건이나 의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베푸시는 은혜로운 선물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복음성가 91장 “믿음으로 가는 나라”

1. 돈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힘으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2. 벼슬로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지식으로 못가요 하나님 나라
3. 어여뻐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맘착해도 못가요 하나님 나라

거듭나면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믿음으로 가는 나라 하나님 나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렇다면 우리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제자들이 불안해합니다. 그때 나서기 좋아하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한 마디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 청년은 재물을 버리지 못하고 주님을 따르지 못하였는데 그와 달리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니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분명하죠? 무엇인가 주님으로부터 보장을 받고 싶어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상급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천하보다 귀한 당신의 귀한 생명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방해되는 것을 모두 버리고 어린 아이가 부모를 의존하듯이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며 따르는 사람들에게 어떤 약속이 주어집니까? ‘버림’의 제자도를 실천하고 있는 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30절)고 말씀하십니다. 

부자 관원과 같이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영생에 관심이 있을지라도 그 영생은 그와 상관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버린 자들에게는 새로운 부요함이 주어집니다.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관계 속에서 여러 배의 부모들, 형제들, 자녀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은사를 통해 자신의 부족이 채워지며, 자신의 은사를 통해 그들의 부족이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금세에 누리는 이런 복은 내세에 누리게 될 영원한 복을 미리 맛보는 결과가 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 12명의 제자를 훈련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에는 120명이 다락방에 함께 기도하다가 성령에 충만하여 복음을 외치니 하루에 3000명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이후로 믿는 자들이 놀랍게 증거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인 영적 가족입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살 때도 고난은 있지만 결국은 우리의 삶이 풍성해집니다.   

(요 10: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고후 9:10)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빌 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딤전 1: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풍성하다는 것은 단순히 부자가 되거나 범사에 언제나 문제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주 안에서 참된 만족과 평강을 누리는 삶을 말합니다.    

마가복음 9:31에서 예수님은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재산과 권력을 가짐으로 세상에서 첫째였던 사람들이 주를 위해 그것을 포기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내세에서 뒷전으로 밀릴 것입니다. 그러나 주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자들은 비록 이 세상에서는 ‘나중 된 자’이지만 내세에서는 으뜸이 될 것입니다. 

또한 공동체 안에서 누가 크냐 다투고 공동체 밖의 사람들에게 대하여 배타적인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됩니다. 내가 다른 지체보다 주님을 더 사랑했다고 생각하거나 더 헌신했다는 우월감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먼저 믿었으니, 저 사람보다 더 일을 많이 했으니 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지 주님의 판단 기준은 아닙니다.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중심과 동기를 보시는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때 기대 밖의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나중에 주님 앞에 서게 되면 인간의 판단에 따른 처음과 나중이 많이 바뀌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순수한 동기로 헌신해야 합니다. 교만하지 말고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고 겸손하게 주님을 따르기만 하면 됩니다.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누가복음 18장은 하나님 나라가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이기는 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신실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을 때에 세상 속에서 우리의 지위, 소유, 능력에 의존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만을 의존함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우리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에 주님께서 손을 들어주는 자가 승리자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따로 서서 기도하던 바리새인의 손을 들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영생에 관하여 많은 관심을 가졌던 부자 관원도 주님 앞에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누가 부요한 자입니까? 돈이 많은 자입니까? 많은 것을 소유한 자입니까? 많은 것을 누리는 자입니까? 주님을 향해 눈이 뜬 자입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내려놓은 자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사는 자입니다. 

예수님께 나온 부자 청년은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나무랄 데가 없었습니다. 영생에 관심이 있었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정도로 겸손하였고 율법을 잘 지킬 정도로 모범적인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지켰다고 자부했던 그 청년도 끝내 재물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이 주신 재물을 이웃과 더불어 나누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이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돌아간 것을 보시고 제자에게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심히 어렵다고 하십니다. 성경은 재물을 죄악시하지 않습니다. 재물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부자가 구원받기 어려운 이유는 이들의 부가 삶에서 하나님을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부자를 포함해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부자 청년을 실족케 한 것은 재물에 대한 집착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실족케 합니까? 제자도의 핵심은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기 위해 제자들처럼 버려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원자요, 심판자이십니다.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고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산 장사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드려서라도 얻어야 귀한 분입니다. 

신앙은 문자적으로 계명을 실천하는 엄숙한 삶을 넘어서 하늘의 보화를 소망하며 이 땅에서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요 예수님만으로 만족하는 삶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과 다른 많은 상급이 얻게 될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으로는 우리의 심령을 만족스럽게 다 채울 수 없습니다. 물질적으로 풍부하고 편안한 삶을 살아도 우리의 마음이 평안이 없을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 세상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 허전한 곳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와 같은 영적인 빈곤은 하나님의 말씀, 은혜, 사랑과 능력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대신 담당하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한 번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한 구원의 확신 속에 주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며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을 받으며 상급을 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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