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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듣고 앎이라 (요 4:3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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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 앎이라 (요 4:39-42)


난생 처음 백화점엘 가 본 시골 할아버지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신기한 듯 이것저것 구경을 하는데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할머니 한 분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쏙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문이 열리고서는 예쁜 아가씨가 내리니까 이 할아버지는 너무나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는 옆에 있던 손자의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습니다. 

“할아버지 왜 그러세요?”
“니네 할머니도 저 기계 속에 넣었다가 끄집어내야겠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신비한 기계이십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갔다 나오면 죄인이 의인이 되어 나오고, 낡은 인생이 새로워져서 나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성경의 수많은 사람들, 기독교 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모두 새로워졌습니다. 
우리 삶의 행복과 불행은 어떤 만남을 가지면서 살아가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만남’은 중요합니다. ‘좋은 부모’ '좋은 아내’ ‘좋은 남편’ ‘좋은 친구’ ‘좋은 스승’ ‘좋은 선배’ ‘좋은 후배’와 같은 만남이 중요합니다. 

한 소년이 호수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시골 소년이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10년 후 두 사람이 다시 만났습니다. 시골 소년은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 진학할 수 없었습니다. 딱한 사정을 전해들은 소년의 아버지는 시골 소년이 의학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물에 빠졌던 소년은 훗날 영국의 수상이 됐습니다. 가난했던 시골 소년은 페니실린을 발명해 노벨의학상을 받았습니다. 윈스턴 처칠과 세균학자 알렉산더 플레밍 박사 이야기입니다.
1940년 5월 처칠은 폐렴으로 거의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당시엔 한번 걸리면 낫지 않는 죽음의 병이었습니다. 처칠의 꺼져가는 목숨을 건진 건 바로 페니실린이었습니다. 좋은 만남은 생명을 살리고 인재를 키웁니다. 인간은 혼자만 살 수 없습니다. 타인과의 만남 속에서 서로 돕고 살아야 합니다. 상대방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만남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섭리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복된 만남이 있는가 하면 아합과 이세벨의 불행한 만남도 있습니다. 

부모님은 내가 선택해서 만날 수 없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좋은 믿음의 부보 밑에서 자랄 수 있다면 이것보다 복된 일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밖의 모든 만남에 있어서는 그 만남을 복된 만남으로 만들 수도 있고 슬픈 만남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만남이 복된 만남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주 안에서의 만남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서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나는 주님께 좋은 친구입니까? 또한 나는 나와 만나는 모두에게 복된 만남을 경험하게 해 주는 좋은 사람입니까?
그러기에 이 시간 우리는 서로의 만남이 복이 되길 항상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네 삶이 험한 나그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서울대학교에서 수학한 학사 가수 최희준씨가 지긋한 목소리로 불렀던 하숙생이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그 가사는 이렇습니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인생은 벌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 없이 흘러서 간다”

우리 모두는 행복한 삶을 꿈꿉니다. 마치 소꿉장난 하듯 그렇게 오순도순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인생이라는 것이 그런 행복한 날만 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때론 풍파가 있습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폭풍우가 몰아닥치기도 합니다. 얼마나 그 인생살이가 힘들었으면 바로 앞에 선 야곱이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어찌 보면 다른 집은 다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결코 그런 것만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인생살이가 그토록 힘이 든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우리의 본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살아가는 이 세상은 잠시 있다가 떠나야 될 나그네 길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흔히 하는 말로 집을 떠나면 개고생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좋은 호텔에서 자고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는다고 해도 역시 여행길은 힘이 듭니다. 며칠만 지나면 집 생각이 간절해지죠. 처음에는 비행기를 타고 그저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정말 못할게 비행기 여행입니다. 자리나 편하기를 합니까? 짧게는 한두 시간부터 시작해서 길게는 거의 반나절 이상을 비행기 안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여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지 모릅니다. 거기다가 말이 다르죠 음식이 다르죠 모든 풍습이 다르죠. 그러니 신기한 것도 잠깐일 뿐입니다. 마찬가집니다. 우리의 인생살이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남들보다는 조금 더 잘 살고 더 폼도 나게 살고 큰 소리도 치면서 살지는 몰라도 그래 봤지 떠나야 할 곳입니다. 아무리 긴 세월이라 해도 지나놓고 보면 눈 깜짝할 새입니다. 거기다가 알게 모르게 당하는 험한 꼴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고 그 어려웠던 세월들 그 아픔들을 잊어먹기에 살 수 있지 그 모든 아픔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면 어찌 세상을 살 수 있겠습니까? 가끔은 그 아픔들이 되살아난다고 하지만 그래도 기억에 남아 있는 아픔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 겪는 아픔과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어쨌든 고난이라고 하는 것 아픔이라고 하는 것을 얼마나 아름답게 승화 시키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의 의미도 또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 야곱과 그의 아들 요셉의 삶은 크게 구별이 됩니다. 
야곱 그는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날 정도로 아주 투쟁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을 위해서는 속임수를 쓰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었고 또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많은 것을 가지게 된 그 기쁨보다도 그가 살아가면서 당했던 아픔들 그리고 잃어버린 것들에 더 집착을 합니다. 

사실 배고파 어쩔 줄 모르는 형에게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장자권을 받아냈다는 것과 나이 들어 눈이 잘 안 보이는 아버지를 속이면서까지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받는 모습들을 보면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올 정도입니다. 반면 그가 당한 고통도 만만치 않습니다. 결국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였다가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아버지의 명을 가장해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기를 잘 치던 야곱이 외삼촌으로부터는 거듭 거듭 사기를 당하지 않습니까? 

거기다가 사랑하는 아내가 막내를 낳다가 죽습니다. 그나마 가장 사랑하는 아들은 나중에 사실이 밝혀지지만 당시 야곱이 알기로는 짐승에 찢겨 죽지 않습니까? 거기다가 큰 아들과 첩 사이의 불미스러운 일이라든가 가나안 땅에서 잠간 세상 구경을 나갔다가 성폭행을 당하는 일까지 생깁니다. 그래 화가 난 시므온과 레위가 하몰과 그 부족들을 다 살해하는 일까지 벌어져 결국 그들이 머물던 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저런 일들을 생각해 보면 야곱이 험한 나그네 세월을 보냈다는 말이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낸 요셉은 전혀 형들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눈물로 그들을 감싸 안으면서 나를 이곳으로 보낸 이는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고 까지 고백합니다. 그리고 내가 형들과 모든 가족들을 기를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과 함께 살았던 요셉과 하나님을 알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자기 노력으로 무언가를 얻으려고 했던 야곱의 차이가 아주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고 그러한 아픔이 자녀들을 축복하는 야곱의 마지막 축복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게 축복인지 저주의 한풀이인지 모를 정도로 아픔의 고백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 야곱과 같은 삶을 살아왔던 또 한 사람이 바로 본문의 수가 성의 여인입니다. 그녀는 많은 아픔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과 마주치는 것조차 싫습니다. 아니 두렵다는 말이 더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다섯 남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는 여섯 번째 남자 역시 남편이라고도 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정말 남부끄러워서 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왜 유독 나만 이런 고생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하는 마음도 듭니다. 

왜 하필이면 이런 땅에 태어났던가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왜 하필 이 집으로 시집을 왔던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자괴감 속에서 그래도 죽을 수는 없어서 어쩔 수 없어 살고 있기는 하지만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삶입니다. 하루 하루 살아간다는 것이 그렇게 힘들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날마다 기도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할 수 있으면 하루라도 빨리 세상을 떠났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지옥입니다. 

다른 집의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나는 왜 아이도 낳지 못하는가, 내가 저주 받은 인생인가 하는 마음 때문에 더 괴롭습니다. 정말 동네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니라도 자기야 말로 남편 잡아먹는 그런 여인인 것만 같아서 더 괴롭습니다. 정이 그립습니다. 그런데 따뜻한 정을 느끼면서 살고 싶지만 지금 사는 남자조차도 하루하루를 불안해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입니다. 거기에 무슨 정이 있겠고 거기에 무슨 사는 맛이 있겠습니까? 정말 어떤 희망도 없는 절망 속에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하지만 보다 큰 아픔은 이 여인만큼은 아니라 해도 우리네 가슴 속에 응어리진 마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남들은 당신처럼 행복한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느냐고 하는데 실상은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만 싶습니다. 몸이 아픈 사람은 아파서 힘든 것 이상으로 아픈 나 때문에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고생시키는 것 같아 몸보다는 마음이 더 아픕니다.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 있는가 하는 마음 때문에 더 힘들기도 합니다. 나만 힘들게 살아가는 것 같고, 모든 사람이 다 나를 향해서 손가락질하는 것처럼 느껴져 더욱 비참합니다. 정말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 차라리 죽으면 얼마나 편할까 하는 마음도 간절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행복하게 사는데 나만 유독 왜 이런 아픔을 안고 이런 불행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 생각하면 정말 미칠 것 같습니다. 그 어디를 봐도 희망의 끈은 전혀 보이지를 않습니다.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더욱 깊이 빠져들어가는 수렁 속에 빠져 있는 것만 같은 인생입니다. 

사는 게 전혀 재미가 없습니다. 죽지 못해서 사는 인생 그래서 모든 것을 다 포기하기도 하고 그래서 더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포악을 부리기도 하는 인생까지 이게 우리네 살아가는 모습들입니다. 왜 하필이면 그게 너고 왜 하필이면 그게 나인지 모르겠다는 인생의 아픔들이 남들 모르는 깊은 마음속에 진하게 배어 있습니다. 애써 밝은 척 하지만 그래서 더 힘든 인생살이입니다. 

더 큰 아픔은 벗어나고 싶은데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어디를 봐도 답이 없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하는데 그 어디에도 솟아날 구멍이 없습니다. 그래 마음으로는 이렇게 됐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람들이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마음의 바람일 뿐 현실 속에서는 전혀 뜬 구름 잡는 것 같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무엇하나 마음에 드는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정말 솔직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다. 나의 삶은 정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런 삶입니까? 왜 나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다시 한번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해답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서울의 한 동네를 청소하는 미화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직업에 회의를 느꼈습니다. 언젠가는 이 일을 그만두겠다며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낙심한 그는 하루하루가 지겹고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청소부의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마을을 청소하면서 콧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 미화원을 변화시킨 것은 아내의 따뜻한 격려 한마디였습니다.
“여보, 나는 이 마을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당신이 정말 자랑스러워요. 당신의 노고가 없다면 이 마을은 쓰레기로 뒤덮였을 거예요.”
베토벤이 세계적인 음악가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토벤만큼 힘든 삶을 살았던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베토벤 음악의 특징은 도입부에는 슬프고 처량하지만 마지막은 환희를 노래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명곡들은 모두 고통의 산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어머니는 열일곱 살 때 폐결핵으로 세상을 떴습니다. 
베토벤은 나이 서른에 음악가의 생명인 귀에 이상이 생겨 만년에는 청력을 잃었습니다. 그는 논보라 치는 쓸쓸한 밤에 57세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눈을 감겨준 사람도 지나가던 한 나그네였습니다. 
그러나 베토벤은 고백합니다.
“나는 괴로움을 뚫고 항상 기쁨을 발견했다. 그래서 행복했다.”

하루하루를 지옥을 경험하던 여인이 어느 날 우물가에 앉아있는 한 남자를 보았습니다. 유대 사람입니다. 아니 어쩐 일로 유대 사람이 여기까지 온 것일까 하는 궁금도 잠깐 그저 빨리 물을 길어 돌아가기 위해 분주히 손을 놀립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사람이 자기보고 물좀 달라고 합니다. 우물가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당시의 풍습으로 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데 그 사람이 자기를 놀리는 것만 같아 “유대인으로 어찌해서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하고 툭 쏘아붙입니다. 저가 나를 희롱하는가 하는 마음이 들어 더 퉁명스러웠는지도 모릅니다. 한데 그는 전혀 고까워하지도 않고 말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이렇게 시작된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자기를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신 예수님 앞에 저가 드디어 무릎을 꿇습니다. 처음에는 선지자인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이 여자는 더 이상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자기도 모르게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만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이야기를 합니다. 

동네 사람들로서는 깜짝 놀랄 일입니다. 지금까지 자기들이 수군거리기도 했지만 사실 사람들과 만나는 것조차도 꺼려하던 여인이 자기들을 먼저 찾아와 만나는 것도 이상하고 여자가 하는 말은 더욱 알 수 없는 말입니다.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게 됩니다. 메시야가 아니라면 처음 만난 사람의 사정을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여자의 말을 따라 우물가로 찾아와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는 자기들과 함께 머물기를 청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으면서 이들이 궁극적으로 변화가 됩니다. 믿는 자들이 더욱 많아졌습니다. 그래 그들이 고백합니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우리가 믿은 것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앓이라는 이 고백이야 말로 우리 믿음에 대한 바른 정의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어디서 생깁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열고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말씀을 들을 때 궁극적으로 우리 마음이 변화가 됩니다. 말씀의 능력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결국 주님과의 만남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아무런 의미가 없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자로서의 삶으로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수가 마을 사마리아 여자가 바로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 마을 사람들 역시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들의 삶이 변했습니다. 더 이상 이 슬픔 가득했던 여자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여자 역시 스스로 숨지 않았습니다. 어둠으로부터 밝음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로 인해 이 동네 많은 사람들이 믿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모두에게 더 이상 어둠은 없습니다. 밝음만 있게 된 것입니다. 새 생명의 역사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바로 예수님 안에 새 생명이 있습니다. 새 삶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솟아날 수 있는 구멍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그리고 그 예수님과 날마다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십시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이 귀한 주님 안의 믿음,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시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에드워드 킴블은 미국 보스턴에 있는 작은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였습니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혹은 아무 가게에나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가 오랫동안 해온 전도 방법이었습니다. 
1855년 어느 일요일 아침,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눈앞에 보이는 구두 가게로 들어갔습니다. 킴블은 젊은 구두 수선공에게 다가가서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셨기 때문에, 이제 당신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젊은 구두 수선공은 이미 주님을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 자리에서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젊은 구두 수선공이 바로 후에 수많은 영혼을 주님 앞으로 인도한 위대한 설교자이자 복음 전도자인 무디(D. L. Moody)입니다.
한 영혼을 구원함으로 인해 넓혀질 하나님 나라를 생각해 보십시오. 겉으로는 강인해 보이지만 “나 좀 살려주세요” 하며 울부짖는 영혼들을 기억하십시오. 그 영혼들이 바로 당신 주변에 있습니다.

수가 성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한 여자로 인해서 수가 성 전체가 믿음의 마을로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외면할 필요도 숨을 필요도 없는 아름다운 교제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후서 5장18절로 21절은 말씀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말씀을 따라 “주님, 이웃의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을 품고 복음을 전파하게 하소서.” 기도하시는 우리요 우리에게 주신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잘 감당하심으로 아파하는 이웃들 삶의 희망마저도 다 잃어버린 영혼들, 겉으로는 화려해보여도 속으로는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다 새 생명을 얻게 되고 변화된 새 삶을 살게 되는 귀한 역사를 말씀 안에서 이루어가며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는 천국 백성이요 하나님의 나라의 가장 소중한 존재로서의 우리 모두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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