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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에서의 고백 (눅 23:3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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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서의 고백 (눅 23:39-43)
  

십자가 형을 알고 있는가? X자, T자, +자형으로 이루어진 십자가 형틀은 사람의 키보다 두 서너 자 정도 높게 만들어졌고 십자가 형틀에 매어달린 죄수가 꼭 그 자신이 매달린 십자가를 짊어지고 사형장으로 가도록 되어 있다. 사형장에 도착하면 사형수 죄수를 형틀 위에 눕힌다. 팔을 벌려 양손에 못을 박는다. 발은 못을 박지 않고 밧줄로만 묶어둔다. 그러고나서 십자가 사형틀을 일으켜 세우면 몸무게가 잡아당겨짐으로 못 박힌 양손으로 집중되는 무게로 인해 손이 어느 정도 ‘찍’ 소리를 내며 찢어지는데 완전히 찢어지지 못하도록 받침목을 둔다. 그리고 발에도 못을 박아 못이 박힌 상처에서는 피가 쏟아지는데 한꺼번에 쏟아지지 않도록 되는 바람에 사형수들은 죽음과 사투를 벌이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십자가는 고통의 자리다. 죽음이 내리누르는 것을 이겨내기 위해 못 박힌 손과 발로 죽음을 떠받히는 이 안간힘은 신음 소리, 잔인함으로 얽혀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대로 저렇게는 죽으면 안된다는 두려움을 갖게 하는 사형 방법이다.

예수는 바로 이 십자가에 매어달리셨다. 해골이라 부르는 골고다 언덕에서 사형을 당하는데 두 행악자도 같이 못 박혔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모든 사람들이 비웃는다. 백성은 구경하고 관리들은 비웃고 군인들은 희롱한다. 십자가 거기에 모여 있는 모든 자들은 모두 다 “네가 그리스도라면 너의 자신을 구원하라”고 떠든다.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구원자라는 자가 사형수가 되어 죽으면서 도대체 사형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어가는 것이 메시야라는 게 말이 되는가? 

이때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던 행악자 중 하나도 비방하는 일에 가담하였다. “네가 그리스도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세상의 만민들이 다 예수를 희롱하는데 행악자마저도 가담하였다. 바로 이때 또 한 사람의 행악자가 십자가에서 전혀 딴 선언을 하고 나선다. 십자가에서 들려지는 그 꾸짖음의 소리는 강도를 향한 꾸짖음이지만 주님을 비방하고 희롱하는 모든 사람을 향한 “아니오”의 선언이다. “안돼! 주님을 비방하지 말라. 안돼! 주님을 희롱하지 말라. 비웃지 말라.” 그 처절한 십자가의 자리에서 이 강도는 아무도 하지 못하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1.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고백이다. (눅23:40)

눅23: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여기 꾸짖음을 받는 강도와 꾸짖는 강도의 이름이 외경에 나와 있다. 「빌라도 행전」에 보면 꾸짖는 회개한 강도는 디스마이다. 그리고 다른 행악자의 이름은 게스다이다. 여기 회개한 강도 디스마는 강도단 두목의 아들이었다. 

애굽으로 피난을 가는 요셉과 마리아를 공격했는데 이때 아기 예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때 이 디스마는 마음이 갑자기 변해서 아기와 예수의 부모님을 그냥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평생을 못되게 살고 남의 것을 빼앗고 강탈하는 강도로 살아 사형장에까지 오게 된 것인데 바로 예수를 다시 만난 것이다. 아기 예수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예수를 만난 것이다. 

행악자였던 디스마가 구원 받고 낙원에 간 이유가 여기 있다. 예수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꾸짖는 디스마의 말 속에는 최소한 하나님 의식이 들어 있다. 즉 정죄 받은 죄인으로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고백이다. 비방하는 강도 게스다는 정죄를 받고서도 죄를 모른다. 정죄를 받고서도 경솔하다. 그는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다.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둘째 사망, 심판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주님을 비방한다. 이런 게스다를 꾸짖는 디스마는 죄를 안다. 자신의 못된 악행을 달게 받는다.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의 심판을 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신심이 고백되고 있다. 

비방자를 꾸짖는 디스마의 고백 속에는 만민이 다 주님을 비방하고 주님을 조롱해도 자신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오직 예수님 편에 서야 한다. 죄인된 자로서 만민이 예수를 다 반대해도 자신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2. 주님을 의로우신 분으로 믿는 고백이다. (눅23:41)

눅23: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회개한 디스마는 자기의 마지막 처형의 자리, 십자가 형을 원망하지 않는다. 마땅히 죽어야 할 보응이라고 받아들인다. 죗값을 아는 디스마이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 주님이 십자가에 매어달린 죽음은 주님이 죄를 지어서 못 박히는 처형을 받는 것이 아니기에 “아니오”라고 외치는 것이다. 주님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어떤 분인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즉 잘못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주님은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시다. 주님이 의로우신 분, 무죄하신 분으로 십자가에 매달린 이유는 무엇인가? 주의 십자가는 의인이 죄인이 되어 죽는 죽음이다. 마땅히 상 받을 이가 벌 받고 있는 죽음이다. 만민들에게 비웃음을 당하고 비방을 받는 예수는 왜 이렇게 처형되어야 하는가? 이 십자가 위에서 예수를 죽어가게 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다. 이는 로마의 잘못이다. 제사장들의 잘못이다. 백성, 군중들의 잘못이다. 주님의 의인되심을 믿는 이 믿음의 고백은 세상을 향한 도전이다. 권력을 향한 도전이다. 제자들도 한 마디 못하고 있는 판국에 여인네들도 한 마디 못하고 있는 판국에 강도가 예수의 무죄, 의로우신 예수를 부르짖고 있으니 무슨 용기일까? 무슨 힘일까? 십자가가 부끄럽고 어리석은 것이지만 십자가를 지신 의로운 예수에게서 그 분의 나라를 보았다. 

디스마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다. 그러므로 의로우신 분이 죽어서도 안되지만 그 죽음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는 대속이다. 죄인을 살리려는 자기 희생이다. 의로우신 분의 나라,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위해 준비하는 의의 나라, 거룩한 나라가 예비된 죽음이다. 강도 디스마는 도전한다. 고백을 통해 예수는 의로우시고 예수는 무죄하시다. 나는 그 예수를 믿는다. 그의 안의 나라를 믿는다. 주님의 십자가는 죄인을 위한 의인의 대속임을 믿는다. 주님의 죽음은 죄인된 나의 죽음과 다르다. 주님의 십자가는 행악자인 나의 십자가와 다르다. 주님의 나라는 죄인이 들어가는 음부의 나라와 다르다. 회개한 자가 들어갈 수 있는 낙원, 파라다이스다.

3. 주님에게 영혼을 위탁하는 믿음의 고백이 있다. (눅23:42)

눅23:42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강도 디스마는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예수님의 나라를 바라보았다. 백성들, 관리들, 군인들, 행악자 강도 등 다 예수님을 모르고 예수님 나라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디스마는 예수님이 천국의 열쇠를 쥐고 계신 이로 알아보았다. 피 흘려 죽으시는 예수, 사람의 눈으로 의지할 것 전혀 없는 연약한 순 같은 예수, 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원자임을 알기에 그 예수님께 강도 디스마는 삶을 위탁한다. “주님의 나라에서 나를 기억해 주소서.” 구원을 받고 싶은 위탁의 믿음이다. 

평생을 못 되게 살았기에 음부로 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약속해주신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너무도 놀라운 구원이다. 행악자가 회개하고 삶을 위탁하는 믿음을 보일 때 예수님은 낙원을 약속하셨다. 우리는 당황스럽다. 평생을 악하게 살아도 끝 순간만 잘하면 천국에 가는 것인가? 기독교는 너무 값싼 종교가 아닌가? 심는대로 거둔다더니 악을 심고 이렇게 거룩한 나를 받을 수 있는가? 강도가 낙원에 간다는 것, 너무나도 이런 것이 싫다고 생각이 들지 않는가? 정말 그럴 수 있다. 기분이 불쾌할 수도 있다. 은혜를 모르는 율법주의자들은 이 말씀에 걸려 넘어질 수 있다. 

그러나 주님에게 영혼을 위탁하는 강도의 고백은 하나님 나라를 믿는 믿음의 고백이다. 아니 십자가에서 보여 준 디스마의 고백은 위대하다. 십자가, 그 처절한 고통의 순간에서 죄인됨의 고백,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고백이 있다. 온 세상이 다 등을 돌려도 주님을 의로우신 이로 믿는 고백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그 나라에 영혼을 위탁하는 믿음의 고백이 있다. 어찌 이 디스마에게 낙원이 주어지지 않겠는가? 어찌 회개한 강도에게 낙원을 빼앗으라고 말할 수 있을까? 주님의 나라는 은혜의 나라다. 믿음으로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보장해주시는 아름다운 나라다. 의인인줄 알고 자기의 말만 의지하다가 이 거저 주는 나라에 못들어가면 안된다. 

십자가 거기 매달린 예수를 보라. 그리고 비방자를 꾸짖는 디스마를 보라. 디스미의 고백이 내 고백이 되게 하자. 골고다 십자가에서 가장 용감한 고백이 있다. 가장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붙잡은 고백이 있다. 고통의 십자가 그 현장에서 온 세상을 거슬리는 고백이 있다. 운명의 자리에서 아름다운 고백, 가슴을 치는 고백이 있다. 멸망의 자리에서 구원을 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고백이 있다.

당신이 거하는 곳에서 이 고백이 나올 수 있는가?

고통과 저주, 왕따와 외면, 가장 비참한 순간에 고백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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