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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를 얻는 삶 (빌 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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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얻는 삶 (빌 3:5-9) 

저희 가정에 하나님께서 막내를 주셨는데 아직 개월 수로는 30개월 정도 지났지만 어느덧 우리 나이로는 네 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을 키우면서 아이가 말문이 열리고 세상에 대한 자각을 해 가는 과정을 보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갖곤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아이가 조금씩 돈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자나 사탕을 사게 되면 슈퍼에서 돈을 내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예전에는 돈을 누군가 주면 버리곤 하였는데 이제는 받아서 자기가 가지고 있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직은 돈의 크기를 잘 모르기 때문에 지폐보다는 동전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저희 아이보다 조금 더 크면 경험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서서히 돈의 가치에 대해서도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조금 더 큰 아이들은 100원짜리 동전이라도 손에 넣기라도 한다면 움켜쥐고 놓을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아이가 동전을 움켜쥐고 있는 손을 어떻게 하면 풀 수 있는지 아십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500원짜리 동전을 주고 바꾸자고 하면 움켜쥐고 있던 손이 스르르 풀립니다.
그리고 지폐를 주면 더 쉽게 풀어질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비록 어린아이지만 100원보다는 500원이 그리고 그보다는 지폐가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누구라도 높은 가치를 위해 낮은 가치를 포기할 줄 압니다. 

그런데 이 가치에는 객관적인 가치가 있고 주관적인 가치가 있습니다. 
‘객관적인 가치’ 란 마트의 물건에 붙여진 가격표처럼 누구나에게 똑같이 적용이 되는 가치입니다.

그런가 하면 ‘주관적인 가치’ 는 개인의 특성에 따라 다르게 적용이 됩니다.
같은 상황이지만 사람에 따라서 다른 가치를 갖습니다.

예를 들어 만원밖에 없는데 사고 싶은 옷이 만원입니다. 그런데 식사 때가 되어서 배가 무척 고픕니다. 그러면 그 돈으로 밥부터 사먹겠느냐? 아니면 배가 고프더라도 옷을 사겠느냐?

이것을 결정하는 일에는 그 기준이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을 밥을 어떤 사람을 옷을 삽니다. 이것을 ‘가치관’ 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내가 나의 삶의 주인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가치는 모든 것을 주님의 가치에 맞춰서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이러한 원리입니다. 
그것은 세상 어떤 가치보다, 심지어 나 자신보다 예수님이 훨씬 높고 소중함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을 왕으로 나의 주인으로 섬긴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나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이제는 내 생각과 내 뜻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결단과 각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삶이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사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살기 위해서는 나를 부인하고 비우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서 나를 완전히 낮추고 내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며 내 생각을 버려야만 주님의 뜻에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주님의 뜻보다는 내 뜻이 더 우선합니다.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내 자신이 삶의 주인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욕심대로 행하고, 자신의 성질대로 이기적이고, 교만한 마음을 따라서 모든 일을 처리합니다. 
때로는 이익을 위해서 남을 속이기도 하고, 필요하다면 불의와 얼마든지 타협도 불사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님 앞에서 부끄러운 줄을 모릅니다. 

겉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허울뿐이며 실제로 자신의 가치를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왜일까요? 결국 주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자신을 철저하게 부인하지 않고서는 주님의 말씀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눅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라는 말씀으로 제자됨의 기본 조건으로 자기를 부인할 것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바른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철저하게 자신을 부인하며 주님의 종으로 오직 주님을 위하여 살기를 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바울을 놀랍게 사용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그런 사도 바울의 신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원하기는 이 시간 바울의 고백 가운데 우리 그리스도인이 어떤 존재인지를 다시한번 깨닫고 사도 바울과 같은 고백이 저와 여러분 가운데도 있게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 전 유대교의 촉망되는 젊은 엘리트였습니다. 
날 때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질 정도로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를 했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외국으로 피신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할 정도로 열심도 있었으며 그로인해 유대교에서는 장래가 촉망되는 유능한 젊은이로 인정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7절에서 바울은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여러분 무슨 뜻입니까? 주님을 위하여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자기 열심과 특권들과 보장된 미래를 다 해로운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이러한 것들이 주님을 섬기고 따르는데 방해가 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을 가지고서는 주님의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바울의 주변 사람들은 이전 바울이 가졌던 학식과 좋은 배경, 그리고 보장되어 있는 출세를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스팩을 다 가진 사람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 모든 것들을 한 순간에 포기했습니다.

어떻게요? 8절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할렐루야!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던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나니 세상에서 얻고자 했던 것들은 다 썩어질 것들이며 그것들을 가지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자리에 이를 수 없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WEC 선교회의 창시자인 ‘스투드’ 라는 사람의 경우도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원래 영국의 촉망받는 차세대 정치 지도자였으며 유명한 귀족집안의 출신으로 머리도 뛰어나 캐임브리지 대학에서도 인정받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무디가 인도했던 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아프리카의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모든 세상적인 기득권을 포기하고 자신의 삶을 주님께 드리기로 헌신했던 것입니다. 
그는 부모에게서 엄청나게 많은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그것을 자기를 위해서 한 푼도 남기지 않고 유산의 반은 선교회를 세우는데 쓰고 반은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구제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모든 것을 가졌지만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세상에서 얻고자 하는 돈과 명예와 같은 것이 얼마나 무익한 것이며 영원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아프리카의 영혼들을 구원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주님을 모시고자 한다면 자연스럽게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위하여 미련 없이 포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직도 세상의 물질이나 명예를 얻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이 있고 내 모든 힘과 정성을 거기에만 쏟고 있으면서 과연 주님을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따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 생각일 뿐 어쩌면 주님은 우리를 따르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여기실 것입니다. 한번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나는 세상의 것들에 대하여 자유하며 그런 것들이 없어도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까?

여러분 주님을 위해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얻고자 한다면 내 모든 것을 기꺼이 내려 놓고서라도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시각장애를 가진 윤인수 목사님의 간증에 이분의 어머님이 큰 믿음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윤목사님이 어릴 때에 어머님이 중병으로 인해 어린 자신은 어머니를 간병하기 위해서 신문을 팔기도 하고 구두닦이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앞을 못 보는 자신에게 그런 일들은 무척이나 정상인보다 몇배 힘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약을 사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하루는 그렇게 해서 번 돈을 가지고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 앞에 내놓았는데 그 돈을 보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앞 못 보는 아들이 남의 구두를 닦고, 신문을 팔아서 번 돈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인수야, 하나님께 먼저 십일조를 드리도록 하자.” 

어머니의 그 말을 들은 인수는 벌컥 화를 내면서 소리를 쳤습니다. 

“십일조는 무슨 십일조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준 게 뭐가 있단 말입니까? 나를 눈멀게 했고, 어머니는 병들게 했고, 공산당에게 쫓겨 피난민 신세가 되게 했고, 재산도 다 빼앗기게 한 그런 하나님께 무슨 십일조를 내라 하십니까?” 

그러자 어머니는 어린 자신의 손을 꼭 잡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인수야, 고향을 잃어버린 것도 한스럽고, 집을 잃어버린 것도 원통하고, 건강을 잃어버린 것도 서러운데, 하나님까지 잃어버리고 믿음까지 잃어버리면 뭐가 남겠니?” 

눈 먼 아들이 벌어온 돈에서 십일조를 낸 어머니의 모습은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게 합니다.

여러분 사실 하나님께 원망을 해도 시원치 않은 상황이 아닙니까?
더구나 그 돈이 어떤 돈입니까?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정말 피눈물이 나는 돈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 어머니의 주님을 향한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무엇보다도 주님을 가장 귀하게 생각하며 그래서 모든 것을 잃어도 주님을 잃을 수는 없다는 말로 불평하는 아들을 달랬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많은 것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정작 하나님께 드리는 일에서는 믿음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지는 않습니까? 
온전한 물질로도 주님을 따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바울은 잃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그가 세상적인 것은 잃었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한 것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8절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할렐루야!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최고의 지식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지식과 비교할 만한 어떤 진리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은 그냥 무식한 사람이 자기 합리화를 위해 한 말이 아니라 그 당시 최고의 학문을 섭렵하고 장래가 촉망되었던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지식을 따라서, 이 지식을 위해서 살겠다는 말입니다.
그가 이전에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변을 보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아는 지식을 최고의 지식으로 생각하거나 고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은 형식이고 자녀들이 성경을 읽는 것보다 세상의 공부나 지식을 쌓는 것을 더 원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마음속에 여전히 세상에 대한 헛된 기대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정욕과 교만한 마음을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바로 알고 따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더욱 겸손히 주님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세상의 무엇과도 결코 바꾸지 아니할 것을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풍성한 비밀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만나고 나서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다 잃어버렸습니다. 
심지어는 가는 곳마다 핍박당하고, 심하게 고생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에서 의지하던 것을 잃어버리게 되면 스스로 위축됩니다.
때로는 열등감으로 나타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바울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너무나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주님에 대한 큰 믿음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할 것 없이 때로는 이들 모두를 얻기 위해 고전9:19-22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의 인생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바울이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을 만났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강한 빛으로 임하신 주님을 보고 난 이후에 그의 인생관이 달라졌습니다.
모든 세상적인 것들의 무가치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이 가장 귀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더 이상 자신의 배경을 가지고 우월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는 스스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놀랍게 사랑하신다는 것과 자신을 이방의 사도로 부르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러한 눈을 갖게 된 이후로 바울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세상 물질이나 명예를 추구하지 않게 되었으며 그런 것들로 사람을 평가하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런 것들로 인해서 열등감을 느끼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런 바울을 통해서 그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대단한 각오와 결단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믿고 따르고자 하는 순간,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해야만 했습니다. 
사회적인 지위와 재산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내놓을 각오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주님이셨습니다. 
그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온전한 주님이셨습니다. 
그들에게 주님을 섬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주님과 맞바꿀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만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땅에서 저 영원한 본향을 향하여 가는 순례자처럼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그 의미는 너무나 변질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교회에 나와서 세상과 나에 대한 부정 없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세례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주님을 믿기 전이나, 믿은 후에나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세상적인 욕심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을 간절히 사랑하지도 따르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세상사람들과 똑같은 잣대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러한 삶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에 등록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우월한 지위에 열등감을 느끼지도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가장 귀하게 생각하며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뜨거운 사랑이 가슴속에 충만하기 때문이며 주님의 넘치는 위로와 영생의 즐거움을 맛보며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의 이름은 과연 저와 여러분들에게 무엇입니까? 기꺼이 주님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주님만 내안에 계시면 됩니다. 주님만 최고로 높이면 됩니다. 주님만 자랑하면 됩니다.
원하기는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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