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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 (민 13: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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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 (민 13:25-33)

어떤 목사님이 자신이 주례를 서서 새 가정을 이루고 신혼여행을 떠난 부부에게 축전을 보냈습니다. 그 내용은 “요일 4장 18절을 그대들에게” 라고 적어 보냈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쫒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는 말씀이었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동안 서로를 의지하며 사랑으로 잘 살라는 의미에서 성경구절을 주고 싶었습니다. 

신혼여행지에 도착한 신혼부부는 먼저 도착해 있는 축전에 신기해하면서 얼른 펼쳐들었습니다. “요4:18을 그대들에게... 주례목사로부터...” 둘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궁금해 하면서 호텔에 비치된 성경책을 들고 요4:18을 펼쳐 읽고는 기절할 뻔 했습니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신부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고, 신랑은 까무러치고 말았습니다. 축전을 전송하는 우체국 직원이 실수로 성경 약자 <요일>의 <일>자를 빠뜨리고 그냥 <요> 라고만 적은 것이었습니다.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18이 요한복음 4:18절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때때로 원하는 것이 잘못 전달되어 곤욕을 치루거나 오해를 불러일으킬 때가 있습니다. 내 의중은 그것이 아니었는데 상대방에게 잘못 전달되어서 그 뜻이 왜곡 될 때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아마 하나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이것인데 저렇게 오해하거나, 전혀 그 말씀과 다른 행동을 하고 있는 우리들을 보면 답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단 하나입니다. 세상이 복잡하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도 복잡한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아무리 다양화 되어서 가지각색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설령 우리 생각에 하나님께서 때에 따라 요모조모를 따져서 원하시는 것 같아도 결국은 하나입니다. 그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합니다. 이 믿음이 다양한 것을 일치시키는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거치고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이 출애굽의 역사는 어마어마한 역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거대한 출애굽의 역사 속에서 한편으로 나약한 인간의 모습도 보게 됩니다. 

자, 애굽에서 광야를 거쳐 가는 그 60만 이스라엘대군 속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순종하며 따르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막막한 광야를 밤낮으로 가야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출애굽 후 광야의 모든 과정을 잘 살펴보면 상황에 관계하지 말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만 믿는 믿음을 주시려고, 그 믿음을 확실하게 하려고 계속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믿음을 얻는 게 그렇게 힘들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정말 소중한 것인데 믿음이 생기지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은 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반대로 받을 만한 사람이 선물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을 선물로 받으려면 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줘봤자 섬기고 순종하는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잘난 척하고, 역이용해서 부정적인 집단이나 만들고 제 마음대로 쓸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믿음을 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믿음을 선물로 주어도 깨닫지 못하여 믿음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특별한 기적으로 구출됩니다. 하나님이 애굽에다가 열 가지 재앙을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것을 보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고,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엄청난 역사를 매일 경험했습니다만 그러고도 올바른 믿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또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한 3년 동안 얼마나 많은 기적을 보았습니까? 성경에 대표적인 사건만 기록되어서 그렇지 3년 동안에 얼마나 많은 기적을 보고, 얼마나 많은 말씀을 들었습니까? 병자가 낫고, 바다가 고요해 지고, 죽은 자가 사는 기적까지 다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시원치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깨닫는 또 하나의 진리는 믿음이란 기적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간혹 보면 집회에 가서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갑자기 믿음이 좋아진 것처럼 날뛰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이란 갑자기 받은 것으로 다가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이런 사람들을 보면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또 믿음이 식는 사람들입니다. 하루아침에 믿음이 생기고 갑자기 믿음이 좋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그래서 위험한 것입니다. 

선물이란 받으면 오래도록 간직하면서 선물을 준 사람을 생각하며 고맙게 여기고 선물을 준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출세했다고 어려울 때 선물 준 사람을 잊어버리거나 내가 돈 좀 벌었다고 무시하거나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믿음을 얻었다면 그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이 늘 변함없어야 하고 언제나 충만한 믿음을 유지해야하는 것입니다. 오래 믿었다고 교만 할 수 없는 것이요, 직분을 얻었다고 믿음이 변하지 말아야하는 것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이스라엘도 믿음이 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위대한 역사를 나타냈습니다. 홍해가 갈라져 절벽처럼 되었을 때 그 가운데로 건너가는 이스라엘사람들의 믿음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때는 정말 대단한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을 때는 이렇게 위대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을 지켜 가기가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홍해를 건넜을 때 그들은 너무 기뻐서 찬송하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습니다. 잔치를 벌입니다. 벅찬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믿음이 오래 가지 못하고 맙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꼭 14일 만에 원망하고 맙니다. 그 믿음으로 충만해서 계속 줄기차게 밀어 붙였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휘청거리는 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곧 이것이 모든 인간의 모습이기도합니다. 믿음이 좋은 듯 하다 가도 오래 가지 못해서 시들해집니다. 기쁨과 즐거움으로 충만하다가도 어느 한 순간에 믿음 없는 사람처럼 원망하기도 하고, 자포자기하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바란 광야 가데스바네아에 왔을 때의 일입니다. 이제 요단강만 건너가면 그렇게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입니다. 얼른 들어가서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에서 여정을 풀고 그 동안 힘들었던 모든 짐을 훌훌 털어버리고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좋겠는데 그런데 그 문턱, 그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십니다. 그러고 난 후 하시는 말씀이 더욱 그들을 실망에 빠지게 합니다. “자격미달이다. 너희는 이 믿음 가지고는 가나안에 갈 수 없다.” 고 말씀하시면서 저들의 행로를 돌려서 다시 광야로 보냅니다. 광야로 들여보내서 40년 동안을 다시 훈련을 해서 믿음을 키워 가지고 그리고 가나안에 가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그 믿음을 시험하는 장면이고 이어지는 민14장을 읽어 보면 광야로 돌려보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러분, 믿음을 키워야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잘 지켜야합니다. 또 믿음이 있다고 해도 믿음의 수준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는 믿음을 잘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에 합당한 것인지, 그렇지 못한 것인지를 스스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오늘 이스라엘에게 준 가나안 땅은 이미 오래 전에 약속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가서 취하기만 하면 되는 땅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땅을 정탐하러 보낸 것도 하나님이 주신 땅이기에 두루 살펴보고 오라는 의도입니다. 오늘 본문 앞에 있는 20절을 보면 “그 땅의 실과를 가져오라.” 는 말을 모세가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그 땅은 이미 우리의 땅이니 걱정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들어갔다 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정탐꾼들의 목적은 애초부터 “올라갈 수 있을까 없을까? 이길 수 있을까 없을까?” 를 전략적으로 보았다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모세는 믿음의 눈으로 보았고, 정탐꾼들의 시야에는 믿음이 배제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국 광야로 되돌아 간 원인은 믿음 없는 여기서부터 시작 된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믿음 없는 정탐꾼들이 악평을 합니다.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큰 족속들이 있는데 우리는 그 앞에 서니까 메뚜기 같더라.” 정말 믿음이 하나도 없는 부정적인 말들뿐입니다. 그 믿음이 없으니 결국 원망을 합니다.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그 원인을 모세에게로 돌립니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원인귀속> 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어떤 사건이 있을 때 이 원인을 어디다가 돌리느냐 하는 것이지요. 14장으로 넘어가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죽이겠다고 하도니 마침내는 하나님까지 원망합니다. 

똑같은 사건인데 믿음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갈렙을 봅니다. 믿음으로 보았더니 과연 하나님의 약속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요, 감사한 마음으로 가지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 있는 사람에게는 복잡한 세상보다도, 어려운 환경보다도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서 보시고자 했던 것은 한 가지였습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과거에 대한 믿음, 현재의 믿음, 그리고 미래를 향한 믿음까지 다 보고자 하심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생명의 문제입니다. 민14:36부터를 보게 되면 믿음이 없어서 그 땅을 악평한 사람들은 죽었고 믿음이 있어서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생명이 길이 사는 복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원하셨던 것은 믿음이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잘 지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믿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변하지 않게 잘 지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에게는 믿음이 있습니까? 있다면 어떤 믿음입니까? 오늘도 하나님은 믿음을 원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나에게 유익이 될까 불이익이 올까를 전략적으로 정탐이나 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우리에게 믿음 주신 것에 감사하며 겸손하게 한결같은 믿음을 유지해 나가는 그런 믿음이 있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믿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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