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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선한 목자 예수님 (요 1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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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목자  예수님 (요 10:11-15)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신약성경은 네 권의 복음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과 사역을 다양한 관점에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복음서 가운데 누가복음이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 사람이면서 동시에 참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일곱 번에 걸쳐 신적인 권위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등의 표현은 모두 헬라어 원문에 ‘에고 에이미’(= I AM) 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원래 광야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 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단어에서 온 것입니다.

본문의 “나는 선한 목자라” 또한 ‘에고 에이미’ 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선한’ 을 뜻하는 ‘칼로스’ 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난 후에 자신이 만드신 세상을 보고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10)고 하신 경우에 사용된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하여 ‘나는 선한 목자라’ 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목자와 양의 관계로 표현되는 것은 이미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관계를 나타낼 때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이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여호와 로이, 시 23:1) 라고 고백합니다. 

구약에는 모세와 다윗 같은 지도자들을 목자로 묘사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메시야를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시 78:70-72; 사 63:11; 겔 37:24). 예수님은 자신을 목자라고 하심으로 목자에 대한 구약적 의미를 자신에게 적용시켜 신적인 메시야상을 부각시키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의 선한 목자 되심을 더욱 깊이 상고하고 우리의 믿음을 키우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선한 목자는 어떤 분입니까?


1.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의 모든 것을 안다 

14-15절=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예수님은 11절에 이어 14절에서 다시 한번 자신의 선한 목자 되심을 명시적으로 선언하십니다. 본문에서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 는 부분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그리고 내가 내 것들을 알며 내 것들 또한 나를 안다’ 입니다. 참 목자와 양들이 가지는 관계의 긴밀성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특히 ‘알고’, ‘아는 것이’ 로 번역된 ‘기노스코‘ 는 히브리어 동사 ’야다‘를 번역한 헬라어로, 지식적으로 인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상호관계를 통해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출 33:17; 신 34:10). 

성도 여러분!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자기 양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주님의 아심은 독점적인 앎, 구체적인 앎, 시종(始終)을 아는 앎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마치 성부가 성자를 알고 성자가 성부를 아는 것같이, 남편이 아내를 알고 아내가 남편을 다 아는 것 같은 앎을 가리킵니다(3절). 

예수님은 자기 양들을 모두 아십니다. 양의 이름을 아시고, 음성도 아시고 양의 형편을 모두 아십니다. 

주님은 양들이 이리나 도적이나 삯군 앞에 허약한 존재라는 것도 아십니다(12절). 목자를 치면 양떼들이 흩어진다는 것도 아십니다. 주님은 ‘내 양’, 곧 자기 양을 아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양도 목자를 알아본다고 했습니다. 양이라면 목자의 음성을 따른다고 했습니다. 양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알고 있습니다(4, 27절). 양이라면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 분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유명한 부흥사 무디의 설교집에 나오는 예화입니다. 양을 치는 목자는 모든 양들을 각각의 이름으로 불러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한 방문객이 이것이 사실인지 목자에게 직접 가서 물었습니다.  

양치기는 한 양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다른 양들은 풀을 뜯으며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있는데 한 마리 양이 고개를 들고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목자는 자기 주위로 12마리를 불러냈습니다. 이를 본 방문자가 말했습니다. “어떻게 당신은 양들을 분간할 수 있지요? 양들 모두가 다 똑같아 보이는 데요.” 목자는 자기 양들 중에서 흠 없는 양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각각의 결점으로 자기의 모든 양을 구분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목자는 방문객에게 어떤 낯선 사람도 양을 속일 순 없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호기심 많은 그 방문객은 그 목자의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들고서 양떼에게 갔습니다. 그는 가장해서 목자의 목소리와 아주 비슷하게 말해 보았으나 양떼 중 어느 한 마리도 그를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목자는 귀띔했습니다. “만약 양의 건강이 좋지 않게 되면, 간혹 따라갈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도 믿음에서 병들고 약해지면, 그들을 찾아오는 아무 선생이나 따라갈 수 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이 어려운 일들을 겪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부드러운 목자가 아니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 예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으신다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아시는 사람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며 이 사람들만이 예수님을 안다고 말할 자격이 있습니다. 아무리 신학에 조예가 깊다고 해도 예수께서 모른다고 하시는 사람은 실제로는 예수께 속한 양이라 할 수 없습니다(마 7:22, 23).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과 성도와의 관계는 일방통행일 수가 없습니다. 일방적인 관계는 짝사랑이고 결실을 기대하기가 불가능합니다.  

마틴 루터는 본문을 번역할 때 선한 목자이신 예수께서 양들을 아시는 것에 대해서는 ‘승인하다’, 그리고 양들이 주님을 아는 것에 대하여는 ‘신앙을 고백하다’ 는 의미를 취하여 ‘알려지다’로 번역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아시는 것은 승인의 의미를 지니는 데 비해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것은 고백적인 의미를 담고 있음을 반영하는 번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양은 목자에게 사랑만 받는 가축이 아닙니다. 양은 목자에게 여러 가지 유익한 것을 제공합니다. 젖도 주고 털도 바치고 고기도 내어줍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진실한 양인 성도들은 자기를 위해 희생하시고 각양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과 그 나라를 위해 자기 것을 희생하는 것도 기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지각을 주셔서 주님 자신을 알게 하십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요 영생이심을 깨달아 알게 됩니다(요일 5:20). 그러기에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주님의 양 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알아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예수님만을 믿고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빌 3:8).


2.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11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5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님의 이 비유는 제자들에게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특별히 적절한 예화가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을 치는 일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중요한 직업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양을 보호하는 일에 관심을 쏟을 뿐 아니라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양들을 돌봅니다. 목자의 희생적인 태도는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라는 말 속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목숨을 버린다” 는 표현은 요한복음에서 자주 언급되는 표현으로서, 예수께서 자발적으로 희생적인 죽음을 택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17, 18절).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팔레스타인의 유목민들에게 있어 목자와 양의 관계는 실로 생명적 결탁의 관계였습니다.  

목자들은 양들을 위하여 우리(Sheepfold)를 준비했습니다. 이동시에는 목자와 양이 함께 들판에서 야숙을 하는 임시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어떤 경우는 돌로 벽을 쌓아 양들을 보호하는 요새를 만들고, 비바람을 피하기 위하여 지붕을 덮었습니다. 

아침이면 목자는 문 곁에 서서 양의 수를 헤아려 점검하고, 저녁이 되어 우리로 돌아와서는 다시 문 곁에 서서 양의 수를 한 마리 한 마리 확인합니다. 수가 모자랄 때 목자는 길 잃은 양을 찾아다니는 일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이럴 때 목자는 단순히 직업의식만으로 양들을 돌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양들을 사랑해버립니다. 그래서 희생적인 사랑으로 그들을 돌보게 됩니다. 양들이 위험에 빠졌을 때 목자는 자신의 위험이나 고통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그의 의식에는 오직 아픈 양, 병든 양, 잃어버린 양만이 있을 뿐입니다. 

목자는 자신의 일하는 시간, 땀 흘린 노동의 대가를 계산하지 않습니다. 목자의 관심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양의 우리에 있고, 그의 전 삶의 재능과 힘이 양의 목장에 있습니다. 그는 양의 문이기 때문에(7, 9절) 그 자신이 양 우리의 문에 가로누워 있게 됩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이런 목자적 삶을 가리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라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유대교 전승을 기록한 미쉬나(Mishna)에 따르면 임금을 받고 양을 치는 목자, 곧 삯군 목자의 책임 한계는 이리 한 마리의 공격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즉 한 마리의 이리가 양들을 공격하는 경우 삯군목자는 그 공격으로부터 양들을 보호해야 하지만, 두 마리 이상의 이리들이 양들을 공격하면 자신의 안전을 위해 양들을 보호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책임 추궁을 받지 않았습니다. 

평소 안전한 때는 삯군과 선한 목자는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리떼의 공격과 같은 위험이 닥치게 되면 그 둘은 분명하게 구분됩니다.  

삯군은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자 양들을 이리떼의 공격 가운데 두고 홀로 도망합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양들의 안전을 위해 이리떼와 끝까지 싸우고 때로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실제로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참됨 목자와는 거리가 너무 멀었습니다. 그들은 도적질을 일삼았고(롬 2:21,22) 탐심에 이끌리고 있었습니다(마 21:12,13). 그들은 백성을 가르칠 때에도 성전보다 성전의 금에, 그리고 제단보다 그 위의 예물에 더 큰 비중을 두었습니다(마 23:16-19). 

참됨 목자들은 자신의 보호 아래 있는 양들이 실제로는 자신의 소유가 아닐지라도 제 양처럼 여기고 보호합니다. 

그러나 삯군의 경우는 다릅니다. 그는 단지 품삯을 위해서만 일하는 사람이어서 양무리를 돌보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이 사람들은 주인 의식이 없으므로 양들에게 헌신적이기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입니다.

사십이 넘은 아들이 교회 가기 싫어 미치겠다며 칠십이 넘은 어머니와 주일 아침부터 실갱이를 합니다. “정말 교회 다니기 싫다니까요.” 

어머니가 도대체 왜 그러느냐며 통사정을 하듯이 묻자, 마지못한 아들이 교회 가기 싫은 이 유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 장로님이 예배기도를 너무 길게 하는 거, 정말 지겨워서 참을 수가 없어요. 둘째, 찬양대원들 연습도 제대로 안해서 삐걱거리면서 감동스런 표정으로 앉아 있는 걸 보는 일 고역입니다. 셋째, 나도 일요일엔 가끔 산에도 가고 싶고 늦잠도 자고 싶다구요!”  

아들의 말에 어머니가 딱하다는 듯이 잠시 생각하더니, “나도 네가 교회를 꼭 가야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말해주겠다”며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선택이 아니고 필수다. 둘째, 교회는 사람 보고 가는 것이 아니다. 셋째, 너는 그 교회 담임목사야.”

주의 양무리를 치도록 위임받은 모든 이들은 비록 ‘그 선한 목자’ 일수는 없지만,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본받아 주인 의식을 가지고 마치 예수께서 그러하시듯이 주님의 양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은 그들을 위해 기도로 도와야 할 것입니다. 


3. 선한목자는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 

11절= “나는 선한 목자라··· ”

예수님은 스스로 ‘나는 선한 목자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 ‘선’ 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바로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림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창세 이래로 인생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은 자가 누구입니까? 부처입니까, 공자입니까? 소크라테스 입니까, 모하메드입니까?  

아니면 저 헬라와 로마의 철학자입니까? 그도 아니면 세기적인 역사의 영웅입니까?

누가 감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행동한 사람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오직 예수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나만이 선한 목자이다” 라고 단호하게 선언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나만이 양의 문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선언하셨습니다.  

주님의 유일성을 확신한 베드로도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선한 목자는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참 선한 분’ 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통하여 행동으로 폭발되었을 때 비로소 선한 것이 무엇인지, 매력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셔서 향기로운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2). 

예수님은 자원하여 십자가형을 받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고 우리를 위해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나음을 입었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성도 여러분!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선한 목자는 오직 예수! 예수님 밖에 안 계십니다. 지금 전 세계를 풍미하고 있는 종교다원주의는 오직 예수 신앙을 가진 우리에게는 전혀 관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선언해야 합니다. “천하 인간에 선한 목자는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종교는 참으로 많고 또 많습니다. 세상에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신앙의 체계들이 수십 수백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는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을 이루려는 인본주의 종교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예수님의 자기희생, 십자가 대속의 죽음이며, 무덤을 깨고 일어난 예수님의 생명의 부활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그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우리를 사랑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양 된 우리도 사랑만 받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을 위해 무언가를 드리는 양이 되어야 합니다. 은혜만 요구하는 성도는 아직 어린 성도입니다. 

주님을 알고 그 은혜의 가치를 잘 아는 성도는 자신의 재능과 물질과 시간을 주님께 바치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또 주님의 고난에도 동참하는 것을 마땅한 것으로 여깁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주님과 그렇게 잘 아는 사이입니까? 주님의 것과 내 것을 가리지 않고 동고동락하며 주님을 위하여 내 것을 드리는 것을 즐거워하는 양입니까?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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