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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리를 따르는 좋은 일꾼들이 됩시다 (요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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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따르는 좋은 일꾼들이 됩시다 (요 3: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 3:21) 

존 번연(John Bunyan)은, 주님을 찾은 그 놀라운 감격을 기록하여 위대한 저서 ‘천로역정’을 남겼습니다. 그 책에 나타난 기독교도의 모습은 존 번연 자신의 모습이자 지금도 진리를 찾고 있는 순례자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참으로 많은 고난과 고통을 경험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며, 위대한 주의 진리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 책에서는 크리스천 곧 기독도라는 주인공이 순례의 여정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 중 ‘신실’과 ‘소망’이라는 이름의 두 사람과 만나 함께 길을 가다가, 의미가 없는 헛된 박람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장사꾼들은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물건들을 사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애써 귀를 막고 지나가려고 하는데 한 장사꾼이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들은 무엇을 사길 원하십니까?”  이때 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사기 원 합니다”  그들은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닌 진리를 얻기 원했습니다.

그들은 오늘이 있다가 내일 없어지는 것이 아닌 진리를 얻기 원했습니다. 그들은 물질이 아닌 내 인생에 대한 대답을 얻기 원했습니다. 바로 그들은 영광스러운 진리를 얻어서 자신들의 영혼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에게 사랑의 하나님은 참 사랑이시며 참된 진리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진리'의 의미나 본성에 대해서는 폭넓게 논의될 수 있지만, 하나님과의 연합 관계와 관련하여 사용되었습니다.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진리를 가리킵니다. 이 진리의 빛이 죄악으로 인해 어두워진 인간의 심령을 뚫고 들어오면 회개와 전인적 삶의 변화가 수반되기에 이르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구원의 진리에 대해 말씀하시는 예수님께거듭남의 방법을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을 믿는 것이라고 대답 하셨습니다.(13-15절).

이 말씀은 인자인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으로서 예수님 자신이 하늘과 땅을 연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곧 죄로 인해 단절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존재임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구원의 유일한 매개체인 예수님은 인간의 중생을 위해 자신이 모세가 광야에서 들었던  놋뱀과 같이 들리는 것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신 광야 길로 가는 도중에 백성의 마음이 상하여 또다시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하나님을 대표하는 모세를 원망함으로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오랜 불평으로 모세를 대적했습니다. 만나에 대해, 또 물과 다른 음식이 부족한 것에 대해 원망하자 하나님은 불 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셔서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상하고 죽게 하셨습니다. 그 때 백성들은 모세에게 그들의 죄를 고백하며 뱀을 물리쳐 주도록 기도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모세가 기도하니 이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자는 누구든지 뱀에게 물린 상처에서 회복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숭배할 형상이 아니라 치유의 상징"으로서 놋 뱀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놋 뱀의 적절한 상징성을 제시하십니다.

(요 3:14-15)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놋뱀은 불 뱀에게 물린 상처에서 물리적 회복을 얻게 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고난당하신 메시아는 우리의 죄를 영원히 치유해 주셨습니다. 
광야의 놋 뱀처럼 예수님도 인간의 거듭남을 위해 들려야만 했습니다. 이는 바로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광야의 놋 뱀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들려질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는 고난뿐 아니라, 승천하실 때의 영광(빌 2:9)까지 의미합니다.

인자이시며 메시야 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 그것이 인간을 거듭나게 하며 하나님 나라, 곧 새 시대에 들어가 영생을 소유하게 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마틴 루터가 어거스틴  수도원에 있을 때 한번은 꿈을 꾸니까 시험하는 자가  나타나서 루터에게 책을 펴 보입니다. 그  책에 기록된 것을 보니까 전부  자기의 지은 죄 즉  아이 적부터 젊었을 때까지 지은  죄가 전부 기록되었습니다. 그 때에  그 책을 가진 사단이 루터에게 하는  말이 이것이 사실이냐 물었습니다. 그러니  할 수 없어서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에 하는 말이  "네가 이런 더러운 죄를 짓고 구원을  얻겠단 말이냐?"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을때 기가 막히고 낙심이 되었습니다. 그때에 위로부터 음성이  들리는데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었느니라"는 말씀이 들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단에게 하는 말이 그리스도의 보혈이 그 죄를 지우고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한다고 기록하라고 말할  때에 사단이 물러갔다고 합니다.  
구원을 얻는 길은 오직 십자가의 보혈을  믿고 그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는 길 밖에 다른 것이 없습니다.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사순절을 보내는 이 주간에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재확인해야 합니다.

요3:16절은 복음에 관한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내용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복음서들 속에 있는 복음'(the Gospel within the Gospels) 혹은 `작은 복음서'(Little Gospel)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전체 대표할 수 있는 구절로 복음의 진수로서, 복음이 담고 있는 모든 계시의 말씀을 사랑의 개념에서 천명합니다.

유대인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은 선민 이스라엘게만 국한되는 것으로 여겨졌으나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 민족이나 계급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에게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힙니다.
독생자를 보내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동기가 된 것임이 밝혀져 있습니다.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그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의 생애를 보면 우리는 그 사랑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은 결코 타율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성격의 것이며 막연한 이론이나 말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응분의 대가를 아낌없이 지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독생자'라는 표현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의 특수함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루터의 말을 빌리면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 전부터 계시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결국 예수의 탄생은 영원 전부터 독생자로 존재하셨던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이었다는 점에서 유일무이한 사례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독생자'(`모노게네스')는 `외아들'이란 뜻 외에 `그 속성과 성품에 있어서 유일무이하신 분'이란 의미도 내포합니다.
아들(휘오스)을 주로 그리스도에 대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3:16, 36;5:20, 23;8:36 등).
  
참 진리 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십니다.
`주셨으니'(`디도미')는 `보내다'(send)와 `넘겨주다'(hand over), `값을 지불하다'(pay) 등의 뜻이 있는데 성육신(Incarnation)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심(crucifixion)까지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믿는 자의 구원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심판하시는 그리스도(5:30;8:16) 즉, 그리스도의 말씀이 사람들을 심판하시며(12:48) 하나님이 일체의 심판을 그리스도께 위임하셨다고(5:22) 증거 합니다.
예수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분명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 의로운 재판장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딤후 4:1, 8).

그러나 적어도 예수의 초림 목적을 말할진대 심판보다는 구원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함이 확실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자비로운 용서와 구원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로되, 이 양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반응하는 인간의 태도에 따론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 일을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까지 하셨지만 인간의 불순종과 완악함이 끝내 구원의 문을 막아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심판이 주목적이라면 하나님은 굳이 독생자를 보내지 않고서 물이나 불 혹은 기타 천재지변을 통해서도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적극적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7)고 합니다.

`구원을 받게'란 말은 `영생을 얻는 것'과 동의어로 사용되었는데 구원(소테리아)이란 본래 아주 무서운 멸망의 위기 속에 빠진 자, 예를 들면 물에 빠져 죽어가는 자를 구출해 주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죄악 된 불의의 삶으로부터 야기되는 모든 불안과 죄책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벗어나며 또한 죄 사함과 의롭다하심(justification)을 받고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과 아울러 장래에 하나님 앞에서의 평강과 희락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임을 말합니다.

요한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독생자 예수의 초림 목적이 바로 구원에 있었음을 강조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아담의 후예로서 원죄와 자범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으며 따라서 구세주로 오신 예수를 영접하지 않으면 자연히 멸망과 정죄 가운데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 없이 인간은 절대로 거듭날 수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영생을 소유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소유하게 되는 것은 자신들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며 믿고 따를 때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것을 믿는 자가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믿는다'라는 것이 전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하심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따르며 함께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따름은 일회적인 행동이 아닌 계속적인 행동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순종의 생애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이 뜻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때로는 환경과 타협하고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이들이 있으나 이것은 믿음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볼 때 예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구원과 멸망 이 두 편으로 확연히 구분되었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고 합니다.
심판은 이미 과거에 시작되어졌고 그 판결은 지금까지도 유효한 것임을 나타냅니다. 

불신자들은 장차 있을 종말론적인 대 심판을 받기도 전에 이미 죄인으로서의 삶 즉 정죄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진리 안에서 자유하지 못하고 죄에 얽매여 죄에게 종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한다면 이러한 관계는 파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자기의 목표와 다르다고 하여 거부하고 자신의 길로 가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며,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찾아내어 그것을 힘써 행하는 이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주시는 영생의 선물은 믿고 따르는데서 부터 시작됩니다. 이 '영생'은 현재의 생명이 죽지 않고 영원히 계속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주어지는 새 생명이며, 마지막 날에 이루어져 영원한 하나님의 친교에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요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그렇기 때문에 영생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을 의미하는 죽음과 반대 개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만이 이러한 영생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생의 선물은 우리를 향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모든 이가 죄 아래 있어 멸망을 피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사랑하는 그의 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요일 4:10).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구원의 계획은 창세전부터 이미 계획되었던 것들이며, 때가 되어 그 아들을 세상 가운데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죄악 속에 있는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통해 영생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악을 행함과 진리를 따르는 일을 빛으로 설명 합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고 합니다.

'빛'('포스')은 달빛이나 별빛, 불빛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태양 빛'을 의미하는 말로,  주로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빛은 '유일한 빛'(the one light), '참 빛'(1:9)이신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어두움('스코토스')은 빛과 반대되는 완전한 어두움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단순히 어두운 밤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과는 다릅니다(Westcott).
따라서 어두움은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인 죽음의 상태를 의미함을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 3:20)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의 본성 자체가 악하므로 빛보다는 어두움을 택하며 더 나아가 죄로 점점 오염될수록 악행으로 나아가는 속도에 가속도가 붙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 3:21)고 합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 곧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아니라, 그 신앙의 열매(마 3:8, 10)를 맺는 자'(A. M. Hunter) 즉 참된 기독교적인 신앙과 삶을 실천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빛으로 오나니('에르케타이 프로스 토 포스')는 '빛에게로 나아오다'란 뜻입니다. 사람이 빛 되신 하나님에게로 나아오는 것은 원래의 자기 자신의 기원에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charlesworth). 

이러한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와 진실한 교제를 하기 원하시며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영생을 선물로 받은 자는 빛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들입니다. 진리를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신앙의 열매(마 3:8)를 맺고 따르는 자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참된 그리스도의 신앙과 삶을 본 받아 따르며 실천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는다면 삶 가운데에서 그분을 따르고 있는지 살펴보며 나의 삶이 얼마나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며 따르는 삶인지 뒤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진리의 빛이 죄악으로 인해 어두워진 인간의 심령을 뚫고 들어올 때 회개와 함께 전인적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 진리는 신실함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삶의 변화를 통해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그분의 말씀대로 따르며 사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과 교제를 한다고 하지만 빛이 아닌 어두움 가운데 행하고 있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는 자요, 진리를 행하는 자가 아닙니다

(요일 1: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이에 요한은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해야 우리가 진리 가운데 속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일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믿는다는 것,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에 따른 삶도 수반됩니다. 이러한 자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빛 가운데 거하며 모든 두려움과 어두움을 이 땅에서 몰아낼 것입니다. 그것이 믿는 자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가 받게 될 값진 선물 영생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 선물은 누구에게나 주어질 수 있는 것이지만, 그를 영원히 따르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따르는 그에게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십니다. 이 영원한 생명에 거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며 그를 따르며 삶으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전환이 일어나야 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한복음 6:68]라고 한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유명한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원래 귀족 출신으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았으나 참 만족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는 작품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갈채를 받았으나 죄에 대한 공포와 불안한 마음으로 늘 괴로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적한 시골길을 걸어가던 중 어느 시골 농부를 만났는데 그의 얼굴에는 유난히도 평화가 깃들여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농부에게 가서 그렇게 평화스럽게 사는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농부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기 때문에 언제나 내 마음은 기쁠 뿐입니다" 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영혼을 살리는 말을 듣고 난 다음부터 톨스토이는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부지런히 읽었습니다. 

그 후 그는 결국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과거의 불안과 공포는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톨스토이는 한 농부의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평화스러운 모습을 통해서 그가 가진 영생의 진리를 자기의 것으로 삼은 다음에 삶의 방향이 달라지고 목적의식도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사순절은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회개가 일어나고 이를 통해 우리의 신앙이 전환을 맞게 되는 주간입니다. 신앙의 전환을 통해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는 주간입니다.
한 주간의 삶 가운데에서 값진 선물을 기억하며 지금 어느 곳에 거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영생의 선물을 어떻게 삶 가운데 열매 맺기 위하여 진리를 따르고 있는지 돌아보며 진리를 따르는 좋은 일꾼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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