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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니라고 말할 때 (출 20:1-17, 요 2:13-22, 고전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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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고 말할 때 (출 20:1-17, 요 2:13-22, 고전 1:18-25)


<예루살렘 성전 정화 사건의 내막>

오늘은 사순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 주어진 성서정과 중에 요한복음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흔히 ‘성전 정화 사건’으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사복음서 모두에 나올 만큼 유명한 사건이지요.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을 순례하고 계셨는데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몰려오는 유월절이 가까운 시기였습니다. 그야말로 유월절 축제로 들떠 있는 시기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던 것이지요. 이처럼 본문에 나오는 사건은 유월절을 코앞에 둔 시기에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그 때 성전 안에는 유월절을 기념하는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북적거렸습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이었고, 그 다음이 돈 바꾸어 주는 환전상들이었습니다. 유월절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바칠 희생 제물이 필요합니다. 흠 없고 정결한 1년생 소나 양, 염소, 비둘기 등을 바쳐야 합니다. 이런 희생 제물을 멀리서 구하려면 번거로우니까 아예 성전 안에서 이 짐승들을 팔았습니다. 돈만 준비하면 성전 안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전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사람들에게 유대 돈을 바꾸어주는 환전상들까지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전 안에서 희생 제물을 사고파는 상거래 행위를 주관하는 책임자는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국가적인 명절이나 기념일이 있을 때마다 이런 희생 제물을 파는 일은 막대한 수입을 올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래는 감람산 계곡에서 이루어지던 희생 제물 거레 행위를 아예 성전 안으로까지 끌고 들어왔던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의 편의를 봐준다는 명목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할 성전이 종교 지도자들의 욕심 때문에 장사꾼의 소굴이 되고 말았던 것이지요. 

예수께서 이런 광경을 보셨을 때 격노하셨습니다. 좀처럼 성을 낼 것 같지 않은 우리 예수님께서 격한 분노를 쏟아내십니다. 거룩한 분노를 보이셨던 것이지요! 15-1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예수님의 이러한 분노는 충분히 수긍이 갑니다. 하나님 앞에 순결하게 예배를 드려야 할 장소를 돈을 버는데 혈안이 된 장사소굴로 만들었으니 얼마나 화가 나셨겠습니까? 16세기 초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개혁 역시 마르틴 루터의 거룩한 분노 때문에 촉발되었습니다. 중세를 흔히 암흑시대라고 하는데 천주교 교황이 무소불위의 절대적 권위를 휘둘렀습니다. 세속 권력까지 꼼짝 못할 정도로 교황청의 권력은 대단했습니다. 하지만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가톨릭교회가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바티칸 교황청은 성 베드로 대성당을 대대적으로 증축을 하고 있었는데 막대한 경비가 필요했습니다. 이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나온 고육지책(苦肉之策)이 바로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이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천국에 들려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연옥에 대기하면서 죄를 씻는 기간이 필요한데, 면죄부를 비싼 것을 사면 연옥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짧아진다고 선전했습니다. 루터는 성서에 나와 있지도 않은 이와 같은 면죄부 판매에 격분해서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비롯한 가톨릭교회의 타락상을 낱낱이 비판하는 95개조의 논문을 만들어 비텐베르크 성당의 대문 앞에 내걸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종교개혁의 시작이 된 것이지요.

<계속되어야 할 성전 정화의 필요성>

오늘 우리 한국 교회 역시 일대 정화와 개혁이 필요하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한기총을 비롯한 각종 교단장 선거에 부분별한 금품수수가 오간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관행입니다. 또한 많은 목사님들이 복음을 값싼 은혜로 전락시켜 예수 믿으면 무조건 물질 축복 받고, 건강 축복 받고, 만사형통한다는 식의 ‘번영복음’(Prosperity Gospel)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토록 미워하셨던 맘모니즘, 즉 물신숭배와 황금숭배가 교회 안에 까지 깊이 침투하여 물량주의에 넘어간 것이 사실입니다. 이 세상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로 변혁시킬 수 있을까, 그런 고민보다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을 개인의 물질주의적이고 성공주의적인 복으로 바꾸어버렸던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은 온데간데없고 값싼 물질주의, 성공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죽어서 천국 문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외바퀴 수레 안에 금덩어리를 가득 싣고 도착했습니다. 베드로는 여기 천국은 사람이 태어날 때 빈손으로 왔고 죽을 때에도 역시 빈손으로 죽기 때문에 몸만 들어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무릎을 꿇고 제발 금수레를 끌고 천국 안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베드로가 하나님을 찾아가서 이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주신 대답은 이렇습니다. “금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와 봤자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보도블록으로 밖에는 쓸 수 없는데 왜 고집을 피우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오래 하던 미국 선교사님 가정이 중국 정부의 탄압을 받았습니다. 결국 중국에서 추방당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집에 찾아온 군인들은 90kg 이상의 물건은 가져 갈 수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중국 군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선교사님 부부와 어린 두 자녀는 저울에다 가져갈 물건을 달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선물로 받은 도자기, 새로 산 타자기, 책, 등등, 90kg을 만들기 위하여 가장 소중한 물건들을 차례로 저울에 올려놓았습니다. 

드디어 눈금이 90kg에 가서 정확히 멈추었습니다. 군인들이 가져갈 물건들을 저울에 다 달아봤느냐고 물었습니다. 선교사님 부부가 그렇다고 대답을 하자, 선교사님의 두 어린 자녀들의 몸무게를 재봤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니라고 대답하자 두 아이의 몸무게를 합쳐서 90kg이 넘어서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선교사님 가족이 중국을 빠져나올 때 가지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네 식구의 몸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을 보는 우리는 우리의 예배당과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바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쉽게 썩어지고 말 유한한 것들이 영원하고 무한한 것을 밀어내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좋은 것으로 여긴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봉독한 구약 출 20: 1-17절에 나오는 ‘십계명’의 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예!” 하더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소신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바른 정체성을 갖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보이는 성전을 보이지 않는 성전으로 대체하신 예수님>

이제 정말 중요한 부분은 요 2: 18-22절의 말씀입니다. 오랫동안 익숙한 관행으로 이어져온 예루살렘 성전의 시스템에 일대 혼란이 왔습니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으며 너무나 당연한 관행으로 여겨져 온 성전 시스템 전체에 혼란이 왔던 것입니다. 마비가 일어났습니다. 혼돈과 충격에 빠진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따져 묻습니다. 당신이 어떤 권세로 이렇게 하는지 표적(signs)을 보여 달라는 주문입니다. 증거를 대라는 말이지요. 

이 때 예수님은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19절을 봅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두말할 필요도 없이 여기에서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하며, 허문다는 말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다는 뜻이며, 사흘 후에 일으킨다는 말은 사흘 후에 부활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으로서의 본분을 상실한 예루살렘 성전을 완전히 대체할, 전혀 새로운 형태의 성전을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외형만 숙청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중심이 되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성전 본질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이제 유대인들은 당연히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20절에서 이렇게 따집니다.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당시 헤롯 임금이 주선해서 짓던 예루살렘 성전은 자그마치 만 팔천 명이 동원되어 46년간 공사를 해왔지만 완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허풍이요, 과대망상으로 비쳐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이에 구약 시대의 희생 제물을 드리던 성전 제의의 시대는 끝나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주축이 되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성전 예배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성전을 100% 하나님의 임재(presence)와 똑같은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근사치에 갈 수는 혹 있을지 몰라도 교회 그 자체가 100%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도와 기관으로서의 교회는 언제나 예루살렘 성전과 마찬가지로 타락할 수 있습니다. 대대적인 정화와 개혁이 필요할 정도로 부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건물이나 제도로서의 보이는 교회를 우상화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사흘 만에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성전임을 한 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상에서의, 눈앞에 보이는 교회는 진정하면서도 영원한 새 성전이신 예수님의 모형이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사모하고 높여야 할 성전은 보이는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입니다! 

<왜 하필이면 교회를?>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께서 하필이면 왜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토록 격분하셨을까를 생각해봤습니다. 사실 이치를 따져본다면 성전보다는 매국노들이 들끓는 세무서에 가서 집기를 내던지고 세리들을 쫓아내시는 것이 더 그럴듯해 보이지 않습니까? 오히려 사창가나 유흥업소에 가셔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윤리적으로 타락한 사람들을 내쫓아야 옳지 않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음란서적을 파는 서점이나 음란 비디오나 불법 음반을 판매하는 가게에 가셔서 좌판을 뒤엎고 물건들을 내치는 것이 더 맞지 않습니까? 

그 대신에 왜 하필이면 성전, 교회에 가셔서 그랬을까요? 아무리 교회가 타락해도 세상보다 더 할 리는 만무할 텐데 왜 세상은 그냥 놔두시고 교회만 그토록 더 엄하게 꾸짖으셨을까요? 우리 교회는 이런 질문들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의 뜻을 깊이 음미해봐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님의 생각이 옳다면, 하나님의 가장 큰 영광을 받아야 할 기관이 교회인 동시에 가장 큰 비판을 받을 수 있는 기관도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무신론의 가장 큰 원인이 세상 사람들이 아닌 그리스도인들 자신에게 있다는 칼 바르트의 지적은 옳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외치며 삶으로는 전혀 하나님 믿는 사람들처럼 살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본질이 뒤집힌 교회마다 오셔서 뒤집어엎기를 원하십니다. 물질과 성공과 온갖 세상 자랑으로 무장한 교회를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기초한 성전으로 새롭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고 세상의 인기와 주목을 한 몸에 받는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없는 교회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깨끗케 하기를 원하십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우리는 얼마든지 부패할 수 있는 교회의 연약한 모습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진심으로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위에 다시 세워지는 교회가 되기를 갈망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 다함께 고전 1: 22-25절 말씀을 다함께 읽으심으로써 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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