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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마 21:2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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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1:27-32)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의연하게 걸어가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는 사순절 기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다 보면 예수님께서 이 수난의 길을 가지 않으실 수가 없었구나 하는 탄복과 탄식이 마음을 울립니다. 어떻게 저 어렵고 힘든 길을 그토록 의연하게 걸어가실 수 있었을까 하는 탄복입니다. 그리고, 위험한 길, 목숨을 내건 길, 십자가의 길, 그 길을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가셨다는 아픈 마음의 탄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마지막 한 주간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진진한 일입니다. 엄청난 긴장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정치·종교 당국과 직접 부딪치셨습니다. 그것도 아주 격렬하게 맞닥뜨렸습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폐부를 찔렀고, 그의 행동은 기이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실 때마다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확연하게 구별되었습니다. 한편에서는 환호했으나 다른 편에서는 경악했습니다. 한편에서는 기대감으로 충만했으나 다른 편에서는 분노로 치를 떨었습니다. 

한편에서는 박수치며 지지하는 사람들의 무리가 뒤를 쫓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편에서는 적대감을 갖고 미워하는 소수의 세력이 예수님을 방해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민중은 거대했지만 조직적인 힘은 없었던 반면, 정치세력은 소수였지만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정치·종교적으로 로마제국의 억압을 받고 있었던 소수 민족이었습니다. 독립국가가 되지 못했기에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정치·종교적 억압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등장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민중들에게 가뭄 속 단비와도 같았습니다. 그들은,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곧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예수님을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모든 세력을 손에 쥐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마음껏 누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눈에 가시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과 행동에 저항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허상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앞에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동안 아무에게도 질문 받지 않았고, 도전 받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들에게 감히 질문하고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행위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정치·종교 기득권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첫 번째 사건은, 21장 첫 부분에 시작되는 예루살렘 입성이었습니다. 

구약의 예언대로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박수를 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리로다” 사람들은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찬양했습니다. 자신들의 옷을 깔고 종려나무의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의 메시아적 입성을 소리 높여 노래 부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외친 ‘호산나’는, ‘구원하소서, 도와주소서’ 라는 의미의 기쁨과 승리를 표현하는 찬양의 노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는 모습에 당시의 정치 세력가들은 불안했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예루살렘 입성 후 성전에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채찍을 들고 소와 양을 파는 사람들을 내쫒으셨습니다. 그리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너희들이 어찌하여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장사꾼의 집으로 만들고 있느냐” 말씀하시며 격노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민중들에게는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치 세력가들에게는 매우 불안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과 행위에 소요와 민란을 일으킬만한 요소가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예수님께 다가와서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시는 길에 환호를 보내는 이들과 그 길을 저항하고 방해하는 세력들이 충돌하기 직전의 모습입니다. 일촉즉발. 한 번만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터질 위험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위기의 순간에 그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질문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마태복음 21:23)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은 당시의 정치·사회·종교 기득권을 대표하고 있는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민중들의 환호를 받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보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너에게 무슨 잘난 것이 있기에 이렇게 휘젓고 다니느냐? 한 번 혼나볼래?”라는 협박의 의미로 이렇게 물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물음에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마치 ‘나는 이제 고난의 길을 간다’고 확정을 지으신 것처럼 예수님은 아주 담담하고 담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 부터냐 사람으로 부터냐 (마태복음 21:24~25)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증인으로 세우십니다. 그는 예수님보다 앞서 오셔서 유대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던 예언자였습니다. 세례요한이 등장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했습니다. “저분이 엘리야인가보다. 아니, 저분이 메시아인가보다”하면서 많은 이들이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때 세례요한은 말했습니다. “나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나는 당신들이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여러분에게 세례를 주실 겁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오심을 미리 알려주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고민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만약 세례요한이 하늘로부터 왔다고 한다면 당장 예수님께 또 다른 질문을 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보아라, 하늘로부터 온 세례요한이 회개 세례를 하고 나를 지목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들이 어찌하여 믿지 아니하느냐?” 반대로 세례요한이 사람들로부터 생겨진 것이라고 말한다면, 세례요한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하나님의 예언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백성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합니다. 그들은 이러한 생각들로 주저하다가 결국 “알지 못한다”라고 대답합니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차라리 비겁해지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 상황을 말씀으로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하여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마태복음 21:25~27)

참으로 무책임한 대답입니다. 결코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저 편의적으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을 무서워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무서워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를 두려워했습니다. 

정치, 교육, 사업 등 사회에서 어떠한 활동을 하고 있든지 사람들의 생각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매우 당연하고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의 생각 이상의 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의 삶은 금방 조변석개하게 됩니다. 특별히 지도자들은 사람들의 시선보다 더 큰 하나님의 시선 앞에 설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공동체의 참다운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기 이익과 탐욕을 위해서는 언제라도 공의와 정의를 포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픔이고 슬픔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모르겠다”고 무책임하게 두 손을 놓아버렸을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래? 그러면 나도 내가 누구의 권위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이런 행위를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그리고 이어 한 가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첫째 아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얘야, 오늘 너 포도원에 가서 일 좀 하지 않으련?” 첫째 아들이 싹싹하게 대답합니다. “예. 가겠습니다.” 아버지 앞에서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첫째 아들은 포도원에 가지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에게 아버지가 다시 부탁을 합니다. “얘야, 오늘 너 포도원에 가서 수고 좀 하렴.” 둘째 아들은 싫다고 대답하지만 ‘아,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하고 곧 뉘우칩니다. 그리곤 포도원에 갑니다. 

회개하지 않는 신앙은 거짓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끝에 한 가지 질문을 던지십니다.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한 아들이냐?” 누구입니까? 명백히 둘째 아들입니다. 그렇다면 두 아들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했던 첫 대답이 달랐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마지막이 달랐다는 것일까요? 마지막이 달랐다는 것이 차이입니다. 그리고 두 아들의 마지막이 다를 수밖에 없었던 아주 중요한 단서가 있습니다. 바로 뉘우침입니다. 둘째 아들에게는 뉘우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참다운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많다, 하나님을 믿은지 오래 됐다, 직분을 가졌다’ 하여도 회개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것은 가짜믿음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32절 말씀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마태복음 21:32)

신앙에 있어서 회개와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믿으면 회개하는 사람이고 회개하는 사람은 믿게 되어있습니다. 첫째 아들은 믿음이 있는 것 같은데 회개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바른 신앙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거짓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이 바리새주의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회개의 마음 없이 신앙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교만일 뿐입니다. 회개하는 마음 없이 신앙에 연륜이 쌓이면, 독선이 만들어집니다. 

이것은 오히려 신앙 없는 사람보다 30배, 100배의 교만함을 쌓게 되는 길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 생활을 하시면서 가장 싫어했던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독사의 자식들아! 회칠한 무덤 같은 사람들아!”하시며 비판했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고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회개하는 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오랫동안 믿으셨습니까?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믿기 시작하셨습니까? 10년이 되셨습니까? 30년이 되셨습니까? 그렇다면 나 자신을 조용히 되돌아보아야 하는 시기에 와 있다는 이야기와도 같습니다. 어쩌면 매우 위험한 시기일 수도 있습니다. 교만과 독선이 가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에베소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꾸중이 나옵니다. ‘너 잘한 것 많다. 땀도 많이 흘렸고, 봉사도 많이 했다. 이단도 많이 물리쳤다. 그런데 내가 네게 한 가지 야단칠 것이 있다. 네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칭찬받을 많은 것들을 뒤로 하고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이유로 야단을 맞습니다. 

도대체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회개하는 마음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나의 부족함, 연약함, 부끄러움,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죄인이라는 생각들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치명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영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갖고 있었던 모든 신앙의 탑들이 무너지고 맙니다. 회개하지 않는 마음은, 고집스러운 마음, 무조건 거절하려는 마음, 옳은 것임을 알아도 내가 하기 싫으면 하지 않겠다는 완악해진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회개란 무엇일까요? 밑바닥으로 다시금 내려가는 것입니다. 나의 아래를 바라보는 겁니다. 그리고 내 밑바닥에서부터 하나님을 향해 열어놓는 것입니다. 시편 51편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우리의 상한 심령이고 우리의 통회하는 심령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에는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누가복음 15장 이야기에서는 둘째 아들이 탕자였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죽기도 전에 유산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받은 유산으로 방탕하게 살다가 재산을 탕진했습니다. 그렇게 인생의 바닥을 쳤을 때, 그는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로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이 다 써버린 돈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이 돌아오는 것, 회개하는 것, 오직 그 한 가지 때문에 뛰어나가서 아들을 껴안은 것입니다. 

가장 낮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항복하십시오

우리는 완악할 때가 많습니다. 바닥을 치기 전까지는 회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쳐야 나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불충했는지 깨닫습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의 마음보다는 저항의 마음이 늘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 정신적인 메카니즘(Mechanism)이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적인 저항정신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많은 것들을 새롭게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나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 그 분께는 너무 오랫동안 저항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 이게 도대체 뭡니까? 나를 어떻게 이렇게 대접하십니까!’ 그런 마음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길게 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을 기억해야합니다. 하나뿐인 아들을 나 같은 자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 못 박으신 하나님의 큰 사랑 앞에 우리가 항복할 때, 하나님은 우리 영혼에 진정한 기쁨과 새로운 감격을 허락하십니다. 우리에게 자유의 영을 허락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영을 넘치게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향해서 소리내어 부르십니다. “야, 이제 그만 가거라. 거기까지만 가라. 그리고 다시 내게로 돌아오거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우리가 가던 길을 돌아서서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것이 믿음이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역사의 시작인 것입니다. 너무 늦으면 안 됩니다. 인생의 깊고 깊은 저 밑바닥까지 내려가서야 하나님께 돌아가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사이에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무시하고 우리의 모든 시간과 정력들을 다 낭비하겠다는 것입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신 이 축복을 다시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0점부터, 바닥부터 주님과 함께 시작하겠습니다. 제 속에 있는 어두움의 그림자, 미움의 그림자, 한 맺힌 분노들을 벗겨주시옵소서. 마음 속 탐욕과 어리석음도 씻어주시옵소서. 그래서 주님만 바라보며 제 인생을 열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면서 나아가는 하나님의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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