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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최고의 선물 (눅 15: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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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선물 (눅 15:17-24) 

특별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선물을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가격이 비싼 선물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귀한 분에게 합당한 선물이 있고, 소중한 선물이 합당한 분들이 주위에 있습니다. 참으로 귀한 분들에게는 지갑을 열어서 마음먹고 비싼 물건을 사서 드리는 것이 오히려 누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몇날 며칠을 정성을 들여서 뜨개질을 하기도 합니다. 새벽부터 장을 본 정갈한 재료들로 음식을 만들어서 드리기도 합니다. 마음에 정한 귀한 분일 수록 더욱 그렇게 선물을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직접 들려주신 두 아들과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버지는 집을 떠났던 둘째 아들 자체를 귀한 선물로 여겼습니다. 아들은 물질을 귀한 것으로 여겨서 그것들만 취한 채로 아버지를 떠났지만 아버지는 아버지이기에 그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돌아온 탕자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입장에서 이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이신 아버지께서 아들이 또 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다리시는 아버지에게 누군가를 인도하는 자체가 그 분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 최고의 선물이 됩니다.  

받으신 VIP와 전도에 관한 작정카드에 쓰일 이름의 주인공은 누구입니까? 마음을 작정하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여러분 마음속에 떠오르는 그 분, 그 분이 지금 어느 곳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 카드에 이름이 쓰이는 순간 그 분은 일생일대 가장 크고 아름다운 선물을 받게 됩니다. 한 생명을 살리는 초대인데 세상에 그 어떤 것이 이 선물보다 귀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귀한 선물을 어떻게 준비해서 드리시겠습니까?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준비하시겠습니까? 본문의 두 아들의 이야기는 먼저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선물을 준비해야 하는가에 관해 알게 하시는데 바로 하나님께 선물을 드리는 마음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가 VIP작정카드에 누군가의 이름을 쓰는 것이 그 사람에게만 값진 선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우리가 하나님에게 드리는 최상의 선물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장 귀한 것, 천하 보다 귀한 한 생명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이 최선의 선물, 향기가 나는 제물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내가 누군가를 작정해서 인도하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카드에 이름만 쓴다고 작정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마음에 결심 없이 작정할 수 없습니다. 작정한다는 말은 우리의 마음을 정한다는 것이고, 정성을 다해서 최고의 선물을 하나님에게 드리겠다는 마음의 결단을 작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받으시는 하나님이 우리가 드리는 어떤 선물을 기뻐하시는지 또 어떤 마음으로 받으시는지를 알려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처럼 두 아들과 아버지가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에서 두 아들은 각자 아버지에게 선물을 합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간 아내 때문에 혼자 된데다 사업마저 실패해서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가 생일을 맞았는데 장성한 아들들이 저마다 아버지께 드릴 선물을 준비합니다. 

그동안 말썽만 부리던 둘째 아들은 이번에는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려야겠다고 마음먹고 아버지가 좋아하실 것이라고 생각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아버지를 놀라게 하려고 집안에 장식도 합니다. 옷도 평소와 달리 양복으로 말쑥하게 차려입었습니다. 아버지가 와서 자신이 노력한 것을 보고 기뻐하실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흐뭇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자기가 입도 떼기 전에 뒤늦게 온 형이 아버지를 보자마자 무엇인가를 아버지에게 이야기합니다. 바라만 보던 동생보다 먼저 형이 아버지에게 선수를 칩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과 약혼을 하겠다고 아버지에게 먼저 말해버립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형을 바라보며 그만 동생이 듣지 말았어야 할 말을 선뜻 해버리고 맙니다. “내게 그 소식보다 더 큰 선물은 없구나…….”     

존 스타인벡이 쓴 에덴의 동쪽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제임스 딘이라는 배우가 주연을 하며 유명한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이 영화에서 둘째 아들 제임스 딘은 큰 형만을 편애하던 아버지의 사랑을 간절히 원하며 자기 나름대로 정성을 다해서 아버지에게 선물을 준비하기는 했는데 그것은 한 다발의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돈의 출처를 알고는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화를 냈고 아들은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좋은 선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버지는 받지 못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쉽게 둘째 아들의 선물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선물을 받으시는 아버지와 두 아들의 이야기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처럼 또 두 아들이 등장하는 성경 창세기 4장 가인과 아벨의 말씀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창세기 4장1절부터의 말씀은 자녀 된 우리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할지, 하나님에게 드리는 참된 선물로 무엇을 드릴지, 그렇게 드리는 선물은 어떻게 드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작정하는 카드가 비록 한 장의 종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물이 될 수가 있고, 그것을 드리는 우리가 아벨처럼 참된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인데 우리가 잘 아는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보면 항상 궁금한 생각이 드는 점이 있습니다. 바로 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나 하는 점입니다. 

영화 에덴의 동쪽에서는 이점이 명백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왜 아버지가 제임스 딘의 돈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 돈이 전쟁 물자를 제공해서 번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의 희생과 피값으로 얻은 이익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상징하던 아버지가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사업에 실패한 상태였기에 재정적으로 어렵기는 했지만 아들의 부정한 돈, 그것도 자식들을 버리고 떠나버린 무정한 어머니의 주머니에서 나온 자금으로 시작된 돈을 아버지는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대신 단란한 가정을 꾸미겠다는 큰 아들에게는 마음껏 축복해주며 그 약혼 발표 선물을 기쁜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소설과는 달리 원작이 된 창세기 4장의 말씀에는 왜 하나님이 누구의 제물은 받으셨고, 누구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는지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주석하는 입장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어떤 분들은 이야기합니다. 아벨의 제사는 양을 바친 제사이고, 가인의 제사는 곡식을 바친 제사인데, 하나님께서 피 제사를 더 기쁘게 받으시기 때문에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 1절부터 4장 가인과 아벨의 본문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제사 드리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나는 곡식의 제사보다 피 제사를 더 기뻐 받는다. 너희들은 그 제물로 드려야 한다. 그런 말씀을 가인과 아벨이 제사 드리는 그 순간까지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가인도 아벨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가꾸고 기른 것으로 하나님께 드렸는데 결과는 달랐습니다. 

그래서 가인 입장에서 억울할 수도 있는 노릇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양의 첫 새끼를 아벨이 드렸기 때문에 받으셨을 것이다. 그런데 이 의견도 적절한 답이 되지 못하는 것이 양과 같은 짐승들은 어느 것이 첫째인지 알 수 있지만 곡식은 똑같은 벌판에서 똑같은 속도로 자라기 때문에 추수해서 거둔 것은 모두 첫 수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까? 그 대답은 제사 드리던 제물이 아니라 그 이전 가인과 아벨의 삶에 있습니다. 창세기 4장 1절과 2절은 가인과 아벨이 태어났다 그리고 그 둘은 각자 양을 치고 농사를 했다는 사실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3절부터 세월이 지난 후에 하는 구절이 나타납니다. 이미 자라서 자기 힘으로 일을 했고 제물을 드리는 때가 온 것인데 우리는 그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설명하지 않기에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단 한분, 누가 아십니까?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 아들들이 어떻게 자라났는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컸는지, 그들의 언행은 어떠했는지, 다른 이들과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낱낱이 하나님은 보셨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4장 3절에 이르러 그들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순간이 온 것입니다. 이 순간은 하나님 눈에 무엇이 중요했겠습니까? 제물이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드린 가인과 아벨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중요했습니다. 이렇게 제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드린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은 저의 생각이 아닙니다. 

창세기 4장 4절의 말씀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아벨의 제물만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아벨의 제물을 받으시기 이전에 그것을 드린 아벨을 먼저 받으셨습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고 하셨습니다. 가인의 제물만 받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먼저 가인이라는 인간을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에 어떤 제물도 자기 발로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경우는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이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위해서 스스로 제물이 되셨을 뿐입니다. 예수님 이외의 그 어떤 제물도 자기 발로 나가서 제물이 되는 법은 없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그 제물을, 그 선물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자신도 제물만큼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속에 누군가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야겠다 생각할 때 먼저 내가 하나님 앞에 드릴 준비가 되어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아벨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이 그 점입니다. VIP 초청 카드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그 손을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고 생각해서 화를 냈습니다. 자기가 생각해도 자기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맞습니다. 어쩌면 자기가 드린 제물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곡식을 싫어하셔서 받지 않으셨다면 어쩌면 가인이 옳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제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바로 그 점에 있습니다. 그렇게 화내는 가인을 보시고 이번에는 하나님이 물으십니다. “어찌하여 네가 화를 내느냐? 얼굴빛이 변하는 까닭은 무엇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 하나님은 제물에 관해서 전혀 말하지 않으십니다. 제물이 아니라 선을 행했느냐를 물으십니다. 가인의 매일의 삶, 선을 행하는 삶을 하나님이 먼저 관심하셨습니다. 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만약 우리가 마음먹고 누군가를 작정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대상자가 마음대로 인도되지 않을 때에 우리가 꼭 생각해 봐야 할 것이 바로 아벨과 가인의 이야기입니다. 내가 선을 행했는가? 하나님 보시기에 또 그 사람이 보기에 감동을 주었는가? 돌아봐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부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최고의 선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마음과 뜻을 다해서 정성을 다해서 누군가를 마음에 작정했다면 그 다음은 하나님 차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맡길 뿐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그 생명을 기다리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처럼 하나님은 기다리시고 아들과 딸은 먼 곳에서 아버지 앞으로 나아옵니다. 어쩌면 교회가 아직 어색한 그들 마음속에 선뜻 나오기에 갈등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아버지를 만나면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교회에 어떻게 적응할 수 있을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약간의 거부감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아들의 딸들의 모습을 보고 먼저 나오는 분이 바로 우리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누가복음의 본문은 아들이 아버지를 보고 뛰어간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 뛰어갔다고 증언합니다. 이 아버지와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를 중동 지방 사람들에게 들려주면 두 가지가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유산을 먼저 달라는 것이 자기들 생각에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또 한 가지는 아버지가 뛰어왔다는 점이라고 합니다. 전통적으로 아버지의 권위가 센 곳에서 아버지들은 달리지 않습니다. 아니 달려가고 싶어도 체면이나 남들의 눈이 있어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께서 뛰어 오신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또 그냥 달려오시는 것이 아니라 “측은히 여기며 달려오십니다.” 측은히 여긴다는 원어의 뜻은 감정을 억누를 수 없어서 몸이, 또 오장이 아릴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달리면서도 마음이 타들어 갑니다. 애가 끊는 듯한 마음, 저미는 심정이 아들을 보자마자 아버지를 달리게 했다는 말입니다.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무뚝뚝한 일반적인 아버지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역시 원어는 한번이 아니라 연거푸 입을 맞추었다고 말합니다. 집나간 이후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으면 그저 몸성히 돌아왔다는 그 한 가지 만으로 과거는 다 잊으시고, 집 나갈 때 상했던 그 마음도 다 잊어버리고 팔을 벌리고 입을 연거푸 맞출 정도로 반기고 있습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습니다. 
이제 아들이라고도 여기지 마세요. 품꾼으로 여기세요.” 

아들은 몇 번이나 속으로 연습했을 그 말을 떠듬떠듬 시작했지만 아버지는 대꾸하지 않습니다. 들으려하지 않습니다. 손을 저으며 입을 막습니다. 오히려 고개를 돌려 종들을 부르며 제일 좋은 옷, 가락지, 신을 내오라고 합니다. 우리말로는 그냥 옷이지만 그 옷은 특별한 사람이 입는 권위와 지위를 상징하던 옷이었습니다. 신발도 줍니다. 종들은 신발을 신지 않습니다. 종이 되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하는 아들을 아버지가 존귀하게 만들어준 것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상속과 재물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아들 자체를 가장 귀한 선물로 여기셨습니다.         

우리 모두 마음속의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인도하기를 원하실 텐데 혹시 혹시 마음에 작정하기에 걸리는 분이 계십니까? 이 사람은 나하고 사이가 좋으니 인도해야 하지만 저 사람은 내가 말해도 듣지 않을거야, 저 사람은 만나서 이야기하기도 싫어, 마음속에 스스로 벽을 세워놓은 분은 계시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큰 아들 마음속에 똑같은 벽이 서 있었습니다. 정작 아버지는 용서하셨는데 큰 아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품에 안길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벽이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데에 큰 벽이 될 수 있습니다. 큰 아들처럼 아직도 내가 마음의 주인이 되어서 내 마음을 내가 주장을 하면 둘째가 아버지와 만나는 것을 스스로 막아섭니다. 아버지가 둘째를 기다리시던지 말든지 그것은 안중에 없게 됩니다. 그 사람이 믿고 영적으로 복을 받는 것 따위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내 자존심이 중요하고, 내 체면이 중요하고 내 분이 덜 풀린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큰 형의 뒤틀린 마음입니다.         

오늘 누가복음의 본문에서도 큰형은 가인처럼 행동합니다. 가인과 똑같이 맏아들은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먼저 동생이 와서 잔치가 벌어졌는데 나중까지 들판에 아무도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평소 큰 형의 삶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큰 형은 아버지의 마음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니 일부러 아버지의 마음을 알려고 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는 둘째가 언제나 오려나 어제도 오늘도 들판에 나가서 기다렸습니다. 큰 아들은 그러던지 말든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말씀은 맏아들이 일을 끝내고 왔는데 와서 보니까 잔치가 벌어졌다고 합니다. 보통 잔치가 아닙니다. 송아지를 잡고 풍악과 춤추는 향연이 이미 무르익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들판에 나와서 큰 형에게 동생이 돌아왔다, 와서 기쁜 잔치에 참여하십시다 알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마음에 관심이 없으면 오히려 우리가 전도에 방해가 되고 맙니다. 그저 관심이 없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생명이 인도되지 못하게 막아서고 맙니다. 그래서 큰형처럼 우리마음속에 억울한 것이 있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동참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사람 때문에 섭섭한 것이 있어도 그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을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큰 형은 잔치가 벌어진 내막을 알고 달려왔습니다. 아버지 앞에 서서 입을 열어서 처음 한다는 말이 이두입니다.

 우리말로 보세요 하는 말인데 우리 성경에는 번역을 하지 않았지만 원어와 영어에는 보세요하고 표시를 합니다. 보세요 아버지, 따지는 말투이지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동생이라고도 하지 않고 당신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있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기 시작합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들과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이 돌아왔는데 살진 송아지를 이 아들을 위해서 잡으셨습니까? 그러나 본문 어디에도 둘째가 창기와 함께 유산을 탕진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억울한 마음에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         

누군가의 관계에서 오해가 생기면 억울할 수 있습니다. 미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억울해 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유산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넘치는 하늘의 보화를 분깃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봉독한 본문 앞부분에서 둘째가 아버지의 유산을 달라고 했을 때 아버지는 그 유산을 각각에게 나눠줬다고 성경은 증언을 하십니다. 둘째에게 유산을 주셨지만 큰 아들에게도 이미 유산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보화가, 하나님의 넓으신 능력과 은혜가 이미 우리에게 유산으로 약속이 되어있습니다. 우리의 것입니다. 이 땅에서 쓰고 쓰고 또 써도 남을 하늘의 보화입니다. 나누고 나누고 또 나누어도 차고 넘칠 하나님의 선물이 이미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돌아올 잔치의 주인도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모두 장차 천국의 주인이 될 사람들이기에 아버지와 함께 벌여야 할 잔치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기쁨의 자리에 함께 참여할 때 하나님께서 아쉬운 마음, 억울한 마음도 보듬어 주실 것입니다.         

누가복음의 말씀은 억지를 부리는 큰 아들에게 아버지가 권했다고 전합니다. 권했다는 말은 위로 했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위로 했다는 말입니다. 잔치가 벌어졌지 않니 잔치로 가자꾸나, 너나 작은 아들이나 모두 다 내 아들이잖니 같이 가자, 같이 가서 즐거운 잔치, 천국의 만찬, 베풀어진 이 상에 함께 앉아 즐기자. 우리 주님이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이 즐거운 잔치에 어떤 선물을 가지고 가시겠습니까? 

우리의 선한 삶으로, 선한 영향력으로 감동시킨 선물을 우리 주님이 원하십니다. 들판에 서서 오랫동안 기다리시는 아버지가 되신 하나님께서 바로 그 이름을 부르면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구나 내가 잃었지만 다시 얻었구나 우리가 먹고 즐기자! 주님이 초대하시는 잔치입니다. (최영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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