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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인격처럼 (요 1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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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인격처럼 (요 10:11-15)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오늘 우리가 닮고자 하는 성품은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셨어야 할까요?"
어쩌면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아니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셔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본문 말씀은 예수님을 ‘선한 목자’라고 비유하는데, 목자라는 말 속에는 그 목자가 목양하는 ‘양’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럼 그 양들이 과연 목자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니 우리의 목자 되시는 예수님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어느 특정한 사람의 목자가 되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목자가 되셨고, 당신의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고 말씀합니다.

2007년 7월호 낮은 울타리의 제목이 [유추프라카치아]였습니다.
발음도 어려운 이 말은 아프리카어로 ‘사람의 영혼을 가진 식물’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이 식물은 아프리카 깊은 밀림에서 공기 중에 있는 소량의 물과 햇빛으로만 사는 음지식물 과에 속합니다. 결벽증이 강해 누군가 손만 대도 금방 시들해져 죽어버리지만, 신기하게도 한 번 만진 사람이 계속해서 애정을 가지고 만져 주면 살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깊은 외로움을 간직하고 있을 법한 이 식물의 생명은 관심과 사랑에 있습니다. 유추프라카치아처럼 상처로 깊은 외로움과 중독의 늪에 빠진 사람들, 이제 그들의 외로움과 상처를 만져 줄 사랑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누구의 ‘유추프라카이아’입니까?
누가 당신의 ‘유추프라카치아’입니까?

삯꾼의 사랑은 아닌지

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성품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삶의 교훈을 줄 수 있습니까? 아니 예수님의 성품을 배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예수님은 목자와 대비하여 '삯꾼'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0장 12절입니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가고 또 헤치느니라” 
삯꾼은 절대로 자신이 손해 보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양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순간에 목숨을 잃을까 도망가는 것이 삯꾼입니다. 선한 목자와 삯꾼은 결정적인 순간에 참모습이 드러납니다. 위기의 순간에 드러납니다. 이때 드러나는 위선적인 모습이 바로 삯꾼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하는 사랑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예수 믿는 자로서의 여러분의 성품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렇게 많이 ‘사랑’에 대하여 말하는데, 그 사랑의 성품의 진정성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자신이 크리스천임을 드러내기 위하여 사랑하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자리에서 이 정도 사랑을 보여 주어야 품위 있어 보이기 때문에 하는 사랑은 아닌가요?”

2005년 1월 ‘낮은울타리’라는 잡지에서 한 아름다운 결혼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 소개합니다.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친구의 아름다운 결혼식을 경험했던 이야기입니다. 경기도 성남의 한 작은 교회에서 있었던 결혼입니다. 신랑은 노동운동을 하던 친구인데, 성남의 전자부품을 만드는 작은 공장에서 착한 여자를 만나게 되었답니다. 언제나 책을 읽는 모습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었지만, 아름다운 영혼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멀쩡한 육체로 절뚝거리며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작지만, 기업체를 운영하는 부유한 아버지가 심한 반대를 했지만, “아버지, 그녀의 다리 한쪽은 다른 한쪽보다 매우 짧지만, 그 짧은 다리조차 그녀의 고귀한 영혼을 부러워할 겁니다.”라며 아버지를 설득했답니다. 아들에게 질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는 집을 얻어 주겠다고 했지만, 아버지의 권유도 뿌리치고 셋방에서 신혼을 살게 되었습니다. 아담한 동화 속 같은 교회에서 바이올린과 첼로 그리고 피아노 반주에 맞춰 근처 사진관에서 빌려 온 빛바랜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랑은 유행이 지난 양복을 입고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멘델스존의 음악이 흐를 때, 기쁨과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친구의 모습을 잊지 못합니다. 그리고 결혼식 전날 신부에게 보냈던 편지를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참으로 감격스러웠습니다. 
“나는 내일 이제껏 성치 못한 다리로 비틀거리며 세상을 끌고 온 당신의 손을 잡고 하나님 앞으로 걸어가 고개 숙여 맹세할 겁니다. 늘 기쁨으로, 사랑하는 당신의 한쪽 다리가 되겠다고, 만일 그러지 못하면 당신과 한마음이 될 수 있도록 차라리 내 다리 하나를 절게 해달라고…”

참 아름다운 사랑의 동화입니다. 참 아름다운 남자의 모습을 보면서 사랑의 힘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과연 당신의 아들 중의 하나가 다리를 저는 여자와 결혼한다고 할 때, 당신은 이 사랑을 보며,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당신의 아들과 딸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누군가와 짝이 된다고 할 때, 그것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품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쉽게 이야기하고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는 그 사랑에 우리가 감격하고 고백하는데, 그 사랑을 우리가 해야 한다고 할 때도 그렇게 매력적으로 들릴 수 있을까요?

언젠가 우리 부목사님 중에 한 분이 설교하면서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 처음에 교회에 와서 교인들의 아픔을 보고 함께 아파하고 흘리던 눈물이 저에게서 없어지고 있어요."
우리가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혹시 우리의 삶과 사명, 신앙이 매너리즘에 빠지면서 사랑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고, 어느 순간 삯꾼이 된 내 모습을 발견하지 않나요?

이런 우리에게 선한 목자인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이 우리에게 주시는 도전은 무엇일까요? 아니 우리가 얼마나 이런 주님의 성품을 알고 있습니까? 
이 시간에는 예수님에게 배우는 두 가지 성품을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온유한 사랑의 성품이 

오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의 마음속에 가장 갈망하는 사랑의 성품, 예수님을 닮고 싶은 것이 있다면 ‘온유한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을 볼 때, 뜨거운 가슴과 눈물, 그리고 연민이 있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율법이나 원칙도 중요하지만, 영혼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이 있었기에 예수님은 늘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 위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수가성의 여인을 만나셨고, 삭개오를 만나 주셨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온유한 성품’에 대한 많은 정의가 있지만, 예수님을 통해 발견하는 온유의 모습은 ‘양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온유한 성품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늘 누군가가 나의 마음을 헤아려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며,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허용하지 못함이 아닐까요? 아니 온유하지 못한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자신이 세워놓은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용납하지 못하고 비난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예수님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기보다는 아픔을 당하고 눈물 흘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누군가를 비난하기보다는 그들의 영혼을 바라보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민도 늘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자유함을 얻고 기쁨을 얻었지만, 그가 은혜 가운데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지만, 고민했던 것은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헤아리는 그 마음 때문에 말입니다.

지난주에 성경공부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것은 나의 기준과 원칙이 아니고 교인들의 마음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요즘 교인 중에는 종종 저에게 포도주를 선물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심장에 좋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먹어보려고 여러 번 시도를 했는데 좋은 포도주일수록 맛을 더욱 모르겠기에 먹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조심스러운 것은 아직은 목사가 포도주를 마신다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은 교인이 많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주 가는 중국집이 있습니다. 그 집의 지배인을 제가 전도하려고 만날 때마다 이야기를 하는데, 그분도 저를 보면 무언가를 잘 해주고 싶은 생각이 있는 모양입니다. 한번은 우리 교인들과 함께 모임을 했는데, 갑자기 포도주를 서빙하는 것이 아닙니까? 조금은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이번에 미국을 다녀오면서 비행기를 업그레이드하고 비즈니스석을 타고 왔습니다. 너무 피곤한 일정이었기 때문에 포도주를 한 잔 마시고 잠을 자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승무원이 저를 보자마자 “목사님,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 사람 때문에 포도주를 마시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제가 생각하기에 늘 교인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 일쯤 배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나의 삶에 피해가 가는 일들에도 내가 교인들을 생각하며 교인들의 마음, 아니 양들의 마음을 생각하며 목숨을 버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선한 목자인 것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과연 예수를 믿는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온유한 사랑을 베풀 수 있을까요? 과연 우리에게 그런 성품이 있을까요?

저는 목회를 하면서 교인들을 대하면서 양들을 대하면서 원칙보다 더 중요한 마음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권면하신 것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입니다.“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우리가 배워야 하는 주님의 성품, 목자의 심정이 필요합니다. 사실 온유가 ‘성품’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누가복음 10장에 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다른 시각으로 보아야 하는 것은 강도 만난 자를 돌보지 않고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인이 나쁜 사람이기보다는 온유한 성품, 긍휼히 여기는 성품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어려운 사람을 바라보는 온유함보다 자신이 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일 중심적인 사람의 모습입니다.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온유한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멍에를 매고 갈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워지겠습니까?
온유한 성품은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언젠가 어떤 분이 제 방송을 보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목사님 부탁입니다. 교회에서 돈 없는 사람이 대우를 받는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다가도 돈이 없으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글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내 목회에서 그런 모습을 없는가?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우리가 모두 용서받을 사람, 긍휼히 여겨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 마음으로 우리의 주변을 바라본다면, 우리의 삶에 온유한 성품이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엄한 사랑의 성품이

몇 주 동안 말씀을 준비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온전한 성품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조화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사랑’이라는 측면에서 더욱 절실합니다. 누구나가 온유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서 좋은 평가를 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온유함이 때로는 ‘방관’이라는 얼굴로 우리에게 나타날 때 아주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를 향한 희생과 온유한 사랑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교정하기 위한 엄한 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동일한 고민을 하고 살 것입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며 ‘화’를 내야 하는지, 참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순간 말입니다. 제가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조금 이상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 화를 내는 것은 문제이지만,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며,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덕을 위하여 화를 낼 수 있다면 아주 이상적인 성품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엄한 사랑의 표현은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으며, 나 자신이 그러한 일로 견디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갑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릴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선한 뜻은 결단코 변하지 않습니다. 
시편 23편은 다윗이 그의 삶에서 여호와의 목자 되심을 찬양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여러분은 막대기와 지팡이가 무엇을 하는지 아시지요? 우리의 삶의 방향을 지시할 뿐 아니라 잘못된 길로 들어설 때 주의 지팡이가 우리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십니다. 때로 우리를 질책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 무섭게 질책하시기도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온유’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고 평온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다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온유하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과 같은 자들아!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질책하시며 분노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전에서 장사를 하는 이들을 향하여 채찍을 드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잘못된 삶에서 돌이키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엄격한 사랑’입니다. 그들의 영혼을 바라보며 참을 수 없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가장 어려운 성품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엄격한 사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삯꾼 목자가 절대로 흉내 낼 수 없습니다. 어떤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나쁜 평판을 받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소리는 그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 교인 중에 수술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수술은 많은 아픔과 노력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자녀가 살이 썩어가는데도 무서워서 수술을 받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온유한 사랑으로 자녀를 위로하고 있겠습니까? 아니면 엄한 사랑으로 꾸짖으며 수술을 받도록 하겠습니까? 엄격한 사랑은 영혼에 대한 사랑과 배려에서 출발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다리가 부러진 적이 있습니다. 접골원에서 뼈를 맞췄지만, 잘못된 상태로 다시 정형외과를 찾아가야 했습니다. 뼈를 맞추는 일은 마취를 하는 일이 아닙니다. 어렸던 저에게 잘못 굳어진 뼈를 다시 맞추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모릅니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깁스를 한 후에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린 제가 의사 선생님에게 욕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만일 기분 나쁘다고 의사가 뼈를 맞추는 것을 거부했다면 제가 이렇게 온전하게 걸을 수 있었겠습니까?

세브란스 병원에 미국인 의사 인요한 선생님께서 계셨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그 옛날 우리나라에 의료 선교사로 와서 헌신했던 분입니다. 전라도에서 결핵환자들을 보살피던 시절, 억울하게 욕을 먹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해할 수 없었답니다. 
입원환자 중에 규율을 안 지키고 술을 먹은 사람을 내보내야 할 때, 그 환자는 입에 다물 수 없는 욕을 하고, 누런 가래를 뱉고는 나가 버렸습니다. 
"왜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가 한국 사람들에게 저런 대우를 받아야 하나?" 
이해할 수가 없었답니다. 그 순간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을 참느라고 애쓰던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답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난 후 떠나간 그 환자가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와서 잘못을 받고 치료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답니다.

지금은 힘들지만, 그 영혼을 바라보며 엄격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성품이 우리에게 있는가? 지금 우리가 누리는 평온을 깨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엄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가? 에베소서 4장 25절입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혹이 여러분은 지금 만나는 믿음의 동역자들, 동료와의 관계에서 거짓 평화를 유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부딪치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속으로는 비난과 욕을 하면서도 웃으면서 지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관계가 얼마나 지속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질문을 한번 묻고 싶습니다. 그 평안함이 과연 자신을 위함입니까? 상대방을 배려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지키는 것입니까? 엄한 사랑의 명확한 정의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 그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오는 헌신적인 행동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그 엄한 사랑을 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후회한 적이 없으십니까? 남편을 내가 조금만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렸더라면, 여러분 삶에 잘못된 친구, 그에게 내가 조금만 더 관심을 두고 대했더라면, 나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조금만 더 엄하게 대했더라면.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비행기를 타기 위해 기다릴 때였습니다. 새벽 2시에 공항에 도착해서 기다리다 4시부터 ticketing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정인지 모르지만, passport control을 하면서 사람이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아가씨가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슥 제 앞으로 와서 서는 것입니다. 한참을 봐도 이 외국 아가씨가 제 앞에 와서 서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적을 했습니다. 여기에 모든 사람이 줄을 서고 있으니 뒤로 가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아가씨가 "O.K" 하면서 저를 보고 웃더니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물었습니다. 
"O.K. what?"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외국 남자가 제 앞으로 치고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다시 말했습니다. 
"We are on the line!" 
그런데 이 남자가 들은 척도 안 하고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말했더니 한국 사람이 하는 수법을 그대로 쓰는 것입니다 
"no English!"
다 알아들으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그 사람을 쫓아냈더니, 이번에는 영어를 아주 잘하는 인도 남자가 다시 파고들어 옵니다. 그래서 또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바쁘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제가 다시 말했습니다. 
"You had to say 'excuse'?" 
양해를 구했더라면 양보할 수도 있는데 슬쩍 들어오는 것은 용납이 안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비행기 탑승 시간을 물어봤더니 제가 타는 비행기보다 5분이나 늦은 비행기였습니다. 결국, 제가 타는 비행기도 1시간이나 늦게 출발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저에게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저 자신과 싸워야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같이 줄을 서 있는 한국 사람 중에 단기선교를 갔다 오는 청년 수십 명이 보는데, 저를 알아보고 이야기한 사람도 있는데, 제가 목사인데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라는 고민이었습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모든 사람이 다 방관하며, 이미 질서가 깨어졌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나서서 투쟁한 이유는 비행기를 타기 전 말씀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엄한 사랑’에 대하여 말입니다. 누군가는 나서서 바로 잡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와 이 세상 사람을 사랑하고, 특히 한국 청년을 사랑하기에 이 아이들이 그 상황에서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래서는 안 되지 않겠니?" 
그러면서 한 청년에게 어느 교회에서 왔느냐고 물었더니 대답을 해주지 않습니다. "왜 물으세요?"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아마도 자신의 교회를 이야기하는 것이 창피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제 신분을 먼저 이야기했습니다. 
"나도 목사야! 분당에 있는 만나 교회."
같은 크리스천을 사랑하기 때문에 참을 수가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표현을 씁니다. 
'전략적 분노'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서 나오는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이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타나는 엄한 사랑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엄한 사랑’이 결코 영혼에 대한 둔감함, 영혼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 엄한 사랑 때문에 관계가 깨어지는 아픔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잠시의 평화를 위해 잘못된 것을 교정하지 못한다면 더 큰 아픔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8절입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가능하면 온유하고 화목한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할 때가 있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갈라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을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더욱 아프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삶의 현실에 내가 아무리 사랑하고 노력해도 깨어지는 아픔을 경험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악화된 관계, 잘못된 만남을 위해 애를 써보지도 않고 '온유' '평화'라는 명목으로 포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관계가 깨어질 때, 잠시 가슴 아파하고 혹은 울고는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친밀한 관계와 사랑의 지속을 위해 우리가 싸우고 투쟁할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여러분이 때로는 엄한 사랑으로 다가가는 그 일들을 통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매달리며 노력하는 그 사랑으로 회복의 역사가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아름다운 성품 중의 하나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던 그 사랑 말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예수님은 온유하게 모든 것을 참으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예수님은 엄격하게 채찍을 드셨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며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시고 행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이 성품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온유한 사랑을 하십시오. 누군가의 영혼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렇다면, 엄격한 사랑을 하십시오. 생명을 사랑하는 목자의 심정으로.
(김병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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