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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도신경(7) :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고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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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고전 1:18)

우리 안에 있는 욕망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려놓았다고 생각하지만 돌아서면 다시 붙잡고 있고, 또 내려놓았다고 생각하지만 다시 돌아서면 또 붙잡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욕심이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필리핀에서는 원숭이를 재미있는 방법으로 잡는다고 합니다. 원숭이를 잡기 위해서 먼저 코코넛을 원숭이 손에 들어갈 만큼만 구멍을 뚫어 놓고 그 안에다 쌀을 넣어서 원숭이가 있는 높은 나무 밑에 코코넛을 갖다 놓습니다. 그러면 원숭이가 내려와서 그 안에다 손을 집어넣고 쌀을 움켜쥘 수 있는 만큼 움켜쥐고는 손을 빼려고 한답니다. 

하지만 원숭이가 움켜쥔 쌀 때문에 코코넛 열매의 구멍에서 손이 나오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코코넛을 쥐고 나무에 깨지라고 땅땅 소리가 나게 칩니다. 그 소리를 듣고 천천히 걸어오면 원숭이가 급해 더 빨리 칩니다. 하지만 여전히 코코넛 열매는 깨지지 않고 원숭이는 나무를 치고 있다가 결국에는 잡히고 맙니다.
   
주님과 우리의 다른 점이 있다면 내려놓음입니다. 우리는 놓아야 할 것도 놓지 못하고 살아가는데 주님은 내려놓지 않아도 될 것까지 내려놓으셨습니다.
   
주님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자기를 낮추셔서 이 땅에 오셔서 33년 동안 사람의 몸을 입고 사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온갖 고난을 당하시다가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주님의 내려놓으심으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오늘도 사도신경을 나누겠습니다. 사도신경 중 예수님에 관한 고백 중에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시고”를 살펴보겠습니다.
   
주님의 고난은 우리를 대신한 고난입니다. 주님의 고난 중에 대표적인 고난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주님이 받으신 고난의 상징이며 주님이 받으신 고난의 대명사입니다.
   
어느 분이 어릴 때 치아가 상해 치과에 가서 이를 뽑은 이야기를 하는데 그분은 고통스러웠겠지만 저는 참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이분이 이를 뽑다가 이가 부러졌습니다. 그래서 그 속의 뿌리를 뽑아내려고 칼로 마구 째어서 집게로 뽑다가 그래도 안 되겠던지 다음에는 망치와 정을 가져다가 입안에 정을 탁 갔다가 대고 망치로 톡톡 두드리는데 얼마나 고통이 심했든지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저는 몇 년 전에 치과에서 사랑이를 뽑았습니다. 제 이가 뿌리가 깊이 박혀서 사랑이 하나 뽑는데 1시간이 넘게 걸렸습니다. 의사분도 고생을 많이 했고 저도 죽을 뻔 했습니다. 기계로 하다가 안 되니까 무슨 연장으로 하는데 힘을 쓰다가 입안이 온통 찢어지고 피가 나고 입은 벌리고 있어야 하는데 턱관절은 아프고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이는데 침도 삼킬 수 없고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를 뽑은 다음에 바로 필리핀을 갔는데 얼굴은 부었지요. 혈압은 올라서 얼굴은 벌게지고 뒷골은 당기고 볼은 아프고 한 주간 죽는 줄 알았습니다. 외국에서 병원가면 돈이 많이 드니까 병원은 못가고 자구책으로 포도주를 한 병 사서 들고 다니면서 입안을 행궈내면서 소독을 하고 다녔습니다. 정말 힘든 한 주간이었습니다.
   
사랑니 하나를 뽑는데도 그렇게 힘이 들었는데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양손과 양발에 못이 꽝꽝 박히고 옆구리 엔 창이 푹 들어갔으니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우셨을까요?
   
오늘 설교는 주님의 고난의 상징인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주님이 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1) 십자가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하용조 목사님이 전도사였을 때 일입니다. 어느 날 심방요청이 왔습니다. 아들이 하나 낳고 더 이상 낳지 못하는 집사님이었습니다. 그분이 아이를 더 이상 낳을 수 없어서 그랬겠지만 엉뚱한 요청을 하더랍니다. “전도사님 아들이 셋이죠.”, “예, 셋입니다.”, “전도사 박봉에 아들 셋 키우시기 힘드시지 않으세요”, “아닙니다. 하나님 은혜로 세 아들이 잘 큽니다”, “전도사님, 아들 셋이니 셋 중에 큰 아이를 우리 집에 양자로 주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내가 그 아이를 훌륭하게 키워서 미국에서 일류 가는 대학에서 공부를 시키겠습니다.” 

전도사님은 그 얘기를 듣는 순간에 만화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귀와 코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 같았답니다. 애비로서 얼마나 창피했는지 모릅니다. ‘당신은 애 셋 키울 자격이 없으니 고생시키지 말고 애를 우리 집에 보내주면 잘 키우겠다’는 얘기입니다. 전도사 체면에 화는 못 내고 어떻게 피할까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안하지만 그 애를 제가 혼자 낳은 것이 아니라 집사람과 함께 낳았는데 제가 집에 가서 물어보고 해답을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대답을 하고 집에 와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니까 그렇게 처량하고 불쌍할 수가 없더랍니다. 

그날 저녁에 사모님에게 그 이야기를 하면서 “큰 아이를 양자로 줄까?”라고 했더니 사모님이 화가 나서 문을 쾅 닫고 들어가더니 그날 저녁은 밥도 주지 않더랍니다. 그 다음날 새벽기도회에 가서 강단에 무릎 꿇고 앉았는데 억울해서 기도가 나오질 않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런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라고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는 아들이 셋 있지 않느냐 나는 아들이 하나밖에 없는데 나는 그 아들을 죽는 자리에 내 주었다”고 하시더랍니다.
   
하전도사님은 그 때 아버지의 마음을 깨달았습니다. 자기는 아들 셋 중에 하나를 출세시킬 테니 양자로 달라고 하는데도 이렇게 억울하고 마음이 아픈데 하나님께서는 내 죄를 위하여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으니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경 요 3:16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독생자를 주신 이유는 우리를 향한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2) 십자가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인간으로 사신 것만도 고난입니다. 주님이 고난을 당하신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사랑입니다.
   
극동 방송국에 사장으로 계시는 김장환 목사님께서 미국인과 결혼을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가 정말 힘들 때입니다. 지금의 캄보디아 정도의 수준이거나 아니면 그것보다 더 힘들 때입니다. 목사님은 “너는 네 고국으로 돌아가서 이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명감으로 한국으로 오셨지만 문제는 사모님이었습니다. 우리가 6.25사변 바로 직후에 비참하던 때 사모님은 미국에서 최고의 좋은 환경 속에서 공부도 많이 하신 분입니다. 이런 분을 한국으로 데려왔습니다. 데려와서 서울도 아니고 수원에서 개척을 했습니다. 

그 당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장로교는 알아도 침례교가 뭔지도 잘 몰랐습니다. 이단 소리도 많이 들었고 어떤 사람들은 “침레교...? 침주는 곳인가?”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거기다가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동생, 온 식구들이 한 집에 같이 살았습니다. 사모님이 어려운 점이 많았는데 그 중에 제일 어려운 것이 화장실문제였답니다. 그 당시에 우리나라 화장실에 문이 없습니다. 있어야 거적 하나로 가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방방에 자기 화장실이 있던 곳에서 살던 사모님이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사모님이 화장실에서 시아버지라도 만나면 얼마나 무안합니까? 그래서 철저하게 밥을 적게 먹고 안 먹으면서 밤 12시 지나 한 번만 화장실에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밤중에도 시아버지가 올 때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 좋은 나라 미국에서 살던 사람이 어려운 한국에 와서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외국에 선교를 나가면 참 힘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잘 살았다고 어려운 환경 속에 들어가면 힘이 듭니다. 10년 전만해도 우리 이웃 나라에 가면 화장실 문이 없는 곳이 많았습니다. 어떤 곳에 가면 바닥에 구멍만 몇 개 뚫어놓고 볼일을 봅니다. 내가 일 보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들어와서 서로 등 대고 볼일을 봅니다. 일이 봐지겠습니까?
   
우리도 좋은 환경에 있다가 어려운 선교지에 가면 불편한 점이 많은데 주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으니 얼마나 불편한 점이 많으셨겠습니까?
   
제가 전도사 때 어린이 전도를 위하여 곰이나 사자의 인형을 뒤집어쓰고 나간 적이 있습니다. 한 시간만 돌고 와도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그런데 무소부재 하시던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33년간 사셨으니 그것도 엄청난 고난이었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십자가를 지셨으니 얼마나 큰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까?
   
주님이 왜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예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2. 십자가는 능력입니다. 
   
본문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는 믿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죄로부터 해방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 백성이 됩니다. 성경은 이 구원이 주님의 십자가로 된다고 가르쳐줍니다. 요 3:16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선언문에 서명을 한 순간 그 당시 300만 명의 노예들이 법적으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일제시대 때 부흥사로 활동하셨던 이성봉 목사님의 설교문을 읽어보니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술주정뱅이가 만취하여 기차레일을 베고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급행열차는 기적을 울리며 달려오건만 그 술꾼은 정신없이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고 있습니다. 그때에 한 자비로운 사람이 그것을 보고 견딜 수 없어 “여보시오, 저기 기차가 옵니다. 속히 일어나시오” 하고 고함을 치나 그 사람은 “기차는 무슨 기차, 여기는 우리 집 아랫목이야” 하면서 돌아눕는 것입니다. 그 자비로운 사람은 그걸 보고 견딜 수 없어 달려들어 술주정뱅이 다리를 끌어 철둑 아래로 내동댕이쳤다.
   
술주정뱅이는 떼굴떼굴 굴러갔으나 무정한 기차는 미처 정거를 못하고 술주정뱅이를 건지던 사람을 치고 말았습니다. 그는 목이 잘라지고 다리가 끊어지고 팔이 잘라지고 창자가 나와 즉사하였습니다. 기차는 그때서야 정거를 하고 기관사와 차장이 달려와서 잘라진 머리, 잘라진 팔, 다리 등을 모아 놓고 걱정들을 합니다.
   
술주정뱅이는 한참 굴러가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러나 아직 술기운에 정신이 없습니다. “아하, 기차가 정거를 하였구나. 웬 사람이 저렇게 많이 둘러싸고 있나. 누가 또 기차에 치인 것 이로구만. 아이고, 조심을 하지, 어떻게 하나, 어디 가서 구경을 좀 해야지” 하면서 비틀비틀 올라가 “거기 왜들 그러쇼” 하고 뚫고 들어가니 참혹한 시체가 있었습니다. “아이구, 끔찍해라. 저 사람 왜 저렇게 되었소” 하고 물으니 옆 사람이 눈에서 불이 번쩍 나게 따귀를 후려갈깁니다. 그리고는 “이 자식아! 이 사람은 너 때문에 이렇게 되었어”하니 그 사람이 달려들면서 “왜 생사람을 때려”하구 덤빕니다. “그래도 정신을 못 차려. 네가 여기서 술을 먹고 기차 레일을 베고 자고 있는데, 아무리 소리 질러도 안 일어나니까 이 사람이 너를 건지러 들어갔다가 너는 건지고 달려오는 기차를 피하지 못해서 대신 끌려 들어가 이렇게 죽음을 당했단 말이야.” 그 사람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멸망이 다가오는데 세상 술에 취하여 비틀거리는 인간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33년간 외치시다 못하여 대신 죽으시고 대신 멸망당하신 십자가의 대속을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2) 십자가는 마귀를 이기는 능력입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으면 마귀의 역사를 모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마귀가 없는 것이 아닌데 사람들은 마귀의 역사를 모르고 속으며 살아갑니다.
   
어떤 부부는 가정불화가 일어나서 몇 년 씩 말도 안하고 지냅니다. 그게 부부끼리 싸우는 게 아닙니다.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 같아도 뒤에서 마귀가 싸움을 붙이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마귀에게 놀아나고 있습니다. 정신병자들이 많습니다. 자기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귀가 정신을 돌게 합니다. 죄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며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무리 나오려고 발버둥 쳐도 안 됩니다. 마귀가 그 사람을 잡고 죄악으로 끌고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병들게 하고, 관계를 깨고, 가난하게 만들고, 절망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힘들어 하는 일들의 배후에 대부분 마귀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 설교문을 보니 어느 도시의 믿음 좋은 국회의원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분이 중학교에 다닐 때의 일이랍니다. 어머니께서 너무 심각하게 편찮으시니 형님들과 집안 어른들이 어머니의 묘지를 보러 다니셨답니다. 그분은 사랑하는 어머니께서 떠나가실 것을 생각하니 기가 막혀서 어머니를 살려 달라고 끊임없이 간절히 기도했답니다. 하루는 꿈속에서 꿈인 줄도 모르고 기도하다가 어머니를 보니 어머니 가슴에 마귀가 올라앉아서 어머니를 짓누르고 있더랍니다. “하나님! 저 마귀를 쫓아주세요.”하고 막 부르짖었더니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마귀를 쫓아주시더랍니다. 그런데 마귀가 급하게 도망가다가 문을 떨어뜨려서 그 문을 달고 있는데 누군가가 자꾸 부르더랍니다. 깨어 보니 어머니께서 부르고 계시더랍니다. “얘야, 일어나 봐라. 이제 시원하다. 살 것만 같다.” 그때 어머니의 병이 나으셨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어머니의 병이 단순한 병인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보니 마귀가 주는 병이었습니다. 우리의 고통 뒤에 마귀가 숨어 있습니다.
   
마귀가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천하를 모두 넘어뜨려도 십자가 앞에는 맥을 못 춥니다. 골 2:15입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게12:11을 보면 말세에 믿음의 사람들이 마귀를 이기는데 어린 양의 피로 이긴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로 이간다는 말입니다. 십자가가 마귀를 이기는 승리의 비결인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마귀에게 진 것 같지만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류의 모든 죄를 해결하시고 부활하셔서 마귀의 머리통을 박살내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마귀를 이기는 능력입니다. 
 

3. 십자가는 축복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축복의 파이프입니다. 기름파이프에서는 기름이 나오고 수돗물 파이프에서는 수돗물이 나오는 것처럼 십자가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오고 하나님의 축복이 나옵니다. 
 
1) 십자가는 건강의 축복입니다. 
   
벧전 2;24입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신 이유는 우리를 질병에서 건지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건강의 축복입니다.    김진홍 목사가 쓴 [새벽을 깨우리로다]는 책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목사님 젊은 시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판자촌에 30대 앉은뱅이 부인이 있었습니다. 아기를 낳을 때 심하게 출혈을 한 후로는 앉은뱅이가 되었습니다. 김목사님은 손으로 짚고 엉덩이로 다니며 애를 키우고 살림하는 부인을 보고 안타까와 하던 중 당시 서울대학교에서 의료 봉사 나온 어느 의과 대학생과 상의해서 병을 고쳐주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중앙의료원에 가서 진찰을 받게 했는데 치료 불능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김목사님은 의대생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기도할 테니 당신이 적합한 약을 지어 보시오” 의대생은 자신이 없다고 말합니다. 목사님은 “어차피 중앙의료원에서도 못 고치는 병이라고 했으니 밑져야 본전이 아닙니까? 약을 처방해 주시요. 나머지는 기도로 해결합시다.”라고 말했습니다. 

의대생은 소화제, 비타민 등을 섞어 약을 조제했습니다. 앉은뱅이에게 소화제, 비타민이 무슨 효력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목사님은 부인에게 그 약을 주면서 하루 세 번 먹으라고 하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애기 엄마, 병을 약으로 고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의사 선생님이 주시는 이 약을 잡수시면서 기도하세요. 병은 의사나 약이 고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고쳐 주시는 겁니다. 약 드실 때 마다 꼭 기도하세요.” 그리고는 김목사님은 새벽마다 애기 엄마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자주 격려도 했습니다. 

얼마 후에 앉은뱅이 부인이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무릎을 손으로 잡고 빠듯이 일어서더니 다음에는 한 발짝씩 걸음마를 하다가 나중에는 정상적으로 걸었습니다. 약으로 고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건강의 축복입니다.
   
세계적인 신유은사자 베니힌 목사님의 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분 집회에서는 많은 병자들이 고침을 받습니다. 저희 부부는 걷지 못하는 아이를 데리고 온 엄마를 봤습니다. 들어올 수 없는데 하도 사정을 하니 들여보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건강하게 회복이 되어서 걸어서 나갔습니다. 베니 힌 목사님의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치유가 강하게 일어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베니 힌의 기도를 받으면 낳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건강축복의 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하면 주님은 어떤 병도 다 고쳐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약 5:15에서는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축복입니다. 건강의 축복입니다. 믿음으로 건강의 복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2) 십자가는 물질적인 축복입니다. 
   
가난은 저주입니다. 신 28:15-19에 보면 가난이 저주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가난은 저주입니다. 감사하게도 주님은 이 저주, 가난의 저주를 십자가로 해결하신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에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남자가 32.4세, 여자는 35.1세 였답니다. 가난해서 먹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축복이 아닙니다. 저주입니다.
   
우리나라는 6.25 이후에 가난에 허덕였습니다. 6.25 전쟁 때 남북한 군인만 해도 280만 명의 사상자가 생겼습니다. 민간인 사상자만 250만 명이 생겼습니다. 전쟁미망인이 무려 30만 명이 넘었고 이들 중 대부분이 먹고 살기 위해서 중노동을 하고 혹은 몸을 팔기도 했습니다. 전 국민의 4분의 1이 기아에 허덕였습니다. 전쟁고아가 10만 명이나 생겼습니다. 그 아이들이 버린 음식을 주워 먹고 살았습니다. 축복이 아닙니다. 저주입니다.
   
지금 북한에서는 수도 없이 굶어죽고 얼어 죽고 정말 비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북한에서는 1995년에서 98년 사이에 350만 명이 굶어 죽었습니다. 어린이 62%가 영양실조에 걸려있고 결핵환자수가 400만 명으로 북한인구 5명당 1명이 결핵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축복이 아닙니다. 저주입니다.
   
세계의 기아 인구가 8억 2600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들은 만성적인 영양결핍에 시달리고 있는데 그중에도 특히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이 더 큰 피해를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매일 1000여 명의 여자들이 간단한 의료혜택을 받지 못해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매년 2만 명의 어린이들이 야채와 70원만 있으면 살 수 있는 비타민제를 먹지 못해 눈이 실명되고 있습니다. 매년 1400만 명의 아이들이 기아와 영양실조로 죽어 가는데 이는 7초에 한명 꼴로 굶주려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가난은 축복이 아닙니다. 저주입니다.
   
우리가 부요한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주님이 고난당하신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 고후 8:9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왜 가난하게 되셨습니까? 왜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우리의 가난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함입니다. 십자가는 축복입니다. 십자가는 물질적인 축복을 줍니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가난과 부에 대한 생각과 말이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한다고 주장합니다. 가난한 아빠는 이렇게 말합니다. “돈을 구하는 것은 악한 것이다.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돈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돈으로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라.” 그러나 부자 아빠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돈이 부족한 것은 악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네게 적합한 회사를 차려라. 돈은 힘이 있다. 돈을 잘 관리하는 법을 배워라. 돈으로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교회엔 많은 헌금을 하고 좋은 곳엔 기부금을 많이 내라. 그것이 부자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여러분은 무엇이 옳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가난하게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부요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잘 살 수 있는 길이 어디 있습니까? 십자가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가톨릭의 좋은 점이 십자성호를 긋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들은 자나 깨나 십자가를 긋습니다. 운동할 때도 십자가를 긋고는 뛰어나갑니다. 유럽의 잘 사는 나라들은 십자가를 귀히 여긴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럽에 십자가로 국기를 만든 나라가 10개국이 넘는다고 합니다. 필란드나 스위스, 노르웨이, 덴마크는 국기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고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전 세계 국기를 보면서 놀란 것은 국기에 십자가가 있는 나라들은 잘살고 평화롭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에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그려가지고 이류 국가가 된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십자가를 그린 나라들은 최고의 나라들입니다. 그런데 제가 또 놀란 것은 국기에 이슬람을 상징하는 초승달이 있는 나라들은 대부분 전쟁이 있고, 테러가 끊이지 않는 나라들이었습니다.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살기 어렵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십자가 복음입니다.
   
우리나라 상공을 비행기로 날면서 도시를 보면 놀랍습니다. 온통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가득합니다. 저는 축복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잘 되는 것입니다. 왜요? 십자가가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더 강하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축복입니다. 십자가는 재물의 축복도 가져다줍니다.
 
   
3) 십자가는 관계의 축복입니다. 
   
성경 엡 2:16입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십자가는 둘을 하나 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원수된 것을 소멸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관계의 축복입니다.
   
십자가를 붙들면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어 화목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무얼 말하는 것입니까?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붙들면 하나님과 화목 됩니다.
   
감사한 것은 십자가를 붙들면 자신과의 관계가 화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십자가를 붙들면 주님의 눈으로 자기를 보게 되고 자기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바위를 볼 때 사람들은 바위만 보지만 조각가는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작품을 봅니다. 그래서 망치와 정을 가지고 바위 속에 숨겨져 있는 작품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를 붙들면 육체 속에 감춰진 영혼을 보게 됩니다. 십자가를 붙들면 타락한 인간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됩니다. 지난 날 어떠한 죄를 지었고, 어떠한 상처를 받았더라도 십자가를 붙들면 주님 안에서 보배롭고 존귀하고 사랑스러운 자신을 보게 됩니다.
   
십자가를 붙들면 이웃과 화목하게 됩니다. 아무리 큰 원수라도 십자가를 붙들면 용서하게 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자기를 조롱하는 자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용서를 비는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화목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관계의 축복입니다.
   
김준곤 목사님이 6.25 직후 자신의 눈앞에서 부친과 아내를 때려서 죽인 공산당원들을 용서하고 구명하고 찾아가서 전도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 어떻게 자기 눈앞에서 부친과 아내를 죽인 사람들을 찾아가서 용서하고 구명하고 찾아가서 전도할 수 있었겠습니까? 십자가 정신입니다. 그분의 신앙이 십자가를 붙드는 신앙이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주님의 고난은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의 고난 중에 대표적인 고난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주님이 받으신 고난의 상징이며 주님이 받으신 고난의 대명사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이며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능력입니다. 구원의 능력이며 마귀를 이기는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축복입니다. 건강의 축복이고, 물질적인 축복이며 관계의 축복입니다.
십자가 붙들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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