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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독생자, 믿는 자 (I) (요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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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독생자, 믿는 자 (I) (요 3:16)


미국 텔레비전에서 스포츠 중계를 보노라면 가끔 관중석에서 'JOHN 3:16' 즉 '요한복음 3장 16절'이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야구장에서는 홈플레이트 바로 뒤쪽, 미식축구장에서는 골대 바로 뒤쪽에 주로 앉아 있다가, 텔레비전 카메라가 자기 쪽으로 비치는 기미만 있으면 얼른 그 플래카드를 들어 올리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정말 지혜로운 전도자들이라고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미국 전 지역에 방송되는 텔레비전 화면에 정식으로 전도 광고문을 낸다면 얼마나 돈이 많이 들겠습니까?
  
하지만 돈 한 푼 안들이고도 그저 자기가 얻게 된 좋은 좌석의 이점, 즉 방송사에서야 좋든 싫든 그 각도로 카메라를 잡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십분 활용해서 그처럼 효과적인 전도의 기회로 삼는 미국의 크리스천들을 보면서 저는 아주 통쾌한 기분까지 들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전도 플래카드와 관련해서 한 번은 웃지 못 할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어느 해 미 프로야구 월드시리즈 아니면 그 전의 리그 챔피언 결정전 시리즈 중이었는데, 그 경기 중에도 홈플레이트 바로 뒤쪽에 그 유명한 'JOHN 3:16'의 플래카드를 들었다 내렸다 하는 관중이 한 명 있었습니다.
  
마침 그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의 각도가 너무나 좋아서 센터필터 쪽 외야석의 텔레비전 카메라가 투수 뒤쪽에서 홈플레이트를 향해 비추어 줄 때 우타자가 나와 있으면 그 'JOHN 3:16'의 플래카드가 화면의 좌측 상단에 또렷하게 돋보이도록 채우곤 했던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그 플래카드가 텔레비전 화면에 여러 차례 계속 등장하고 있던 중, 갑자기 해설자 중에 한 명이 "지금 저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사람은 John의 열렬한 팬임에 틀림없다."라고 코멘트를 했습니다.
마침 그 순간에 타자로 등장했던 선수의 이름(first name)이 John이었는데, 또 공교롭게도 그 선수의 생애 통산 타율인지 시리즈 타율인지 하는 것이 바로 그 시점에 하필이면 정확하게도 3할 1푼 6리였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해설자는 기독신자가 아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만약 그것이 타율을 가리키는 숫자라면 '.316'으로 쓰지 '3:16'으로 쓸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돌발 상황을 맞이하여 가장 당황한 사람은 바로 곁에 있던 아나운서였습니다.
그는 그 플래카드의 의미를 바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동료 해설자의 무식한 코멘트에 대하여 어떻게 맞장구를 쳐서 적당히 무마해 줄 길이 없었고, 그 결과 갑자기 한 5초 정도 정말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방송사고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생방송 상황이라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엎지른 물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경기장에서 흔히 보이는 그런 플래카드의 의미가 '요한복음 3장 16절'이라는 성경 구절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사실쯤은 대부분의 미국 사람들은 신자가 아니라도 거의 다 아는 것인데도, 그 해설자는 자기 딴에는 무언가 예리하게 지적해 낸다는 것이 오히려 자신의 몰상식을 전국에 생방송되는 중계석상에서 고스란히 드러내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여튼 이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은 신구약 66권 전체를 두고 딱 한 절만 뽑으라고 한다면 누구라도 바로 이 구절을 꼽을 정도로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한 절의 말씀 속에 기독교 복음의 진수가 완전히 압축 요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신자에게 성경의 한 구절을 소개하면서 전도할 때에도 그런 플래카드를 통해서 꼭 알려 주고 싶은 구절이며, 신자 자신도 항상 기억하고 상고하며 그 심령에 늘 되새기게 되는 '성경의 백미(白眉)'에 해당되는 요절(要節)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오늘 주일부터 부활주일까지 3주간에 걸쳐서 바로 이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 속에 명백히 증거되고 있는 기독교 복음의 진수 세 가지를 각각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사역'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은 바로 이 사실을 두고 "하나님이 세상을"이라고 서두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주어가 되고 '세상'이 목적어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시고 '세상'은 그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역사의 '대상'이 된다는 뜻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기쁜 구원의 소식은 '세상이 하나님을 원했다.'라든지 '세상이 하나님을 발견했다.'라는 말들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구원해 주시기로 작정하심으로써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오로지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도하'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바로 기독교 구원론의 제일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란 이름, '하나님'이란 존재는 세상의 사람이 지각하고 생각할 수 있는 대상 가운데서 가장 지고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사람은 그 어떤 우수한 지식과 논리와 관념을 동원해도 이 '하나님'이란 말보다 더 높고 더 크고 더 깊은 대상을 인식하거나 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야말로 사람이 지각할 수 있는 최대한도이며 최고한도에 해당되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다시 한 번 더 말하자면, 비록 사람이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부르고 그 개념을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 '하나님 자신'은 그런 '하나님을 말하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존재와는 비교 자체도 될 수 없는 극히 위대하시고 무한하신 존재이신 것입니다.

그에 비하여 '세상'은 어떠하겠습니까?
여기 본문에서 말하는 '세상'이란 물론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 아닌 다른 존재들', 즉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 세계를 통틀어 가리키는 의미로도 볼 수 있겠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모든 세상 사람들'을 가리키는 제유법적 표현입니다.
그 '사람'이란 존재는 우선 하나님의 창조하신 피조물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타공인은 하고 있지만,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돌이켜 보면 다른 우주만물과 꼭 마찬가지로 오직 '지음 받은 존재'의 수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사람'이란 존재는 죄로 말미암아 '완전타락'의 상태에 빠진 것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온갖 피조물들 가운데서도 '악을 행할 줄 아는' 존재는 오직 사람밖에 없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지극히 완벽하게, 실로 좋게 만들어 놓으신 이 세상에 죄를 가져온 것은 다른 피조물이 아니라 바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돌이켜 볼 때 본문에 "하나님이 세상을"이라고 이 두 단어가 가까이 붙어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 실상에 있어서 이 두 존재의 차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보다 훨씬 더 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창조주'와 '죄인인 피조물'이라는 이 까마득히 멀고도 먼 차이점은 원래 사람 쪽에서는 어찌할 수 없는 불가능의 간격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완전타락'은 동시에 '전적무능력' 상태로 직결되는 것입니다.
즉 모든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받기 위한 무슨 이니셔티브를 취할 수 있기는커녕 시도조차 할 수 없으며 사실상 그런 의도(意圖) 자체부터 자기 마음속에 생기지 아니하는 상태에 빠진 것이며, 여기에는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로마서 3장 10절부터 12절에서 "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증거해 주고 있는 현실인 것입니다.

바로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해 주시고 먼저 찾아와 주심으로써 그처럼 다르고도 먼 사이를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어떤 소통과 관계라는 것이 가능하게 된 원인은 순전히 그것을 회복시켜 주실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 편에서 먼저 주도권을 행사해 주셨다는 사실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베풀어 주시는 구원을 논할 때에는 먼저 이 사실, 즉 '하나님의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주권'을 그 출발점으로 두지 않는다면 이미 자체적으로 모순을 안고 있는 것이며 결코 성립될 수 없는 헛된 구원론이 될 뿐인 것입니다.

종교란 '신과 인간과의 관계 설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 관계에서 과연 어느 쪽이 주도권을 가져야 마땅하겠습니까?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 저 '지고하고도 거룩하신 절대주권자'와 '유한한 존재이며 타락한 죄인'에 불과한 인간 – 이 사이에서 무슨 관계라는 것이 성립될 수 있다면 과연 어느 쪽에서 이니셔티브를 잡아야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오직 '하나님 쪽'일 뿐입니다.

집에 개나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을 키우게 되는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주인'과 '애완동물' 사이의 관계가 제일 처음에 어떻게 시작됩니까?
주인이 될 사람이 애완동물 가게에 가서 우리 안에 있는 온갖 종류의 개나 고양이들 가운데 자기의 마음에 드는 놈을 하나 고릅니까, 아니면 개나 고양이들 쪽에서 찾아온 고객들 중에 자기의 주인이 되었으면 싶은 사람을 선택해서 그 집으로 가게 됩니까?
  
그렇게 시작된 주인과 애완동물 사이의 관계가 점점 더 깊어지는 과정은 또 어떻게 해서 이루어집니까?
주인이 먼저 애완동물에게 먹이를 주는 것부터 시작해서 온갖 사랑을 먼저 베풀어 줌으로써 그 개나 고양이도 자기 주인에게 정을 느끼게 됩니까, 아니면 애완동물 쪽에서 먼저 주인을 뜨겁게 사랑하고 무조건 복종하고 온갖 '예쁜 짓, 착한 짓'을 많이 하는 바람에 주인도 어쩔 수 없이 그 개나 고양이를 사랑하게 됩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100퍼센트 전부가 다 오로지 '주인 쪽'의 주도하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과 애완동물' 사이의 관계도 그런 식으로 성립되는 것이라면, 하물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는 더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가장 근본적이고도 대표적인 것은 흔히 생각하고 있듯이 '사랑'이 아니라 바로 '절대주권'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앞에서 설명했듯이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에서 나온 것이지만 '하나님의 절대주권'이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사랑'이란 하나님의 수많은 속성들 가운데서 오직 '인간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부분적인 속성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구원사역,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 하나님의 대속과 심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선하심 등등 하나님에 대한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한 근본과 원인과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소위 종교를 논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들 하면서 실상은 그 얼마나 어리석은 짓들을 해 왔습니까?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무슨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처럼 펄쩍 뛰면서 거부반응부터 즉각 나타내고, 그 대신에 오직 사람 자신의 그 '똑똑한 이성과 지식', 그 '고상한 윤리와 도덕'이라는 것을 내세우면서 하나님을 제멋대로 정의합니다.
  
하나님이란 이 지고하신 존재를 논하면서도 그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란 존재가 도대체 어떤 위치에 있는지조차 까맣게 잊어 먹고서, 마치 사람이 하나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존재인양 '사람의 IQ를 가지고 연구해 볼 때 신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논문들을 쓰고, '인간의 구미와 필요에 맞는 종교란 이런 것이어야 한다.'라고 자기 마음대로 마구 만들어 왔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종교를 우리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인본주의 종교'라고 부릅니다.
즉 '인간이 전적으로 주도권을 행사하면서 만들어 낸 인간 중심의 종교'요 '오로지 사람의 목적을 위하여 신이 수단이 되는 실로 이기적인 종교'인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주객전도의 종교입니까?

그런 인본주의 종교에서는 '하나님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라고 시작하지 않고 그 대신에 '인간이 자기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 고행을 하고 득도를 하여'라고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을 사람을 통하여 이루시려고'라고 말하는 대신에 '인간이 자기 소원 성취를 위하여 정화수를 떠다 놓고 삼천 배를 올림으로써'라고 말하기 마련입니다.
  
바로 그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 물, 불, 돌 등 무생물들을 비롯하여 온갖 나무나 동물을 신으로 섬기는 미신 종교입니다.
인간 자신의 판단에 신이라고 여겨지는 것들, 인간 스스로의 생각에 자기의 요구를 들어 줄 힘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을 다 자신의 '우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3)는 말씀 그대로가 아니겠습니까? 

더욱 기가 막히는 일은 기독교 안에도 '인본주의 기독교'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하나님의 절대주권'에서 시작하지 아니하고 기독교의 모든 진리와 신앙과 윤리와 법도를 오로지 '인간'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인본주의적 기독교의 목사들은 '하나님이 세상을'이라는 원래 순서를 '사람이 신을 추구하여'라고 정반대로 바꾸어 버립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성경 대신에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깨닫고 체험한 후에 고백하고 기록하기를'이라고 주장하면서 '가짜 성경' 즉 위경(僞經)을 신구약 66권에 '더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인본주의 기독교'는 '우상 종교'와 오십보백보의 차이일 뿐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개혁주의 기독교에서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처럼 '인간이 자기 수양을 통해서 차원 높은 도를 닦거나 특별한 종교적 체험을 함으로써 찾게 된 신'이 아니라 오직 철두철미하게 '스스로 계신 절대주권자 하나님'에게서만 출발하게 됩니까?
그것은 바로 '계시의존사색(啓示依存思索)'을 통해서입니다.
이것은 참된 신앙, 바른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람에게 보여 주시는 계시의 말씀에만 전적으로 의존해서 생각하는 방법'뿐이라는 뜻입니다. 
아주 쉽게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은 오직 성경 말씀밖에 없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가 현미경을 들여다보면 아메바와 같은 단세포 동물들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사람과 같은 고차원의 동물과는 비교도 되지 않은 가장 하급의 생물이 겨우 세포 한 개만을 가지고 그것도 생명이라고 꿈틀거리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나 아메바다 둘 다 '동물계(界)'에 들어가기는 하겠지만 그 양자의 지각 능력 혹은 인식 능력의 차이라는 것은 극과 극입니다.

우선 사람 쪽에서는 아메바라는 존재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단세포 동물의 신체구조부터 시작해서 그 일생과 생태계 전체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손바닥 들여다보듯 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메바 쪽에서는 제아무리 자기 눈을 크게 뜨고 보아도 사람을 지각할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포 하나뿐인 아메바에게는 사물을 볼 수 있는 눈조차 없고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 뇌 자체가 아예 없기 때문입니다.
아메바는 어쩌면 자기네들끼리는 서로 상대방을 인식하고 무언가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방법이 있을지는 몰라도, 아메바 쪽에서 사람을 볼 때에는 무슨 의사 전달은커녕 사람이란 존재가 어떤 것인지, 아니 사람이란 존재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자기네 스스로는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그 아메바들 중에서 그래도 제일 똑똑하다는 어떤 '아메바 천재 박사'라는 것이 나타나서 연구 논문 따위를 발표하면서 "사람이라는 존재는 이러이러할 것이다."라든지 혹은 "사람이란 것은 우리 단세포 동물의 이성과 관측과 실험으로써는 그 존재가 증명될 수 없으니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어쩌고저쩌고 한다면, 그것이 우리 사람의 눈에는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정말 같잖은, 정말 가소롭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아메바 가운데서는 '제일 유식하고 가장 도통한 아메바'라 하더라도, 사람 앞에서의 단세포 동물이란 문자 그대로 '새 발의 피'도 될 수 없는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존재 수준의 차이가 어디 사람과 단세포 동물의 차이 정도이겠습니까?
사람과 단세포 동물은 그래도 같은 '동물계'에 속하는 만큼 무언가 공통점이 조금이라도 있기는 있을 것입니다.
그처럼 같은 '계(界)'에 속해도 그렇게 큰 차이가 나는데, 하물며 '신'과 '인간'이라는 이 두 존재, 전혀 무슨 유사성이나 공통분모 같은 것이 아예 있을 수 없는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이 두 존재 사이의 차이는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처지에 있는 인간이 도대체 어떻게 스스로 하나님을 찾고 인식할 수 있겠으며 도대체 어떻게 인간 편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하나님과 무슨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감히 하나님 앞에서 제 잘난 척하면서 제멋대로 하나님을 논할 때, 그런 사람들을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의 기분이 어떠하시겠습니까?
자기네 딴에는 만물의 영장입네 어쩌고 하면서, '신이 어떻고 종교가 어떻고'라고 책상 앞에서 토론하고 있는 모습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내려다보실 때 그 얼마나 한심하고도 가소롭겠습니까?

바로 그런 인간 편의 '전적 무능력'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성경'의 말씀을 사람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성경을 통하여 우리 사람에게 당신을 '스스로 있는 자 여호와'로 계시, 즉 '드러내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 결과 원래 사람의 양심이나 이성이나 지각이나 감각으로는 결코 볼 수도 알 수도 없었던 하나님을 바로 그 성경 말씀을 '읽고 듣고 깨닫는 계시의존사색'을 통해서 우리는 만나고 알고 믿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오묘하고도 위대한 '연역법적인 신앙'입니다.
불신자들은 인간 스스로 알 수 있는 모든 지식적 정보들과 실험적 증거들을 다 모으고 종합정리를 해서 '귀납법적'으로 '하나님은 없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맙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들은 성경의 증거를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깨닫고 믿게 됨으로써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라는 대전제(presupposition), 절대명제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일단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근본'을 알고 나면 나머지 모든 문제들은 그야말로 연역법적으로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불신자들은 '우주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그냥 있는 것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왜 있게 되었는지는 묻지 말자.'라는 실존주의 철학으로 얼버무립니다. 
혹은 '우주는 대폭발(Big Bang)로 시작되었다.'라는, 아직 가설(假說)에 불과한 물리학의 이론으로 설명하려 하지만 그 '빅뱅'이라는 것이 왜 어떻게 발생했는지에 대해서는 물론 대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라는 대전제를 믿는 신자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셨다.'라고 아주 간단명료하게 대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인류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온갖 추측과 억측들만 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그런 '막연한 예언'들은 인구 폭발, 식량난, 핵전쟁, 지구 온난화, 공해, 혜성 충돌, 외계인 침공, 우주의 열적 종말 등등 전부가 다 불안하고 절망적인 것들뿐입니다.
하지만 '구원주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라는 신앙을 확실히 고백하는 기독신자� 그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그 '역사의 종말'을 오히려 설레는 마음으로 소망 중에 기다리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라는 '주체'와 "세상"이라는 '객체'를 명백히 구별하여 깨닫게 될 때에 바로 이처럼 놀랍고도 위대한, 실로 오묘하면서도 너무나 고마운 '구원 신앙'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세상을' - 바로 여기에 우리 기독교 신앙의 기본 중의 기본이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 - 바로 이것이야말로 참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진짜 신앙고백'이며 창조의 신비와 인류의 종말까지 다 깨닫게 해 주는 '지혜의 근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기독교만이 참된 종교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신을 믿는 유일한 종교가 바로 기독교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부터 시작하는 종교는 절대로 참된 종교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종교의 신이란 인간의 지식과 인간의 욕구 안에 '제한되어 있는 존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즉 신이라고는 하지만 '스스로 있는 절대자'가 아니라 '인간에 의해서 생겨나게 된 상대적이요 유한적인 존재'에 불과한 신인 것입니다.
그처럼 '사람보다 열등한 존재', '사람이 만든 피조물에 불과한 우상'을 신이라고 스스로 떠받들고 섬긴다고 하니 이미 시작부터 자기모순에 빠져 있는 종교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기독교는 그런 '인본주의 종교'가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즉 철두철미한 '신본주의 종교'입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이 아담을 먼저 찾아와'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변함없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해 주시며'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까지 찾아와' 주심으로써 '죄인 구원'의 길이 활짝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입니까?
물에 빠진 사람 편에서 제아무리 혼자서 허우적대어 보았자 자기 자신을 스스로 건져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물 밖에 있는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 쪽으로 손을 내밀어 주어야 가능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완전 타락'과 '전적 무능력'에 빠져 있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바로 그처럼 당신의 손을 우리에게 내밀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요한복음 3장 16절의 첫 두 단어를 통하여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 '세상사람'을 위하여 이처럼 절대주권적인 구원 역사를 베풀어 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믿음으로써 참된 신앙의 진리를 깨닫고 참된 구원의 길을 찾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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