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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을 기뻐한다 (골 1: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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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기뻐한다 (골 1:23-29)


I. 후회

어느 부부의 불편한 진실이 있습니다. 
부인이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나 이뻐~ 
그럼 예쁘지.
여보 나 사랑해
그럼 사랑하고 말고. 많이 사랑해.
그럼 당신 우리 다시 태어나도 나랑 결혼 할거야?
당신처럼 예쁜 여자를 다음 세상에서 어떻게 나 혼자 가지겠어. 
다른 사람에게도 기회를 줘야지.

여러분의 인생은 후회스럽습니까? 자랑스럽습니까? 

한 감옥에서 보내온 후회의 편지가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세상은 마냥 더럽고 악하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눈을 뜨고 보니 세상은 참 아름답습니다.
예수 믿고 회개하고 세례받은 눈으로 보니 
내가 지금까지 보고 느끼던 세상과는 다른 세상이 보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아픕니다. 
이 귀한 진리를 너무나 뒤늦게 깨달은 것입니다. 
늦게라도 깨달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감사하지만, 
늦어도 너무 늦었습니다. 
제겐 누군가를 사랑할 시간도, 누군가를 섬길 시간도, 
감사할 시간도 없습니다. 」

한 가난한 집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때 미술시간에 준비물을 챙겨가지 못했습니다. 누군가 이 아이에게 “훔쳐서라도 준비물을 챙겨야지”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래? 훔치면 되는 거야. 그때부터 이 아이는 도둑놈이 되고 사람을 죽여 돈을 뺏는 살인강도가 되었습니다. 
이 살인강도가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서 그를 전도해 준 사람에게 보낸 편지의 한 토막입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 껄껄하는 세 가지 후회가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 껄. 

조금 만 더 참을 껄. 감정을 누르지 못하고, 말을 참지 못해서 얼마나 많은 문제를 낳았던가.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 놓은 문제속에 파묻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며 살다 죽는가 하는 후회입니다. 

두 번째 껄. 

조금 더 베풀고 섬길 껄.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좀 더 베풀 껄. 이웃에게 좀 더 따뜻한 마음을 전해 줄 껄. 좀 더 따뜻한 말을 할 껄. 좀 더 섬겨줄 껄 너무 인색했구나. 천국에 가지고 갈게 없더랍니다. 

세 번째 껄. 

하나님이 주신 복을 좀 더 즐길 껄. 기뻐할 수 있었는데 왜 그리도 인생이 짜증스러웠던지. 시기, 질투는 왜 그리 많았었는지. 불평, 불만, 원망은 오죽이나 많았던가. 내 마음이 행복하지 못하니 나와 관계된 내 가족, 이웃들도 행복하지 못했구나. 하는 후회입니다. 

이 세 가지 후회 껄에 대하여 성경을 살펴보면 분명 한 가지 후회 껄이 더 있습니다. 전도할 껄. 복음을 전할 껄. 그 사람 구원해 낼 껄...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한 부자의 후회입니다. 

내가 전하지 않아 지옥가는 사람을 보며 가슴을 치며 후회합니다. 
주님 앞에 섰는데 내 면류관이 너무나 초라해서 후회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못하고 게으르게 산 것이 한스럽기만 합니다. 

II. 복음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이유는 복음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 23절에 “복음”이란 단어가 한 절 속에 3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 듣고 살아난 사람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믿고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 교우들 중 복음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만사가 흔들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 마음이 복음 중에서 확증되고 확증되면 세상 환경 여하에 따라서 내 삶이 흔들거리지 않습니다. 
복음이 부끄러운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께서 나도 너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자산입니다. 
교회의 능력은 복음에 있습니다. 기독교의 자산은 복음입니다. 

복음이 없으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어떤 길도, 
변화될 수 있는 어떤 길도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타락은 교회의 타락이요 복음의 변질은 교회의 변질입니다. 
중세교회의 타락은 복음의 타락이요 복음의 변질이었습니다. 
중교개혁은 복음의 회복입니다. 

오늘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신뢰를 상실한 것은 복음의 공공성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위기는 복음의 위기가 있을 뿐입니다. 

기독교의 능력은 오직 복음의 능력이 있을 뿐입니다. 
대형교회가 능력이 아닙니다. 
유능한 목사도 능력이 될 수가 없습니다. 
교회 정치세력의 힘이 능력이 될 수가 없습니다. 
복음만이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태양이 1초동안 발하는 에너지만으로도 이땅 70억 인구가 100년을 쓰고도 남는다고 합니다. 
주님이 흘리신 보혈 한 방울이면 만인간을 구원하고 우주를 구원하고도 남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엔 생명이 살아납니다. 
복음을 듣지 못하면 사람이 죽고 교회가 죽고 땅이 죽고 나라가 죽습니다. 
지금 북한이 망하는 이유는 복음을 듣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 척박한 땅에도 복음이 전해지면 그곳도 하나님의 땅이 될 수 있고 
사람이 살고 땅이 살고 나라가 삽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III. 교회의 존재 목적

그런점에서 교회의 존재 목적이 무엇일까요?
목장교회에서 교회의 존재 목적 중요한 것을 
2C - celebration(예배), cell(셀)입니다. 
우리가 모여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위해서. 
예배가 건강해야 교회가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소그룹. 목장 운동을 통해서 사람들이 세워지고, 그 안에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셀예배에서 만났던 주님을 성령을 이웃들을 향하여 섬기고 나누어 줄 수 있는 자리가 목장입니다. 

2H - Holiness(거룩성), Harvest(추수성)입니다.
교회에 와서 거룩을 경험한 사람들이 교회 공동체를 거룩의 그릇으로 준비하고 
나아가 잃어버린 영혼을 다시 거룩의 그릇으로 모셔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방주와도 같다는 것입니다. 

2E - Edification - 사람을 세우고 사람을 양육하고 제자로 삼는 것입니다. 
      Evangelism -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님들을 제자로 삼아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교회는 존재한다고 얘기했습니다. 

모든 교회의 존재 목적 두 가지를 정리하면

① 모이는 교회의 예배와 ②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복음전도입니다.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흩어져서 예수를 증거하는 공동체,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오늘 세상이 기대하는 종교의 다양한 목적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선교적 차원에서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의 첫 번째 목적은 예배입니다. 
교회는 오직 예수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 작품을 처음으로 공개했습니다. 

거기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최후의 만찬」 그림이 공개되자 마자 일제히 환호했습니다. 그 중 한 사람. 예수님의 손에 들린 그 살아 숨쉬는 유리잔을 보라! 금방이라도 그림 밖으로 튕겨나올 것 같은 영롱하고 찬란한 유리잔을 보라고 외쳤습니다. 다빈치는 붓을 들어 유리잔을 뭉개버렸습니다. 나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집중하기를 원한다. 예수 외에 다른 것이 먼저 우리의 관심을 끌었다면 이 그림은 실패다. 그리고 다시 그림을 그렸다는 얘기입니다. 

교회에 와서 유리잔에 환호한 어리석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교회는 존재하는 것입니다. 

비교적 먼 곳에서 우리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님이 계십니다.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더랍니다. 
가까운 동네에도 교회가 이렇게 많은데 왜 그 먼곳까지 교회를 찾아가십니까?
그분이 그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서울대학 멀다고 안 다녀요?”
좋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먼 곳까지 간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출애굽의 목적이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예배당 건축에서 고려해야 될 첫 번째로 고려해야 할 문제가 예배학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인가?
모든 성도님들이 예배시간마다 은혜받는 공간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
이것이 교회 건축학입니다. 
성령의 임재를 구하는 목적 또한 영감있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두 번째 목적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전도는 이 땅에 있는 모든 성도들(교회)에게 명하신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지상명령을 순종하기 위해서 태신자들을 품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1) 성도들의 심장 한 켠엔 예수님이 계시고, 다른 한 켠엔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가슴앓이가 있어야 합니다. 

모든 성도님들은 이 지상명령을 순종하기 위해서 각자 자신의 태신자(VIP)를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2) 모여 예배하고 세상으로 흩어진 성도들은 이웃사람들, 

특히 나의 태신자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나의 태신자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그들과의 관계가 옥토가 되었을 때 비로써 복음의 씨를 뿌릴때 싹이 나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3) 좋은 관계, 신뢰 관계가 형성되면 복음을 전할 기회를 사십시요. 

예배와 우리교회를 소개하고 예수를 믿도록 권면하고 교회에 함께 가자고 요청하십시오. 
세 번째 단계는 예배로 그들을 초청하는 것입니다. 

4) 여러분의 VIP 태신자를 여러분의 목장, 소그룹으로 초대하십시오.

그들이 목장에 오는 날은 이름 그대로 그들이 VIP가 되도록 목자와 의논하여 따뜻한 환영의 시간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복음전도 네 번째 단계는 여러분이 속해있는 소그룹, 특히 목장으로 초대하십시오.

5) 그들이 교회에 등록하고 교회생활을 시작하면 우리교회 성공의 사다리를 통해 믿음이 성장하도록 도와 주십시오. 양육과 훈련의 시작입니다. 

복음전도 다섯 번째는 알파코스로 시작되는 성공의 사다리를 통해서 그들을 양육하십시오. 
우리교회 비전의 표어가 있습니다. 전도 표어가 있습니다. 
“한 영혼을 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댓가라도 지불한다.”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한 영혼을 구한 것은 우주를 구한 것이다.”
내가 금뺏지를 팔았더라면 on more, on more 한 사람을 더 살릴 수 있었는데.
이따위 짚차를 팔았더라면 on more, on more 한 사람을 구원할 수 있었는데...

양육 표어가 있습니다. 
“한번 구원한 사람을 다시는 세상에 빼앗기지 않는다.”
한번 하나님의 가족으로 구원했으면 다시는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는다. 
영적 자녀로 삼아 돌보고 키우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제자로 부르실 때 어부로 부르셨습니다.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리고 주님께서 몸된 교회를 이 땅에 남기시고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시고 
사람을 양육하고 키우는 제자로 삼는 목자로 위임하셨습니다. 

6) 마지막 여섯 번째 우리교회 소그룹 사역자 - 셀리더 - 목자가 되십시오.

다시 한번 요약합니다. 

① VIP를 품고 기도하세요.
② 나의 VIP와 좋은 관계를 맺으십시오.
③ 기회를 얻어 복음을 전하고 예배로 인도하세요.
④ 여러분의 목장으로 초대하십시오.
⑤ 성공의 사다리를 통해 양육하십시오.
⑥ 그들이 목자가 되도록 주님의 제자가 되도록 도우십시오. 

지금은 추수 때입니다. 쭉정이와 알곡이 갈라지는 때입니다. 
전도자와 하나님 나라 구경꾼이 갈라지는 때입니다. 

여러분은,
예배에 성공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까?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까? 알곡입니까?

IV. 행복하십니까?

예배와 복음전도가 가장 중요한 교회의 존재목적이라면 그건 지상명령이요 
성공적인 예배, 성공적인 전도는 우리 성도들의 사명, 존재 목적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소명과 사명을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① 그것이 제일 귀하게 보여야 한다.

예배와 전도가 내 인생에서 가장 귀하게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② 두 번째 그것이 제일 쉬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쁨으로 예배하고, 기쁨으로 감당할 만한 달란트, 은사를 주셨기에 그것이 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③ 세 번째 그것이 가장 즐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피곤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가 행복하고 전도가 즐거우면 주님의 제자입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목사가 설교하기가 싫고, 교우들과 교제가 힘들고, 기도가 어렵고, 전도가 죽기보다 싫으면 그날로 목사 그만둬야 하지요. 
성도들이 예배가 싫고 복음이 자랑스럽지 않다면 주님의 제자는 아닌 것입니다. 
물론 전도가 부담스럽지요. 그러나 그것은 거룩한 부담감이요 영광스런 부담감입니다. 

여러분의 인생, 신앙생활은 행복하십니까?

사랑하는 사람(부인)에게 선물하는 날이 있다고 합니다. 
친구 둘이 꽃을 선물하기 위해서 꽃가게에  들어갔습니다. 
꽃가게에서 둘이서 논쟁이 붙었습니다. 
꽃을 선물하면 꽃을 사는 사람이 행복할까? 아니면 꽃을 받는 사람이 행복할까?
결론이 나지 않아서 꽃가게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누가 행복할 것 같습니까?
꽃가게 주인이 빙그레 웃으며 “꽃을 판 내가 제일 행복하지요.” 그러더랍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행복이요, 복음을 받는 것도 행복이지만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해피 메이커(Happy Maker)라는 약이 있습니다. 
우리 몸의 정서를 관장하는 신경전달물질 세로 토닉을 적절히 조절하여 
슬픔, 우울, 불행감을 기쁨과 행복으로 바꿔주는 약입니다. 
선진국에서는 꽤 팔리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해피메이커는 선진국 약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습니다. 복음 안에 있습니다. 성령 안에 있습니다. 

온도계가 있고 온도 조절계가 있습니다. 
온도계는 날씨가 추우면 내려갑니다. 저절로 내려갑니다. 
더워지면 저절로 올라갑니다.

온도조절기는 
날씨가 추워지면 조절기를 높여서 기온을 따뜻하게 만듭니다.
더우지면 조절기를 내려서 온도를 시원한 공기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인생들도 보면 온도계와 같은 사람이 있고 온도조절기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환경에 의하여 끌려 다니는 사람, 증권 주가에 따라서 아침마다 오르락 내리락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이들 성적에 따라서 기분이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있고 남편의 기분에 따라 하루 인생의 기분이 왔다갔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온도기 인생입니다. 

그러나 온도조절기는 내 환경을 바꾸는 것입니다. 
추워지면 따뜻하게 덥히면 되는 것입니다. 
더우면 시원하게 만들면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복음 안에,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
내 인생의 환경을 긍정적으로 창조적으로 능동적으로 진취적으로 행복으로 바꿀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V.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복음전도와 행복과의 관계를 대단히 역설적으로 표현했습니다. 
23절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고백합니다. 
이어 24절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복음 때문에 받는 고난은 괴로움만은 아니라는 겁니다.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 있기에 기쁨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여기 “기뻐한다”는 말은 사도 바울이 사용할 때는 주로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기뻐하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주의 제자, 전도자에겐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이 다른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큰 수고를 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큰 기쁨을 주십니다. 
복음 때문에 큰 괴로움을 당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큰 영광을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당한 고난의 성격을 대단히 중요한 말로 해석을 합니다. 
전도자의 수고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예수께서 못다 하신 고난이 있다는 말일까요? No.
예수의 고난은 미완성 고난이란 말일까요? 아닙니다. 
예수의 고난은 우리를 구원하기에 온전하고 넉넉하기만 합니다. 
십자가는 온 우주, 만인간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의 고난이 우리의 고난을 위한 고난이라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그 구원의 소식, 복음을 전하다 당하는 전도자, 
주의 제자들의 수고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의 척도가 되듯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말 중엔 
사도 바울만이 겪어야 했던 모진 고난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일전 새벽기도회 때에 우리가 고린도후서 11:23-27 함께 읽고 
울어버린, 울 수밖에 없었던 그 고난을 말합니다. 
그 엄청난 고난을 어찌 당했을까? 사도 바울은 어찌 이겨냈을까?
어찌 그 고난을 뚫고 포기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복음전도자로 승리할 수 있었을까? 
우리가 목놓아 울었던 그 내용입니다. 

그 엄청난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운다”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마음으로만 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말로 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몸으로, 내 삶으로 지는 것입니다. 
시간을 짤라 피를 내고, 물질을 짤라 고통을 감수하고,
자존심을 짤라 상처받은 치유자로 살아가며, 
취미를 짤라 주님 앞에 헌신하고 봉사하는 삶을 말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전 평양 대부흥 이후 이 땅에 와 있던 선교사들은 
과연 “고난을 기쁘게 여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난을 기뻐한다. 사도 바울과 함께 외쳤던 사람들입니다. 
몸서리 치는 추위와 더위를 즐겼습니다. 
죽음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배고픔은 그들의 희락이었습니다. 
거친 음식은 그들의 자랑이었고 주님 앞에 들고 갈 수 있는 면류관이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은 안산읍 발월 장터에서 복음을 전하다 귀신들린 한 젊은이를 만납니다. 하나님 이 아이를 고쳐 주십시오. 이 아이의 병을 고쳐 주셔야 복음 전도의 문이 열려집니다. 아이를 붙들고 기도하는데 귀신이 발악을 하고 몸부림을 합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고 하루종일 지나도록 물 한모금 마시지 않고 이 아이와 씨름합니다. 이틀이 되고 사흘이 지났습니다. 성령의 임재와 함께 귀신은 떠났고 아이의 병은 고쳐졌고 그 마을에 복음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아담스 선교사는 복음 전도에 미쳐서 그를 파송한 교회에 보낸 편지에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난 3년동안 하루도 쉬지 못했다. 내가 가는 마을마다 교회가 세워지고 이틀 사흘이 멀다하고 새로운 교회가 세워지는 기쁨을 누린다.

젼킨 선교사는 탁월한 한국어를 구사하던 선교사였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부흥회와 전도를 요청했습니다. 몹시도 추운 겨울, 폐렴에 걸렸습니다. 다음 마을로 전도를 나가는 젼킨 선교사를 붙들고 친구들이 말합니다. “당신이 가야할 곳은 전도지가 아니라 병원이요” 그러자 오늘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또 한명이 죽을 수 있습니다. 나를 기다리는 교회를 실망시킬 수 없습니다. 강단에서 복음을 전하다 피를 토하고 죽어 갔습니다. 

게일 선교사는 아내의 무덤 흙이 마르기도 전에 이 도시, 저 도시로 달려가 전도했습니다. 
클랙 선교사는 어린 자녀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부흥회 일정을 소화하고 다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복음의 미친 그 옛날의 믿음의 선진들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젊은이들이 이땅 온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진정으로 미친 사람들이 예수에 미친 사람들이 민족에 미친 사람들이 
성령에 미친 사람들이 민족 복음화에 미친 사람들이 기도에 미친 사람들이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과연 하나님 나라는 고난을 기쁘게 여겼던 
당신의 종들에 의해서 이 땅에 세워진 영광의 나라였습니다. 

우리 자신에게 묻습니다. 
“나는 우리는 우리의 믿음은 고난 조차도 기뻐할 수 있을까요?”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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