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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지혜로 (고전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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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지혜로 (고전 2:1-9)


고린도는 기원전 146년 로마군대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꼭 한 세기 쯤 후 율리우스 시저의 명에 의해 재건된 도시입니다. 기원전 27년 아가야 주의 로마총독 주재지가 되었고 그리스 최대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다양성, 문화, 교역, 이교주의, 물질적 부 그리고 도덕적 부패로 유명한 번창하는 항구도시였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이 세웠지만 그가 떠난 후 이 교회에는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심지어는 바울 자신의 사도로서의 권위까지도 도전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앞서는 고전1:18-25에서 사도 바울은 대단히 단순하면서 공격적인 글을 썼습니다. 그 글의 내용을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미련한 것이라 여기는 자들은 멸망할 자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어차피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의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다. 아무리 지혜 있는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에게 있어서 가장 단순한 일조차 알 수 없다. 그러므로 그저 믿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도를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신다. 그 그리스도, 그 십자가, 그 믿음이 곧 사람의 유일한 참 지혜이고 능력이다. 우리가 전할 것은 그것밖에 없다.”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간단명료한 입장을 취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그가 고린도에 올 때 어디서 왔는가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아덴에서 왔습니다(행18:1). 아덴에서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고린도로 떠나기 직전에 그가 한 일이 아덴의 바위 언덕인 아레오바고에서 연설한 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행17:22-31). 그 연설은 철학과 수사학의 도시 아덴 사람들을 상대로 한 연설답게 대단히 논리적이고 변증적이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합니다. 

그런데 그 연설을 들은 아덴 사람들 가운데 믿게 된 사람도 몇 있기는 했지만 그들의 반응은 대체로 냉냉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조롱한 사람도 있고 “다시 듣겠다.”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울의 실망은 컸던 것 같습니다. 그는 다른 데서처럼 계속해서 전도하려 하지 않고 곧바로 아덴을 떠나버린 것입니다(행17:3233). 

바울이 아덴에서의 전도를 포기하고 떠나버린 이유의 하나로 우리는 그의 어눌한 말솜씨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당대의 아덴은 철학의 중심지였고 수사학이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천하에 지혜가 많다 하고 말 잘 한다는 궤변가들과 웅변가들은 다 모여드는 곳이었습니다. 사도 바울 또한 대단한 학자였습니다. 지식과 글 솜씨로는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이 인정하듯이 말이 시원치 않았던 것입니다(고후10:10, 11:6). 

고린도후서에서 그는 사람들이 자기의 글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다”(고후10:10) 한다고 썼으며 또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다.”(고후11:6) 했습니다. 바울은 아마도 수사학이 발달한 아덴에서 역시 자기의 어눌한 말 가지고는 그곳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다는 확실한 사실을 참담하다 할 정도로 경험한 것 같습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그의 말을 더 들어보겠다는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덴을 도망치듯 영영 떠나게 한 원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눌한 말솜씨만이 그의 전도가 아덴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한 이유는 아니라고 봅니다. 아덴에서의 그의 연설은 대단히 논리적이고 변증적인 훌륭한 연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연설에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았음을 주목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대단히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아덴 사람들의 사고에 맞추려고 한 것이었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그의 연설의 실패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아덴에서의 바울의 전도의 실패는 죽은 자의 부활을 말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그의 부활을 보다 분명하고 담대히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바울 자신이 뒤늦게 처절히 깨달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가 아덴을 떠나서 간 곳이 바로 아덴에서 서쪽으로 80킬로미터 떨어진 고린도였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의 바울의 심정을 잘 드러내 준 대목이 오늘 본문의 1-5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아덴으로부터 고린도에 올 때 바울이 천명한 이 결심은 뒤집어 보면 그가 아덴에서는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려 했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빼놓고 말했으며, 그가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이 아니라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전도하려 했고, 사람들의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사람의 지혜에 있게 하려 했음을 자인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덴에서의 실패의 원인임을 그가 뼈저리게 깨달았음을 실토한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는 인간의 지혜로, 논리적 접근으로 전도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세상의 지혜에 대해 더 이상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지혜로 맞서기로 결심했음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지혜는 믿지 않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져 있어서 이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지만 믿는 이들에게는 참된 지혜라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이들에게만 이 비밀한 진리를 알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만 만세 전부터 정해진 것이기에 이 세상 사람들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으며 마음으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최고 통치자들과 최고로 지혜 있다 하는 자들조차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대제사장과 헤롯 왕과 로마 총독 빌라도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하나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본문 6-9절). 그것은 이미 이사야 같은 예언자를 통해서 알려졌고 성경에 기록된 바라는 것입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3)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지혜는 오직 하나님께서 성령으로만 보이게 하시는 진리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고전2;10). 

오늘날 현대인들은 옛날 아덴 사람들 이상으로 매사를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사고합니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니지만 신앙의 문제까지 그렇게 하다가는 복음의 역동성을 잃어버리고 말게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복음의 사역을 사람의 능력과 지혜로 하려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곧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역사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사역하기를 주저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담대한 전도자로 세상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과 그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의 미련한 것을 사용하시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만드실 것임을 믿어야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복음 그대로 전하는 전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대에 부딪치고, 그래서 조롱을 당하더라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인 복음을 믿는 우리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사람들 앞에서 주눅들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는 부활주일에 다시 믿지 않는 이들을 교회로 초청하려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들에게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지혜를 알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아덴 사람들을 상대로 별로 성공하지 못한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아덴에서의 실패 이후 세상의 말과 지혜로 사람들을 설득하려 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지혜로만 전하기로 작정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의지하고 전하면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어차피 보지 못하던 이가 보게 되고 듣지 못하던 이가 듣게 되며 깨닫지 못하던 이들이 깨닫게 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에 다 같이 동참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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