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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의 교회다움 (엡 1: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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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교회다움 (엡 1:20-23)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한 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참 좋은 시입니다. 꽃이 피기 위해서는 비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어 무거운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이러한 과정은 한 사람, 가정,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잡하고 다양한 어려운 일들로 인해 믿음의 꽃을 피우며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흔들리며 때로는 심하게 휘청거리기도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자라며 결국은 믿음의 꽃을 피우게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숙한 모습으로 세워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감당하기까지는 많은 시련과 어려움들을 이기고 나가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교회사를 읽어보면 초대교회에서부터 교회는 평안의 시기보다 어려운 시기가 훨씬 많았습니다. 온갖 어려움과 시련을 겪으면서도 그 곳에서 자라고 꽃을 피워 오늘의 교회로 발전했습니다. 

성경에 교회라는 단어가 처음 나오는 것은 마태복음 16장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세례 요한, 엘리야, 또는 예레미야라고 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아들이시니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교회’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여기에 쓰인  교회라는 단어는 ‘에클레시아’ 라는 단어입니다.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부름 받아 모인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로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나의 구세주가 되심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입니다. 초대교회를 보면 외부로부터 오는 심한 박해와 내부적으로 생긴 갈등의 비바람을 맞으며 그 속에서 복음의 꽃을 피웠습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분명하게 답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교회란 무엇인가? 에 대해서는 22과 23절 상반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22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하나님은 교회를 몸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하나님의 오른 편에 앉히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몸으로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그의 몸이라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교회의 주인 되심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교회의 주인은 목사도, 장로도, 어떤 직분자도, 어떤 영향력 있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몸은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입니다. 심지어 잠잘 때도 우리 몸은 계속해서 움직입니다. 심장이 계속 운동합니다. 모든 장기가 움직입니다. 우리의 몸이 활동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운동은 뇌의 명령에 따라 움직입니다. 뇌와 교류를 하며 뇌에서 내려지는 지시에 따라 움직입니다. 만약에 머리에서 내리는 명령에 따라 몸의 지체들이 움직이지 않고 따로 움직인다면 그것은 병든 몸이 됩니다. 뇌의 통제에서 벗어난 몸의 지체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도리어 몸 전체에게 아픔이 됩니다. 

교회도 우리의 몸처럼 쉬지 않고 움직입니다. 교회를 이루고 있는 모든 지체들이 예배, 교육, 봉사, 교제, 선교 등을 위해 계속해서 움직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움직임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교회에서 무슨 결정을 하고 일을 추진할 때 예수님의 마음으로 판단하고 실행해야 합니다. 교회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예수님의 마음이 아니라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한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가지고 결정을 하거나, 단지 경제적인, 사회적인 이유들을 들어서 결정한다면 그것은 건강한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중심 내용은 모든 생활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내 생각과 내 상황을 중심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실까? 라는 질문을 자신과 교회 공동체에게 던지며 예수님의 생각을 중심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런 결정을 하는 과정에서 어떤 때는 손해를 보기도 합니다. 

힘들고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을 중심으로 결정을 내릴 때는 힘들고 어려웠지만 결정을 내린 후에 이루어지는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믿음의 역사와 감동을 경험하는 신앙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가 그 대표적인 본이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받는 것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릅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와 능력 안에서 부활의 영광으로 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역사고 섭리입니다.  

우리들이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지체들로서 우리의 말과 발, 손의 움직임이 교회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의 생각을 중심으로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나를 위한 결정이 되고, 사람을 위한 결정이 되고, 상황을 위한 결정이 되면 교회로서의 정체성과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섬기면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한 번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교회다워짐의 첫 번째는 예수님이 교회의 주인이 되심이 분명해 질 때입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그 분의 가치관이 교회를 지배할 때입니다. 우리 행복한 교회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예수님의 생각과 가치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소망합니다.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먼저 그 답을 말한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하셨던 일들을 교회가 이어서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행하는 영적인 기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역을 다 마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세워 놓으신 기관이 바로 교회입니다. 역사 속에서 샌들을 신고 다니며, 가난한 자와 병든 자의 친구가 되어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며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던 역사적인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의 우편으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믿은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를 통해서 오늘도 당신이 하기를 원하시는 일들을 행하십니다. 교회를 통해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돌보십니다. 영혼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교회를 통해 위로하십니다. 세상에서 지친 사람들을 교회를 통해 품고 그들의 친구가 되게 하십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복음의 사역을 대행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볼 수 없지만 교회가 하는 일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봅니다. 교회의 사랑과 섬김과 희생과 선교하는 삶을 통해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그 분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23절 말씀은 교회가 해야 할 일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여기에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는 말씀이 이해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여러 번역들을 읽어보고 비교해 보면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즉 예수님의 가치와 정신으로 교회가 충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통해 세상을 충만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가득 찬 예수님의 정신과 가치가 교회에서 흘러 나와 세상을 충만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교회만을 위해서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게 하기 위해 세우셨습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충만함이라는 것이 교회가 많아지고 기독교인의 수가 많아지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세상의 모든 건물들이 다 교회가 되고 그곳에 기독교인들이 가득 찬다고 해서 그리스도가 충만한 것은 아닙니다. 세계 역사를 보면 가장 큰 교회들이 마을의 중심에 세워지고 기독교를 믿지 않으면 출세를 할 수 없을 만큼 기독교인의 숫자가 가장 많았던 시기가 가장 비기독교적인 시대였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 국가들 끼리 영토싸움과 이권 싸움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했습니다. 무고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죽였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 하면서도 세상의 권력에 취해 눈이 어두워졌고 권력을 가지고 휘두르며 사람들을 억압했습니다.  

교회는 예배당과 성도들의 숫자로 세상을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충성스럽게 감당해서 온 세상을 예수님의 사랑과 정신과 가치로 가득 채우도록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있는 것은 교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서입니다. 

구약의 에스겔서 47장에 보면 에스겔이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의 환상을 봅니다. 성전 앞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발목까지 오릅니다. 물이 더 흘러나와 무릎까지 오릅니다. 물이 더 흘러나와 허리까지 오릅니다. 물이 가슴까지 차올라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물이 강물이 되어 성전 밖으로 흘러갑니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니 바닷물이 되살아납니다. 강물 주변에는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강과 바다에는 물고기들이 되살아납니다. 각기 종류대로 물고기들이 강과 바다에 가득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세계입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하나님의 생각으로 가득 차는 곳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 진정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생각이 성전에서부터 흘러나와 가득 차야 합니다. 말씀이 발목과 무릎 정도까지만 차면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가지고 교회를 이끄는 데에 힘든 면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거슬러 자신의 뜻을 펼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허리와 가슴을 넘어서면 자신의 의지와 뜻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흘러가야 합니다. 교회는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자신들이 복될 뿐만 아니라 그 복이 교회가 세워져 있는 지역으로 흘러가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충만한 것이 아니라 교회 주변으로까지 충만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넘쳐흐르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교회 주변의 사람들에게 나눠져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성령이 거하시는 내 몸이 성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몸과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야 합니다. 내 안에 충만한 은혜가 가족과 이웃과 직장의 동료들과 교회의 성도들에게까지 흘러갈 수 있어야 합니다. 행복한 교회가 주의 말씀과 은혜로 충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가 충만해 그 은혜가 교회 주변의 이웃들에게까지 흘러 넘쳐 저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고 영광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온전한 교회로 세워져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고 그 은혜를 주변에 넘치게 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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