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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행복을 원하십니까? (느 13:1-3, 2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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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행복을 원하십니까? (느 13:1-3, 28-31)


"행복은 상태가 아니라 관계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행복하다고 해도 행복을 나눌 대상이 없다면, 그리고 그러한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행복감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사실은 행복이라는 단어는 성경적인 단어라고 하기보다는 매우 세속적인 단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영어로 행복이라는 단어를 표기할 때 일반적으로 'happiness'라는 단어를 씁니다.  이 단어는 'happen'이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히 누리게 되는 행운 정도의 의미를 갖습니다.  마치 로또 복권 당첨 수준의 상태를 말한다고 할 것입니다.

좀 더 성경적인 단어는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축복이라는 말을 일반적으로 영어로 표기를 할 때 'blessing'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옛날 영어 어원에 보면, 'bleed', "피를 흘린다"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본래 피 제사를 의미하는 단어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구약 시대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드립니다.  그 때 제물에 각을 뜨고 피를 흘립니다.  그런데 이 피 흘림에서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입니다.  그래서 축복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안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기쁨의 삶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경적인 축복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자유의 몸이 되어서 시온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전을 짓고 무너진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느헤미야나 에스라와 같은 지도자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들의 삶을 정리하기 시작합니다.  영적 대부흥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하면서 기뻐하는 백성, 행복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성경적으로 축복 받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행복이 그런 것처럼 행복이란 얻기보다는 그 행복을 지키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것입니다.  그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로 그들을 섬겨왔던 느헤미야는 12년간의 이스라엘 총독 생활을 일단은 마무리 짓습니다.  그리고 본래 자신이 섬겼던 아닥사스다 왕이 있는 페르시아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본문 6절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본문 6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에는 내가 예루살렘에 있지 아니하였느니라 바벨론 왕 아닥사스다 삼십이년에 내가 왕에게 나아갔다가 며칠 후에 왕에게 말미를 청하고."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에게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얼마동안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학자들 사이에는 몇 가지 의견이 존재합니다.  가장 길게 잡는 사람들은 아마 1년 가까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을 합니다.  어쨌든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떠나간 다음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지도자의 공백 기간에 리더십의 공백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영적인 방황을 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느헤미야가 그들에게 가르쳤던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에 따라 살고 있었더라면 그 방황은 필요 없는 방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들의 삶에서 느헤미야가 강조한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들을 져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방황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서 여러 가지 고통과 어려움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왕의 허락을 받고 조국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온 느헤미야는 그들이 다시 하나님의 축복 아래 머물러 있는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그 백성들을 모아놓고 행복의 원칙들을 강조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한 번 행복한 백성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가르쳤던 원칙들은 동일하게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변함없이 행복을 지켜주는 원칙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변함없이 그의 행복을 지키는 비밀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행복을 지키는 비밀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지도자 느헤미야가 잠시 이스라엘을 떠나있는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방황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있었습니다.  따라서 돌아온 지도자 느헤미야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백성들을 모아놓고 그들에게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13장 1절은 이렇게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그 날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렸는데 그 책에 기록하기를"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본이 되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모세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그 말씀 속에서 중요한 강조점을 백성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느헤미야는 이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때에만 그들의 삶에서 행복의 회복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벽을 재건하고 학사 에스라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것도 느헤미야였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통한 심령의 부흥이 없는 행복은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낭독되어지는 말씀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본문 3절을 보면,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반응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회복되기 시작을 합니다.  말씀을 듣고, 반응을 하고, 그리고 그 말씀을 다시 붙들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삶의 회복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최근의 내 삶이 좀 흔들리고 있다고 느끼시는 분이 계십니까?  혹은 영적으로 방황하고 있다고 생각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내가 침체 속에 빠져 있다고 느끼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십시오.  기억하십시오.  내가 진정한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 내 삶이 회복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한 번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말씀을 붙드십시오.  돈을 붙들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십시오.  어떤 사람은 아침에 눈을 뜨는 그 순간부터 돈을 생각합니다.  온 종일 주야로 돈을 묵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정말 돈 사람들입니다.  인기를 붙들려고 하지 마십시오.  명예를 붙들려고 하지 마십시오.  권력을 붙들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런 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다 지나간다고 말입니다.  아침의 안개와 같다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다 헛되고 헛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육체는 폐하고 없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을 붙드십시오.  그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말씀을 붙들 때 우리의 삶에서 행복은 시작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행복의 장이 있습니다.  시편 1편입니다.  거기에 보면, 복 있는 사람, 행복한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붙들고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실 1절은 행복한 사람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 행복한 사람의 상태에 들어가기 위해서 무엇보다 해야 할 일은 그 말씀을 붙들고 묵상하는 일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무엇이 약속되어져 있습니까?  시편 1편 3절에 보면 이렇게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그렇습니다.  철 따라 열매를 맺는 푸르고 푸른 그런 복된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붙들고 사는데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행복의 출발, 우리가 행복을 지키는데 가장 중요한 비밀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인도에서 사역한 사람들 가운데 지금도 인도의 기독교인들에게서 존경을 받고 있는 E. 스탠리 존스(Stanley Jones)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가 한 번은 인도의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말씀을 가르치면서 이렇게 강조를 했습니다.
"여러분, 정말 행복하고 싶으면 말씀을 붙드세요.  정말 성공하고 싶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십시오."

예배가 끝난 후에 한 청년이 와서 스탠리 존스 박사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선교사님, 이렇게 말씀을 붙들고 산다고 돈이 생기나요?  직장이 생기나요?"
이때 스탠리 존스는 이 청년에게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자네에게 한 가지 분명한 약속을 할 수 있네.  만일 자네가 이 말씀을 붙들고 살기를 작정한다면 그때부터 이 말씀이 자네를 붙들어 인도할 것이라네."
그렇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 이것이 성도의 행복이고, 하나님의 백성의 축복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내가 이 견고한 행복에 머물러 살려면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십시오.  주일에만 나와서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말씀을 붙드십시오.  그것이 내가 주님의 견고한 행복 안에 머물러 사는 삶의 비밀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살기로 한 번 결단해 보십시오.  이 말씀이 당신을 붙드는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것만이 영원토록 변함없는 행복을 누리고 지키는 유일한 비밀이 될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두 번째로, 구별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읽고 첫 번째로 요구한 것은 암몬과 모압 사람들과의 분리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인종적인 편견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결코 이방인을 제외시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은 열방 가운데서 주께서 높임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한 때, 이 시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압이나 암몬 백성들과 섞이지 말아야 할 것을 명령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서 받을 수 있는 세속적인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세상 사람들과 만나서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복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세상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을 만나십시오.  그러나 반대로 그들에게서 세속적인 영향을 받을 것 같으면 중단하십시오.  그들과는 일단 분리하십시오.  그들과는 구별된 삶을 사셔야 합니다.  거기에서 내가 그리스도인의 독특성과 세상에서 빼앗기지 않을 신앙의 견고한 확신이 섰을 때 우리는 세상을 향해서 다시 담대히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시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저들과의 구별이었습니다.  분리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3절에서 다시 한 번 이 말씀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3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모두 분리하였느니라."

과거에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구별된 삶, 혹은 성별된 삶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요즘은 세속화의 거센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성별에 대한 신앙이 많이 약화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나오지만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아무런 부담감도 없이 그들 앞에서 술을 마십니다.  그가 주일에 교회에 나가는 외에는 도대체 저 사람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변함없이 성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속과의 분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를 죄짓게 만들고 나를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는 일체의 세속적인 영향에서 자신을 차단하고 구별하는 구별된 삶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이어지는 4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별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실천해야 할 두 가지의 경건 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십일조의 실천이고, 두 번째는 안식일의 준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구별된 삶과 어떻게 관련이 있을까요?  십일조는 돈과 관련된 것입니다.  안식일은 시간과 관련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돈 관리를 잘하고, 시간 관리를 잘하면 그 사람은 어디에서도 반드시 성공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관리하는 첫 번째 원칙으로 성경은 십일조와 안식일의 준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돈 관리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돈 관리에 있어서 첫 번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십일조를 강조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성경에 십일조가 나오는 모든 대목을 찾아서 읽어보면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는 정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10분의 1을 드리면, 나머지 10의 9는 내 것이니까 내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10분의 10, 전체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소유하셨고, 그것을 나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 중에 10분의 1을 구체적으로, 가시적으로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은 나머지 10분의 9도 그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대로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10분의 1도 하나님께 드릴 줄을 모른다면 10분의 9를 가지고 그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선용하리라고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기대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회복에 있어서 느헤미야는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원칙인 십일조의 실천과 결단이 있어야 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도전과 교훈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응답을 했습니까?  본문 12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

백성들은 드디어 거룩한 말씀 앞에 순종을 결단합니다.  그들이 순종하는 그 순간이 바로 이스라엘 공동체가 행복을 회복하는 결정적인 전기가 된 것입니다.
안식일의 준수 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 6일 동안 창조하시고, 제7일에는 쉬셨습니다.  일주일의 7일이라는 시간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7일 가운데 하루를 구별하여 그날에는 온전히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며 쉴 것을 기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렇게 함으로써 이런 훈련을 통해서 나머지 6일도 그 시간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깨닫고 날마다 매시간 시간마다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선하게 사용하실 것을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주일 가운데 하루도 하나님 앞에 구별하여 드리지 못한다면 나머지 6일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선용할 것을 우리가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정한 영적 회복을 기대했던 느헤미야는 이 안식일의 정신을 잃어버리기 시작할 때 그들의 모든 경건이 무너진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7절을 보면 민족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서 이 안식일의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던 당시의 백성들에게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 17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유다의 모든 귀인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

저는 구약적 안식일이 신약에서 그 의미가 전혀 똑같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안식일의 정신은 신약에 와서도 동일하게 강조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떻게 안식일의 정신을 오늘의 삶에서 다시 한 번 회복할 수가 있을까요?

저는 실제적으로 이런 제안을 해 보고 싶습니다.  저희 교회는 주일 오후예배를 드립니다.  주일 예배는 온전히 드리셔야 합니다.  그런데 오후 예배가 끝나고 난 뒤에 집에 가셔서 푹 쉬시는 것보다는 그래도 도움이 필요한 곳에 찾아가서 봉사를 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가족들과 의미 있는 대화의 시간도 필요합니다.  주변에 아파하고 병든 이웃들을 방문하고 위로를 나누는 것도 뜻깊은 현대적 주일 정신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돈을 모으고, 시간을 제 마음대로 쓰고 즐기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돈과 시간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맡겨주신 돈과 시간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거룩한 도구로 쓰여지며, 내가 쓰임을 받는다는 행복과 기쁨과 감격을 누릴 수가 있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의 행복은 세상과 어울리고 동화되는데 있지 않습니다.  세상과 다르게 사는 것,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진정한 행복의 모습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 구별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그 소중한 행복을 지킬 수 있는 삶이 저와 여러분의 몫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행복을 지키는 비밀 세 번째는, 기도로 도움을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저녁 기도회 시간에 느헤미야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 1장을 보면, 이 책은 느헤미야의 기도로 시작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느헤미야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자기 조국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조국으로 보내시고 오랫동안 폐허처럼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세우는 기적적인 일들이 그의 기도를 통해서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느헤미야의 기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을 가져오는 시작이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의 마지막 장인 13장 마지막절은 다시 기도로 끝마치고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느헤미야는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마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기도가 형식적인 기도에 치우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회의를 할 때 처음에 기도하고 마지막에 기도를 하지만 종종 형식적인 기도에 그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를 읽으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느헤미야에게 있어서 기도는 결코 형식이 아닙니다.  기도는 그의 존재였습니다.  기도는 그의 삶 전체였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느헤미야의 이 기도는 자신을 축복해 달라는 그런 기도가 아닙니다.  느헤미야의 이 마지막 기도는 그가 지도자로서 백성들을 위하여 최선의 섬김의 행동을 한 다음 꼭 그렇게 이루어지고 지켜지게 해 달라는 마음의 기도였습니다.

우리가 13장을 보게 되면, 느헤미야의 이런 기도가 여기 한 번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한 번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3장 1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이 일로 말미암아 나를 기억하옵소서."  같은 말입니다.  제가 최선을 다했는데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셔서 이 민족을 축복해 주십시오.  22절의 기도도 같은 내용의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는 형식이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위기의 때에만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날마다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들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날마다 때마다 새로운 도전과 시련과 문제와 과제 앞에 서게 됩니다.  오늘의 도전과 과제, 오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오늘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마치 내가 오늘 하루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오늘의 양식이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오늘을 위해서는 오늘의 양식이 필요합니다.  일주일 전에 먹은 양식을 가지고 오늘을 버틸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생활에서 이와 비슷한 사고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주일 전에 교회에 와서 잠깐 기도한 것을 가지고 일주일을 버티려고 합니다.  시험에 들고 흐느적거리는 이유가 당연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을 위해서는 오늘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오늘의 문제, 오늘의 과제, 오늘의 시련, 오늘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오늘 기도하셔야 합니다.  날마다 기도하셔야 합니다.

기도를 그친다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그치는 그 순간 우리는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에 매달리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다움과 그리스도인다움을 잃어버립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은 속물 인생으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상실하는 순간 우리는 불신자들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우리들 가운데 흐느적거리며, 자신의 삶이 방황하고 있다고 생각되시는 분이 계십니까?
내 삶의 감격도 능력도 성령의 기름 부으심도 충만함도 기쁨도 경험하지 못하고 오늘 그냥 생존만 하고 있다고 생각되시는 분이 계십니까?
계속 그렇게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거하며, 주님의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 기쁨과 능력으로 충만한 하나님과의 동행을 열망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렇게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런 하나님의 축복을 열망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제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십시오.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서만 말씀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시간마다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십시오.  주일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 순간 성경책을 진열장에 꽂아놓지 말고 내 손이 가기 쉬운 가장 가까운 곳에 두고 말씀을 펴서 읽으십시오.  그리고 말씀에 명하신 바를 따라 죄된 것,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일체의 세상적이고 세속적인 것에서 자신을 구별하십시오.  세상과 거룩한 결별을 선언하십시오.  그리고 무릎을 꿇으십시오.

오늘 하루의 삶을 승리하며 살기 위해서 오늘 주님께서 나에게 주실 도움과 능력과 기쁨을 위해서 기도의 무릎을 꿇으십시오.  여러분이 무릎을 꿇는 그 자리에서 오늘의 승리가 탄생할 줄로 믿습니다.  무릎을 꿇는 그 자리에 오늘의 비전이 주어질 것입니다.  내일을 위해 무릎을 꿇는 거기에 내일을 위한 놀라운 설계와 약속이 주어질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당신의 무릎 아래서 새날이 태어날 것입니다.  거기에서 새 걸음이 시작될 것입니다.

아주 오래 전 로마에 북 아프리카 출신의 한 청년이 살았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에 부모님을 따라서 교회에 나갔었지만 성장 과정에서 부모의 신앙을 떠났습니다.  마니교라는 아주 부도덕한 이단에 빠져서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 교회에 나간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살면서도 언제나 마음이 괴롭고 아팠습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공허함이 있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그런 자각도 있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모습에 대해서 부끄러워하며 갈등하던 어느 날, 베란다에서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톨레 레게!"(tole lege)  이 라틴어의 뜻은 "펴서 읽어라!"는 뜻이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그것을 반복하고 있었고, 그의 마음속에 혹시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펴 두었던 성경을 다시 읽어보았는데 그 본문이 로마서 13장 12절 이하의 내용이었습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말씀을 읽는 순간 강력한 힘에 압도되어 그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자신을 찾아오시고 만나주신 주님께 이 어두움의 세상과 결별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가 얼마 동안을 기도했을 때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도를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일어나는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옛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사람, 기독교 역사에 가장 위대하고 거룩한 영향을 끼치며 인류 역사에 획을 그을 새 사람이 되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성 어거스틴이었습니다.

그날 어거스틴에게는 세 가지의 결단이 있었습니다.  첫째, 그는 거룩한 말씀을 붙들고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둘째, 그는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셋째, 그는 기도의 무릎을 꿇고 날마다 주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가 그렇게 오랫동안 헤매고 찾았던 거룩한 행복이 그에게 임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거스틴에게 임했던 하나님이 주시는 이 거룩한 행복이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도 임할 수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이 주시는 이 놀라운 행복과 축복이 여러분의 심령에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축복 가운데 사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이 말씀을 붙들고 살기를 결심할 수 있다면, 그리고 여러분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온갖 세속적이고 죄된 것에서 자신을 구별하기로 결심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기도의 무릎을 꿇고 날마다 주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기로 결심을 하신다면 기억하십시오.  이 행복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행복 속에 이미 들어가신 것입니다.  행복하십시오.  세속적인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대하시고 바라시는 성경적으로 행복하십시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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